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신룡대회 (2)
* * *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급 인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맹주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내방한 귀빈 소개, 행사 취지 발표 등 지루하지만 빠질 수 없는 행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후기지수들을 치하하는 순서.
무림맹을 대표하여 단상으로 나선 것은 맹주가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석이었다.
“호오, 이거 대단한데. 맹주님과 구파일방의 노인들을 제치고 남궁혁 자네 부친께서 연설을 하시는구만.”
남궁세가가 후원하는 대회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나, 당혁은 입에 발린 감탄사로 남궁혁의 기분을 띄워줬다.
남궁혁의 뿌듯한 표정이야 그렇다 쳐도, 한참 그를 몰아붙이던 모용미마저 덩달아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조금 웃기는 상황.
연단에 선 남궁석의 연설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대략 천마신교를 비롯한 새외 세력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언제 있을지 모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힘을 키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남궁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선이 한 걸음씩 단상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유선 소저. 그렇게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제갈윤이 얼른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만류했지만, 유선은 마치 자석에 당겨지듯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왜요? 뭔가 느낌이 와서 그래요?”
“남궁세가가… 확실해?”
“거의… 확실하죠.”
“그래? 이상하군.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은 아닌데….”
혹시 누가 들을까 봐 중요한 단어는 빼고 속삭인 것이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유선이 보기엔 남궁석은 혈승이 아니라는 것.
“느낌이 오는 거예요? 지금은 예전이랑은… 몸 상태가 다르잖아요?”
“흥, 믿기 싫으면 믿지 말던가.”
아직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무척이나 중요한 정보.
남궁석 가주가 아니라면 누굴까?
제갈윤의 머릿속에서 재빨리 몇몇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남궁석이 연설을 마쳤고, 사회자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정보를 전달하겠습니다. 비무대회와 봉황대회의 진행 방식이니 잘 듣고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문무대 입장에선 별 관심 없는 내용이었지만, 다른 후기지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비무대회는 열흘 동안 열린다고 했는데, 준비된 세 가지 단계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비무대에 설 수 있다고 했다.
이후 예선전을 통해 서른두 명의 본선 진출자를 가리고, 마지막으로 본선 비무를 통해 우승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단계를 많이도 나눠났군. 어느 단계에서 떨어져야 눈치가 덜 보일까?”
“제갈 선배는 그래도 본선 진출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야 예선에서 탈락해도 문제없지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본선 삼십이강에서 탈락하는 걸로….”
제갈윤과 위청보가 세상 진지하게 나누던 대화에 유선이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본선? 꿈도 크네.”
“유선 소저. 절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래 봬도….”
“저기 쟤들 안 보여?”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승려 아니면 도사인지라 대놓고 기세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엄정하고 순후한 기운이 무럭무럭 풍겨 나오는 것이 잘 닦아 놓은 칼날처럼 예리해 보였다.
“무, 물론 저들 중 몇 명은 저보다 강할지도….”
“그럼 저쪽의 쟤들은?”
그쪽엔 무림맹 사신전대의 무사들이 투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제자가 될 행운은 없었지만, 실력에서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과 오기로 똘똘 뭉친 자들이었다.
“그야 사신전대 무사들은 실전 경험이 많으니까….”
“됐고. 어쨌건 본선은 꿈도 꾸지 말고 부상이나 안 당하는 걸 목표로 해라. 대충 둘러봐도 너보다 강해 보이는 애들이 서른은 넘으니까.”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게 명색이 절대경에 오른, 아니 올랐었던 고수니까.
지금은 내공을 모두 잃은 삼류 무사가 되었지만.
“그러는 유선 소저는 어쩌려고요? 자진 포기는 안 된다고 하니 일 단계 시험은 쳐야 할 텐데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셔.”
“걱정되니까 그러죠. 다칠까 봐.”
“쓸데없는 오지랖은.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
* * *
무림맹이 준비한 일 단계 관문은 암기를 피하는 시험이었다.
