067화. 장학송의 이야기 (1)
* * *
붉은 보석 두 개가 강한월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하지만 강한월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회귀한 혈승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린아. 난 문주님과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하는데….”
드디어 때가 된 건가?
청송문에 닥친 위기는 해결했으니, 이제 미뤄둔 숙제를 할 차례.
돌덩이를 얹은 듯 마음이 무거웠지만, 진가린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분 말씀 잘 나누세요. 전 먼저 가 있을게요.”
달빛을 받으며 솔밭 사이를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장학송 문주가 나무 둥치에 걸터앉았다.
“강 소협도 이리 앉으시오. 이야기가 길 듯하니.”
“제가 무얼 여쭈려는지 짐작이 가시나 보군요?”
“내 상태에 대해 궁금하신 거 아니오? 가린이에 대해 할 말도 있는 것 같고.”
“맞습니다. 문주님께 직접 듣기 전엔 납득이 안되는 상황이라…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문주님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죽으려 하십니까?”
당돌한 질문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평안함을 유지했던 장학송의 표정에 당황한 빛이 번졌다.
“설마 내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요?”
“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방치하고 계시니, 자살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허허, 윤창호의 비수에서 벗어났다고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군. 청송문에 전해지는 비법이 있어 운 좋게 외부의 기운을 한번 끌어 썼을 뿐인데.”
“문주님. 비수가 목을 찔러오는 그 짧은 순간에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동방선도가 그 분야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완전한 자연체를 이루고 초월경에 든 고인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이것 참… 강 소협 눈에는 내가 초월경의 고수인 것 같소? 병으로 약해지기 전에도 나는 고작 절정의 수준이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인데….”
“네. 그렇게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더더욱 궁금한 것입니다. 어째서 수십 년간 세상을 속이셨습니까?”
장학송의 당황한 빛이 더욱 짙어졌다.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마땅치 않았기에, 언짢은 기색을 보여 상황을 모면하려 했는데….
“강 소협. 말이 좀 지나치군. 가린이의 상관이라 예의를 갖춰 대했지만, 이렇게 억지를 부리며 나를 핍박한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
“가린이가 죽습니다.”
“뭐… 뭐라고?”
“문주님이 진실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진가린은 죽게 될 겁니다.”
장학송은 충격에 휩싸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또한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상반된 표정이 뒤섞인 채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나 보군. 도대체 가린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요?”
“그녀는 무림맹의 문무대 소속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부대인데, 어떤 일을 하는 곳이냐 하면….”
강한월이 설명을 시작했다.
미래에서 회귀한 혈승과 문무대에 대해.
장학송 문주는 제법 놀란 표정이었지만, 회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하긴, 십이신석을 보관하고 있던 청송문의 장문인이니….
“허허, 우리 가린이가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는구려.”
“진가린은 무척 잘해주고 있습니다. 문무대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이지요. 그런데… 그녀는 자신도 각성을 앞둔 회귀자가 아닐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아니, 어째서?”
“그럴 만도 하지요. 자신의 몸 안에 감춰진 힘이 있다는데, 그게 보통의 내공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 같이 느껴진다 합니다. 저 역시 얼핏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또한 임무 중 납치를 당했을 때에는 혈승의 피의 비술에 걸렸는데도 그녀는 멀쩡했습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게다가 명치 부근에 큰 흉터가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회귀자를 판별하는 기준인 잔혼반 확인이 어렵게끔. 무척이나 공교로운 일이지요.”
“확실히 가린이가 걱정할 만했군.”
장학송 문주가 웃음기가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입가엔 가벼운 미소마저 걸렸는데, 걱정할 것이 없다는 투였다.
“문주께선 이 상황이 재밌으신가 보군요. 그녀가 회귀자가 아님을 확신하시니까 그런 거겠죠. 그렇다는 것은 그녀에게 혼란을 안겨준 몸속의 기운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는 뜻인데… 저도 이제는 그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강 소협 보기엔 그 기운의 정체가 무엇이요?”
“영선기(靈仙氣). 선도의 수행자가 경지에 오르면 몸속에 쌓아가던 선기도 영성을 띄게 된다고 하더군요. 진가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힘을 보태 준 기운. 사부의 마음이 담긴 영선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장학송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눈앞의 젊은이가 대단한 고수라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제 보니 지식과 지혜도 무공 못지않은 것이다.
“맞소. 가린이 몸속엔 영선기가 있소. 강 소협이 이미 파악을 했으니 잘됐군. 이것으로 가린이 문제는 해결이 되었으니.”
“아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죽게 됩니다.”
“뭐요? 왜 가린이가 죽는다는 거요?”
“가린이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제가 생각한 걸 그녀라고 생각하지 못할까요?”
“허허 이것 참.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너는 회귀자가 아니다. 네가 걱정했던 것은 사부님이 넘겨주신 영선기다. 라고 말하면 그녀가 기뻐할 것 같냐는 말입니다. 생명력이나 다름없는 기운을 넘겨준 그 사부님이 얼마 못 살고 죽을 텐데… 그 순간 가린이의 마음도 함께 죽을 겁니다.”
“그… 그건….”
장학송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강한월의 말이 맞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가린의 오해를 풀어주려면 영선기에 대해 알려줘야 하고, 그럼 사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선기를 돌려주겠다고 날뛸 것이 뻔했다.
