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신룡대회 (1)
* * *
“흥, 니들이 단체로 미쳤구나?”
기도 안 찬다는 듯 유선이 눈을 부라렸다.
“누구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소영영 선배가 강하게 요청해서 어쩔 수 없이 제안하는 거라고요!”
“하여튼 난 싫다. 정파 철부지들의 모임에 불려 나가 놀림감이 될 생각은 없어.”
“놀림감은 무슨 놀림감이 된다고 그래요? 문무대 대원인 척 같이 가서 조용히 있다 오면 된다니까.”
“싫다고!”
쨍그랑.
유선이 집어 던진 찻잔이 제갈윤 발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하여간 성깔은…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요. 당신에게 좋은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제갈윤은 물러갔고, 유선은 술병을 들고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흥, 내가 지들 동료인 줄 아나?
소영영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추천한 지는 알 것 같았다.
강한월이 돌아오기 전에 증거를 만들어 놓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신이 혈승이었던 전생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증거.
하여간 오지랖은.
내가 그딴 것 원할 줄 알고?
사실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이 좁은 골방을 벗어나 바깥바람을 쐴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었다.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재수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바깥 구경하겠다고 냉큼 수락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소영영이 계속 자신을 챙기려 하는 것도 싫었다.
착해빠진 멍청한 것.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이제 인정할 때도 되었는데….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신룡대회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 그렇구나!
잘만 하면… 아니, 천운이 따라준다면… 탈출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잖아?
확률이 높진 않겠지만, 손해 볼 것도 없으니….
못 이기는 척 한번 따라가 봐?
* * *
한 달이 지나 신룡대회가 시작되는 날.
낙양 외곽에 마련된 대회장은 몰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후기지수들만 수백 명이었고, 그들을 응원하러 나온 문파의 선후배들과 행사를 관리하는 무림맹의 무사들까지 족히 천 명은 넘어 보였다.
“흥, 이건 뭐 시장통도 아니고. 게다가 차려입은 꼴들은 또 뭐야? 연애하러 온 거야?”
북적대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유선이 콧방귀를 뀌었다.
말은 거칠게 했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지 입가엔 살짝 미소가 걸렸다.
“좀 있으면 더 많이 몰려올 거예요. 번잡해지기 전에 얼른 접수하고 안으로 들어가죠.”
제갈윤이 위청보와 유선을 끌고 접수대 앞으로 갔다.
여기도 분비기는 마찬가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접수대에 앉은 총관부 무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접수하러 오셨소? 소속, 출신, 성명.”
“무림맹 문무대 소속입니다. 저는 제갈세가 제갈윤, 여기는 모산파 위청보, 그리고 천녀문 유선이라 합니다.”
“오, 제갈윤 소협이시군요. 허허, 진작 말씀을 하시지. 안 그래도 총군사님께서… 흠흠.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모산파의 소협도 계시고. 그런데… 천녀문? 그런 문파도 있습니까?”
총관부 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선을 빤히 쳐다봤다.
기분이 나빠진 유선이 발끈하려는 찰나, 제갈윤이 먼저 나섰다.
“청해성에 새로 생긴 문파입니다. 강호 활동이 거의 없어 아는 분이 많지는 않지요.”
“하긴 내가 모르는 문파도 많으니까. 그나저나 제갈 소협과 위 소협은 비무대회에 참가하실 테고, 유선 소저는 봉황대회겠죠?”
“봉황대회? 그게 뭔데… 요?”
유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머릿수만 채우면 된다고 했는데, 봉황대회는 또 뭔 말인지?
“모르셨소? 신룡대회 참가자 중 남성은 모두 비무대회에 나가야 하고, 여성은 비무대회나 봉황대회 중 선택할 수 있소. 봉황대회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가리는 행사인데, 비무대회 못지않게 대중의 관심이 뜨겁다오.”
흥, 정파의 썩어빠진 것들이 하는 짓이라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유선은 눈살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오해한 총관부 무사가 나름 용기를 북돋아 주겠다고 몇 마디 덧붙였다.