동체시력, 반사신경, 순발력과 민첩성을 겨루기에 매우 적절한 것이었고, 평가를 위해 투입된 시험관들은 당연히 사천당문의 고수들.
“헐, 일 단계부터 만만치 않은데요.”
잔뜩 긴장한 표정의 위청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문 시험관들의 손속이 몹시 매서웠기 때문이다.
시험을 치른 자들은 몸 여기저기에 암기를 맞아 피를 흘리며 퇴장했는데, 수준이 낮으면 낮은 데로 높으면 또 그에 맞추어 시험관들도 공격의 수준을 달리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당문도 큰 부상은 없게 하려고 바짝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보라고. 급소나 요혈을 다친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 기껏해야 살가죽 조금 상하는 정도라고.”
위청보를 안심시킨다고 한 말이었으나, 긴장하기는 제갈윤도 마찬가지.
게다가 자신이 바로 다음 순서였으니….
“문무대 제갈윤. 시험장으로 나오시오!”
위청보의 응원과 유선의 무심한 표정을 뒤로하고 제갈윤이 앞으로 나섰다.
에잇, 진짜…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백 쌍의 눈길들.
그 중엔 남궁혁을 비롯한 재수 없는 친구들의 비웃음도 있었고, 제갈세가의 직계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대 섞인 눈빛도 있었다.
망신만 당하지 말자. 망신만….
휘리릭~
당문 시험관이 던진 연미표가 날아왔다.
연미표는 의외의 곳으로 휘어들어 오는 암기. 초반에 방향을 예측해야만 한다.
암기의 꼬리 부분이 꺾여 있는 각도와 지금의 속도라면….
고개를 휙 꺾어 연미표를 피한 제갈윤이 보지도 않고 검을 뽑아 후방 하단을 향해 휘둘렀다.
타앙!
머리를 스칠 듯 지난 후 방향을 꺾어 종아리로 쏘아져 오던 연미표가 검에 막혀 튕겨 나갔다.
봤지?
관중들의 감탄이 터졌다.
하지만 으쓱한 기분도 잠깐, 제갈윤은 다음 암기에 대비해야 했다.
휘리리릭~
이번에 날아오는 연미표는 모두 세 개.
쥐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려 재빨리 궤도와 방향을 예측한 제갈윤이 반 장 높이로 뛰어오르며 검을 놀렸다.
타앙, 탕, 탕!
됐다!
공기저항과 양력, 회전력까지 정확히 계산한 덕분에 연미표를 모두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소리 없이 나타난 투골정 하나가 바닥으로 착지하는 제갈윤의 허벅지를 세 치쯤 찢으며 지나갔다.
치잇.
당문 시험관이 얍삽하게도 화려한 연미표의 움직임에 숨겨서 투골정을 쏘았던 것이다.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는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제갈윤은 박수를 받으며 시험장에서 내려왔다.
이 정도면 일 단계 통과는 문제없을 테고, 망신도 피했으니 목표 달성.
“우와, 제갈 선배! 멋졌어요!”
“흠 흠, 뭘 이 정도 가지고. 사실 마음만 먹었으면 투골정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 유선 소저가 보기엔 어땠어요? 이래도 제가 본선 진출이 어렵다고 할 거예요?”
“좀 이상한데…?”
“이상해요? 뭐가요?”
“투골정이란 게 귀한 암기인가?”
“에이 귀하긴 무슨. 아무 대장간이나 다 만드는 게 투골정인데요.”
“그렇지? 그런데 저 당문 애들은 무슨 보물이라도 다루는 듯하네.”
유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과연 당문 시험관이 세심한 손길로 투골정을 집어 작은 목갑 안에 조심스레 넣고 있었다.
“당문이잖아요. 암기에 목숨 거는 당문. 당연히 귀하게 여기겠죠.”
과연 그래서일까?
조금 전 휠씬 더 귀한 암기인 연미표는 가죽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던데…?
하지만 추가로 의문을 표현할 기회는 없었다.
위청보가 다음 순서로 호명되어 시험장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시험관의 눈에는 위청보가 이류 무사로 보였던 듯.