하지만 절대로 돌려받을 수 없었고….
그 경우 제자는 평생을 자책하며 괴로워하겠지.
“강 소협. 이렇게 나를 몰아붙이는 걸 보니 가린이를 달랠 해결책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문주님께서 어떤 입장을 취하시는 가에 달렸겠지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해결책의 첫 단추는 솔직함에서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때마침 바람이 불어 구름을 몰아냈고, 굳어 있는 장학송의 얼굴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십 년 가까이 조심하며 살아왔건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결국 하늘은 죄를 들춰내고 있었다.
“강 소협의 말이 맞소. 진실은 감추어도 결국 드러나는 법, 더 이상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 이야기를 가린이에게 해도 될지는 강 소협이 듣고 판단해보시구려.”
이야기는 장학송이 진가린을 처음 만난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삼 년간의 고된 수련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날이었다.
수련의 성과가 기대 이상이었기에 장학송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대자연과 소통하며 영선기는 더욱 충만해졌고, 생각하고 행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으니 자연체의 경지에 한 발을 디딘 것.
중원 무림에서는 초월경이라 부른다지?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검을 들고 세상에 나가면 당대 최강이라는 신주의협과도 겨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쾌한 걸음으로 걷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불길한 느낌에 땅을 박차고 단숨에 달려갔다.
역시나 모옥 한 채가 불타고 있었다.
마적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생존자가 있으려나?
장풍을 날려 불길을 밀어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발견한 것은 쓰러져 있는 두 남녀.
심장과 복부에 큰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집이 불타기 전 이미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집안 곳곳을 뒤졌다.
생존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
그리고… 다락방의 구석에서 막 불이 붙기 시작한 작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린이었군요?”
“그렇소. 급히 불붙은 옷을 벗겨내고 아이를 안고 나왔소. 가슴 언저리에 화상이 심했지만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마도 연기에 질식한 듯한데, 얼굴에 혈색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숨이 넘어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일면식 없는 남이었지만, 장학송은 밀려드는 자책감을 참기 어려웠다.
초월경에 진입했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순식간에 허탈함과 자괴감으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소. 왜 그렇게 괴로웠을까? 그냥 불쌍하게 죽은 아이일 뿐인데… 어째서 내 자식의 죽음을 본 것처럼 가슴이 미어졌을까?”
장학송은 떨리는 손을 아이의 가슴에 얹었다.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았다.
육체의 손상은 시작되지 않았고, 혼백은 아직 삼도천을 건너지 않았을 테니 다시 불러올 수 있으리라.
즉시 영선기를 주입하려던 장학송의 손이 멈칫했다.
새로운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이 아이를 살려도 괜찮을까?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장학송은 일평생 겪었던 것보다 더 큰 갈등에 휩싸였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결국… 장학송은 아이에게 선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선기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주변 대기에서 쉴 새 없이 생기를 끌어당겼고, 어느 순간 육체를 이탈했던 혼백이 다시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이는, 진가린은 눈을 떴다.
“나는 기뻤소. 그간 고된 수련을 하며 경지를 높인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라는 생각마저 들더군. 이후 아이는 밝게 자라줬고 내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되었지. 이게 다요. 나와 가린이에 대한 이야기는.”
혼자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자 후련함을 느낀 것일까?
장학송 문주가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강한월의 굳은 인상은 아직 펴지지 않았다.
“꺼진 생명을 되살릴 정도로 영선기를 배양하신 문주님의 수행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높은 경지에 오르신 분이 어째서 자신의 병은 치료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병을 치료하고 말고는 내 마음 아니겠소? 나는 자연스레 살다 가고 싶은 거요. 하늘이 정해준 수명만큼 살면 충분한 것이지.”
“적어도 치료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시는군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요.”
“하지만 그 마음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도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추리한 것을 들려드릴까 합니다만….”
장학송은 이런 식의 대화가 불편했다.
강한월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숨겨둔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울 뿐.
“경청하겠소.”
“문주님이 가린이를 살리실 때 무척 망설였을 겁니다. 측은지심이 일어 아이를 다시 살리려 했지만, 그 순간 이것이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떠올리셨겠죠.”
“흠… 사람을 살리는 일이 천리에 반한다고…?”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지요. 비록 그것이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일지언정.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사람의 관점에서는 선행이지만, 하늘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역천행입니다. 동방선도의 맥을 잇는 문주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지요.”
장학송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한월이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도를 수행해 하늘의 비밀을 엿본 자가 역천을 저지른다면… 반서? 천벌? 이름이 뭐가 되었던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노여움이 본인이 아닌 사랑하는 다른 누군가를 향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강 소협은 역천의 결과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군.”
“제가 하는 일이 그것이니까요. 회귀라는 역천을 행한 자들을 잡는 일. 어쨌건 가린이를 구한 후 문주께선 계속 고민하셨을 겁니다. 언젠가 닥칠 하늘의 분노를 피할 방법이 무엇일까? 그 분노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하지 않도록 할 방도가 무엇일까?”
“그래서… 내가 그 방법을 찾았다는 거요?”
“찾으셨지요. 비록 잘못된 방법이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죽으려고 하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