“걱정할 것 없소. 소저는 문제없이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거요. 내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앉아 여러 미녀들의 접수를 받았지만, 유선 소저만 한 미모는 찾기 힘들었소. 하하하.”
쳇,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
유선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봉황대회는 사양하겠어요. 저는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편이라서요.”
“어? 하지만 소저… 봉황대회에서 사대 미녀로 뽑히면 문무대와 천녀문의 명성도 순식간에 올라갈 텐데….”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된다고!
유선은 마치 득도한 고승이라도 되는 듯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명성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냥 비무대회에 참가할게요.”
“헐. 요즘 젊은이와는 다르게 속이 깊으시군. 좋소. 문무대 세 명 모두 비무대회 참가.”
이로써 접수 완료.
말소리가 안 들릴 만큼 접수대에서 멀어지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제갈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요? 근래 들어본 말들 중 가장 웃기는….”
“죽을래? 그나저나 의무적으로 비무에 참가해야 한다는 말은 왜 안 한 거야?”
“이야기했잖아요. 비무도 하고 친목도 다지고 그런 행사라고.”
“‘반드시’라고는 이야기 안 했잖아! 공력도 다 제거당한 나한테 뭘 어쩌라고? 싸우다 죽기라도 하라는 거야?”
“에이, 여기가 무슨 천마신교인 줄 아세요?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요. 적당히 시늉만 하다가 항복하고 내려오면 된다고요.”
그러니까 열 받는 것이다.
천마신교에서도 인정받던 최고의 무공 천재인 자신이 못난 꼴을 보여야 할 테니까.
차라리 봉황대회에 나간다고 할 걸 그랬나…?
한편, 제갈윤 일행이 떠난 접수대.
이십 대 초반의 아리따운 여인이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참가 신청하려고요.”
“어서 오시오. 어느 문파의 누구신지?”
“난화문의 정수옥이라고 합니다.”
난화문?
이번에도 처음 들어보는 문파였다.
날 잡아서 무림 문파 열람을 다시 공부해야겠다 마음먹는데, 정수옥이 추천장을 내밀었다.
“오, 남궁세가의 협력 문파였군. 몰라봬서 죄송하오. 그래, 정 소저는 어떤 대회에 참가하렵니까? 물론 봉황대회겠지요?”
“아니요. 전 비무대회에 참가할게요.”
“네? 어째서요? 이렇게 미모가 출중한데… 혹시 정 소저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까?”
아쉬움이 가득 담긴 질문이었다.
미모는 출중하지만 어딘지 머슴아 같은 느낌을 풍겼던 유선과 달리, 정수옥은 그야말로 여성미가 그윽한 미녀였기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호호, 그냥 제 아버님이 좀 고지식하셔서요. 미인대회 이런 거 절대 허락을 안 해주세요.”
“그래요? 뭐 할 수 없지요. 비무대회에서 좋은 성과 거두길 바랍니다.”
접수증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며 총관부 무사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이번 봉황대회는 영 흥행이 부진할 것 같다 느끼면서.
* * *
밖만큼은 아니지만 행사장 내부도 꽤나 붐볐다.
공식 개회식까지는 한 시진 정도 시간이 남았고,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니며 친분을 쌓기에 바빴다.
하지만 문무대는 예외여서,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꼼짝하지 않았다.
“유 소저. 자꾸 두리번거리지 좀 말아요. 사람들이랑 눈 마주치잖아요.”
“눈 좀 마주치면 어때서? 원래 사람 사귀라고 개최하는 행사라며?”
“유 소저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상관없겠지만, 난 만나기 싫은 놈들이 많다는 말이에요!”
제갈윤 얘가 원래 은둔형 외톨이였나?
문무대에선 그렇게 안 보이더만….
장난기가 돈 유선은 더 적극적으로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웬 사내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그 사내의 눈길은 자연스레 유선을 거쳐 제갈윤을 향했는데….
“여어~ 이게 누구야? 제갈세가의 똘똘이 제갈윤 아닌가!”
이런 제길… 하필 저 녀석이라니.
큰 소리로 아는 척을 하는 사내를 보며 제갈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려한 비단 무복을 걸친 잘생긴 사내는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남궁혁.
