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장학송의 이야기 (2)
* * *
강한월의 말대로였다.
얼마든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음에도 장학송은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영선기로 한 생명을 되살렸으니, 영선기를 쓰지 않고 죽음을 맞음으로써 균형을 맞추려는 것.
이것이 그가 찾은 하늘의 분노를 피하는 방법이었다.
“가지고 있던 기운은 가린이를 살리는 데 소모하고 이후 수련을 멈추셨으니 사람들은 문주께서 고작 절정 수준의 무인이라 착각한 것이겠죠. 충만했던 선기가 빠져나가고 이후 보충이 안 되니 몸은 오히려 쉽게 약화되었을 것이고요. 매우 천천히 진행되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실은 문주께서는 십수 년 전부터 자살을 행하고 계셨던 겁니다.”
“자살이라… 그건 좀 심한 표현이고. 어쨌든 강 소협의 추리는 대부분 맞소.”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은 아니셨죠?”
“그렇소. 원래는 당당히 하늘에 맞설 생각이었지. 선도를 닦는 수행자의 궁극적 목표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신선이 되는 것인데, 그 역시 천리를 벗어나는 일이지. 난 애당초 천겁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던 거요.”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서둘러 생을 마치려 하십니까?”
“가린이가 건강을 회복하고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바뀝디다. 어느 날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소. 하늘의 노여움이 나를 향하지 않고 가린이를 향하면 어떡하지? 그 두려움이 드는 순간 난 수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오.”
“후회한 적은 없으십니까?”
“허허, 후회라니? 가린이는 정말 잘 자라줬소. 영근이와 송윤이도 좋은 아이들이고. 제자들과 그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후회가 있을 리 없지.”
“그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천겁을 막기 위해 목숨을 버릴 생각도 변함없으시고요?”
“누구라도 그럴 거요. 제자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소?”
강한월은 신주의협이 떠올랐다.
그래, 사부님도 그러실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던지실 수도 있는 분이지.
“가린이가 모르게 하면… 이대로 조용히 끝이 나겠군요?”
“그렇소. 그것이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망이오. 강 소협은 부디 이 이야기를 비밀로….”
“죄송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늦다니? 그게 무슨….”
강한월이 손을 뻗어 장학송 뒤편 나무를 가리켰다.
나무 그늘 속에 은신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진가린이 있는 곳을.
“가… 가린아…!”
깜짝 놀란 장학송이 그녀에게 뛰어가려 했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넋이 나간 듯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
습기가 찬 멍한 눈동자가 말하는 것은 원망일까 아니면 자책일까?
“가린아. 오해하지 말아라. 조금 전 네가 들은 말들은, 실은….”
장학송이 어렵게 한 걸음을 내디뎠으나 진가린은 뒷걸음질 쳤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사부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서 달려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학송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강한월에게 말했다.
“강 소협이 의도한 것이 이런 거요? 이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적어도 한 가지는 이미 얻었지요. 진실. 사부와 제자 사이에 숨김이 없어진 것. 그게 작은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만.”
“맞소. 나 역시 조금은 홀가분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오. 하지만… 가린이의 상심한 모습을 강 소협도 보았지 않소? 좀 전의 그 모습은 마치….”
“마음이 죽어버린 모습이었지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죽게 될 거라고.”
장학송이 다시 한번 나무 둥치에 걸터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일까?
강한월의 눈에는 이제야 터놓고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어찌해야 하겠소?”
“가린이를 되살린 그 순간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문주께서도 알고 계셨죠. 다만, 제자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애써 외면하셨을 뿐.”
장학송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가린이를 믿으십시오. 문주께서 그러신 것처럼, 그녀도 천겁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노여움이 문주를 향하면 문주께서 싸워 이겨내세요. 만약 하늘이 가린이를 노린다면 그녀가 극복해낼 테니까요.”
“그래, 가린이는 강한 아이이지. 하지만 천겁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니오. 사부 된 내 입장에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가린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녀는 회귀자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역천의 존재들을 붙잡아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만드는 일이지요. 그녀가 되살아난 것이 하늘을 노엽게 했다면, 지금 행하는 일로는 하늘을 기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역천의 업을 상쇄시킨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렇게 기대합니다.”
장학송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담담히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두 가지 마음이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강한월은 묵묵히 기다렸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장학송이 눈을 떴다.
“회귀자를 잡는 임무가 천겁을 막아줄 거라는 강 소협의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소. 하늘의 도는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오.”
강한월의 미간이 깊어졌다.
문주는 여전히 삶을 포기하려는 것인가?
“그럼에도 난 제자들과 함께 치열하게 살아볼 생각이요. 선도의 수행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사부와 제자가 서로 아끼며 살아가겠다는 걸 고깝게 보는 하늘이라면… 그딴 하늘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소.”
“문주님….”
“이제부터는 하늘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도에 따라 살겠소.”
기대했던 답이었기에 강한월은 기뻤다.
하지만 장학송의 말 중 어떤 것이 감정을 건드려 잠시 멍 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 소협. 먼저 가서 가린이를 달래주시오. 난 몸을 좀 추스르고 가야겠소.”
* * *
진가린은 앞마당 평상에 앉아있었다.
“대장. 아까 제 표정 연기 어땠어요?”
결과를 묻지 못하고 연기 운운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녀의 걱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실은 강한월이 장학송 문주와 대화를 하고 진가린이 몰래 엿듣는 것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
장학송이 윤창호의 비수를 막아내는 순간 강한월은 숨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고, 바위를 찾으러 가기 전 시간을 내어 진가린과 함께 작전을 짠 것이다.
사전에 계획한 일이라고는 하나, 사부의 입으로 직접 듣는 순간 그녀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강한월은 꿋꿋이 버텨주고 있는 그녀가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래, 대단한 연기였다. 문주께서도 깜빡 속으셨고… 결국 마음을 돌리셨지.”