집안끼리 교류가 잦았던 탓에 과거에는 자주 어울렸었는데, 남궁세가가 혈승의 무리로 의심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가 바로 남궁혁이었다.
“하하, 이보게들. 이리로 와보라고. 우리 옛 친구하고 인사를 해야지.”
제갈윤 앞으로 몇몇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남궁혁에게 꼭 붙어 있는 모용세가의 모용미, 그 옆에는 하북팽가의 팽진도, 팽소희 남매, 그리고 사천당문의 당혁, 당하련 남매도 있었다.
제갈윤을 포함할 경우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제갈윤. 대회에 참가했으면 우리랑 같이 있어야지, 어째서 따로 노는 거지?”
“난 제갈세가 소속으로 참가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신경 끄라고.”
“뭐야? 듣자 하니 골동품 수집하는 부대에 들어갔다더니… 그 문 뭐시기라는 부대원으로 참가한 거야? 하긴, 넌 검보다는 골동품 먼지 터는 게 더 어울리기는 하지.”
이 자식이!
속은 부글거렸지만 꾹 참아야 했다.
남궁세가와 이런 사소한 일로 부딪혀선 좋을 게 없으니까. 게다가 유선이 함께 있으니 가급적 조용히 있어야만….
“제갈 오라버니. 그래도 숙소는 우리랑 같이 쓰시죠. 오랜만에 이야기도 나눌 겸.”
하북팽가의 팽소희가 진심을 담아 권유했다.
그래, 팽가 남매는 괜찮은 친구들이지. 하지만….
“미안. 난 부대 동료들이랑 같이 있을게.”
“어머 왜요? 혹시 이 여자 때문인가요? 제갈 오라버니 애인인가?”
괜찮은 친구는 팽가 남매뿐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모용미가 끼어들어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제갈윤은 못 들은 척 넘기려 했지만, 유선은 그렇지 않았다.
“헐, 내가 미쳤어? 제갈 이 녀석과 사귀게?”
“아님 말고요. 그나저나 예쁘게 생겼네. 이름이 뭐예요? 봉황대회에 출전하겠죠?”
“내 이름은 네가 알 바 없고. 봉황대회 따위에도 관심 없거든.”
계속되는 유선의 반말에 모용미의 눈매가 표독하게 변했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갈 것 같자 팽소희가 얼른 나서 모용미를 달랬다.
“호호, 봉황대회 우승은 보나 마나 모용미 언니의 것이죠. 언니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어디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고, 이번엔 당가의 당혁이 초를 치는 역할을 맡았다.
“꼭 그렇지도 않던걸. 아까 접수대를 지나다 보니 눈에 띄는 미인이 있었어. 난화문이라던가? 남궁세가 관련 문파라는 것 같던데….”
모용미의 눈길이 남궁혁을 향했다.
조금 전 유선을 노려볼 때보다 더 표독한 눈빛이었다.
“남궁세가에 그런 미녀가 있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누구죠 그녀는?”
“나… 나도 잘 모르는 여인이야. 어쨌든 그녀도 봉황대회에 참가 안 하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봉황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잘 모르는 여인이라고요? 뭐, 좋아요. 어쨌든 남궁세가와 관계된 거면 그녀도 우리 숙소에 머물라고 해요. 도대체 얼마나 예쁜지 함 보고 싶으니까요.”
“저, 그게… 안 그래도 그녀도 우리 숙소에 머물 계획이야.”
“뭐라고욧? 어떻게 사전에 상의도 없이…!”
쌤통이다.
모용미의 닦달에 얼굴이 벌게진 남궁혁을 보며 제갈윤은 웃음을 참았다.
지들끼리 싸우게 놔두고 슬며시 사라질 시점.
위청보와 유선에게 눈짓을 보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둥, 둥, 둥.
커다란 북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행사장의 단상에는 어느새 무림맹의 진행 요원들이 올라가 있었고, 사회를 맡은 총관부 간부가 내공을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후기지수 여러분은 자리에 정렬해주시오. 지금부터 무림맹 주최 신룡대회를 시작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