“그럼… 사부님은 살기로 결심을 하신 거예요?”
진가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원래 이렇게 될 일이었어. 우리가 작전을 짜고 설득하지 않았어도 결국 이리되었을 거야. 이게… 순리니까.”
솔직히 강한월은 무엇이 역천이고 무엇이 순리인지 알 수 없었다.
혈승을 잡을 때는 역천의 죄를 물으면서도 장학송 문주에게는 하늘에 맞서라고 권한 자신의 이중성이 혼란스러웠다.
어쨌건… 잘된 것이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나, 자신이 보기엔 장학송 문주는 좋은 사람이니까.
“대장. 고마워요. 이렇게 또 신세를 지네요.”
“고마워할 것 없다. 날 위해 나섰던 거야. 이로써 널 제대로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내가 이익이지.”
참나, 이것도 농담이라고….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진가린은 환하게 웃었다.
몇 달 만에 지어보는 제대로 된 웃음이었다.
* * *
장학송 문주는 다음 날 해 뜰 녘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몸을 추스르고 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병색이 완연했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사부님! 혼자서 뭐 좋은 거라도 드신 거예요?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한데요.”
“하하하, 나도 나이가 있으니 보양식을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냐.”
진가린은 몇 시진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사부가 고마웠고, 장학송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농담으로 맞아주는 제자가 고마웠다.
환하게 웃으며 사부를 바라보던 진가린이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겼다.
생명을 준, 키워준, 자신을 위해 죽어주려 했던 사부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마음을 담아 꼭 안아주는 것.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잘 되었구나.
진가린이 사부의 품에서 떨어질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강한월이 입을 열었다.
“수련을 다시 시작하셨군요?”
솔직히 강한월은 꽤나 놀랐다.
장학송이 숨을 쉴 때마다 몸 주변에서 출렁거리는 천지원기가 생생히 느껴진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이런 변화라니.
역시 사십도 되기 전에 초월경에 들었던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본격적인 수련 전에 몸풀기를 시작했을 뿐이지. 너무 오래 쉰 데다 나이도 있어서… 예전의 수준을 회복하려면 시간 꽤나 걸릴 것 같구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실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조만간 또 한 명의 초월경 고수가 탄생할 상황.
강한월 입장에선 무척이나 든든한 일이었다.
* * *
강한월과 진가린이 자리를 비운 낙양 문무대.
대장이 없을 시 공식적인 업무 대행은 제갈윤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었고, 가끔 무림맹에 들러 공지사항을 받아오는 일이 다였는데… 오늘따라 무림맹에서 돌아오는 그의 표정이 영 불편했다.
“제갈.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무슨 나쁜 일 있어?”
“휴우, 나쁘다기보다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에요. 일단 모두 모여 보세요.”
대원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한동안 임무가 없던 것을 기회 삼아 다들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것이다.
“짜증 나는 일이라도 좋으니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매일 수련만 하려니 이게 더 짜증 난다고.”
소영영이 기대를 담고 말했지만, 제갈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그녀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일.
“무림맹에서 다음 달에 신룡대회를 개최한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우리 문무대도 꼭 참가해야 한다는군요.”
“신룡대회? 젊은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비무대회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그런 거잖아? 너무 재미있겠는데! 그런데… 이게 왜 짜증 난다는 거야?”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애들이 잔뜩 모일 거라고요. 걔들이 얼마나 재수 없는 데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제갈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은 실소를 터트렸지만 말이다.
제갈윤 본인도 그 재수 없다는 오대세가의 직계이니까.
“그럼 제갈 너는 이번엔 빠지면 되잖아. 문무대 잘 지키고 있어. 우리가 나들이 삼아 참가하고 올 테니.”
“휴우. 그러고 싶긴 한데… 에이, 진짜.”
제갈윤이 짜증 난 이유가 그것이었다.
내총관부에서 받아온 공문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던 것이다.
[ 문무대는 제갈윤 포함 삼 인이 참가할 것 ]
쳇, 이름까지 적어 놓다니.
제갈현선 숙부의 짓이 분명했다.
나름 챙겨주려고 한 것이겠지만, 이렇게 조카의 마음을 몰라서야….
“우리 문무대는 대장 외에 대원 세 명으로 무림맹에 등록되어 있는 터라 세 명 참가하라고 한 것 같아요. 문제는 가린이가 아직 복귀를 안 했으니….”
“호호, 그게 뭐가 문제야. 내가 대신 참가하면 되지.”
마침 잘되었다는 듯 소영영이 웃으며 나섰다.
“소 선배는 안 돼요.”
“왜? 내가 천마신교 출신이어서?”
“그래요. 선배가 아무리 마공을 잘 감춘다 해도 안심할 수가 없어요. 눈썰미가 뛰어난 정파의 명숙들이 대회에 참관할 거라서요. 마찬가지로 광 선배나 챠크라 공력을 익힌 곽철 선배도 안 되고요.”
“그런가? 어쩔 수 없네. 가린이는 외부 임무 중이라고 보고하고, 제갈 너하고 청보 둘이서 참가해야겠네.”
“그것도 좀 그래요. 실은 비공식 대원이 몇 명 있다고 무림맹에 보고를 했었거든요. 그래야 예산을 더 받을 수 있어서… 셋도 채우지 못하면 이상하게 볼 거고, 그럼 더 골치 아파져요.”
“그럼 어떡하지?”
“행사는 한 달 후인데, 그 전에 대장과 가린이가 복귀할 것 같지는 않고. 임시로 대원 한 명 새로 뽑아서 머릿수 채워야 하는 건 아닌지….”
정말 그 수밖에 없는 건가?
다들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소영영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적당한 사람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