암기라 부르기도 뭐한 평범한 비수 두 자루가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부적 몇 장만 사용하면 당문의 장로급하고도 겨룰 수 있었지만, 여기서 부적을 꺼내 들 수는 없는 일.
손에 쥔 검으로 비수 두 자루는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그게 한계였다.
이어서 날아오는 다섯 자루 비수는 더 빠르고 강력해서, 결국 마지막 한 자루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오는 위청보.
하지만 유선은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시험장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역시나 이번에도….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유선 소저 차례예요.”
유선이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제갈윤과 위청보는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그녀도 이런 시험 따위 관심도 없었다.
원래는 일 단계에서 탈락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유선을 꼼꼼히 살펴보던 시험관이 비수 한 개를 던졌다.
참가한 후기지수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판단했다는 의미.
휙~ 탁.
유선이 날아온 비수를 너무도 쉽게 잡아챘다.
내공은 모두 상실했지만, 극한으로 육체를 수련했던 그녀에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이어서 날아온 두 개의 비수도 한 손으로 간단히 받아냈다.
그녀의 외모에 관심을 갖고 주시하던 관중들이 열화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시험관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고, 오판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이번엔 연미표 세 자루가 펄럭이며 날아갔다.
설마 이건 못 막겠지?
하지만 절대경의 속도를 경험했던 유선의 동체시력은 내공을 잃은 후에도 웬만큼 유지되었고, 날아드는 연미표의 무게중심과 이동축을 단숨에 파악했다.
타앙!
방향을 꺾으며 가슴을 파고드는 연미표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격하자, 튕겨 나가는 연미표가 마침 머리 위에서 회선하던 다른 연미표와 충돌했다.
환호성이 터질 만한 교묘한 솜씨.
그 사이 지면을 스치듯 날아오던 세 번째 연미표가 급상승하며 유선의 머리를 노렸다.
한 발 물러서면 피할 수 있었지만 유선은 낚아채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공이 없어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걸까?
약간 거리가 모자란 바람에 연미표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그만. 문무대 유선은 이만 내려가시고, 다음 참가자는… 잠깐, 지금 뭐 하는 게요?”
다음 순서를 호명하던 시험관이 깜짝 놀라 호통을 쳤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면 될 유선이 땅에 떨어진 연미표를 집어 들더니 거기 묻은 자신의 피를 닦아낸 것이다.
“피가 묻어 더러워졌기에 잘 닦아서 드리려는 건데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 아니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당황한 시험관이 옆에 있던 다른 시험관과 눈짓을 교환했다.
들리진 않았지만 표정으로 보 건데 전음을 써서 뭔가 상의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다시 암기를 던질 건가? 아니면….
“흠. 유선은 얼른 내려가고 다음 참가자 올라오시오. 그리고 다들 명심하시오. 이 암기는 우리 당문의 귀한 자산이니 참가자들은 함부로 손대면 안 되오! 절대로!”
* * *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일 단계 시험이 끝났다.
수백 명의 참가자 중 완벽히 암기를 막아낸 것은 소림의 기재 허료 등 단 이십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몸 어디엔가 작은 상처 한두 개씩을 입게 되었다.
비록 큰 부상을 입은 참가자는 없었지만.
문무대에 배정된 숙소에 당도한 일행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둘러앉았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하루였지만, 이상하게도 피곤한 하루였다.
“세상일 편한 게 없네. 회귀자 추적하는 일만 힘든 줄 알았더니 신룡대회 이것도 만만치 않아.”
“제갈 선배는 그래도 일 단계 통과를 했잖아요. 난 첫날부터 탈락이니….”
그랬다.
제갈윤은 내일 있을 이 단계 시험을 치르라는 통보를 받았고, 위청보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의외인 것은 내공이 전무한 유선이 당당히 통과한 것인데.
“그나저나 유선 소저는 어쩌려고요? 주목받아서 좋을 게 없어요. 내일 시험은 적당히 탈락하는 게….”
“아니, 난 좀 더 올라가 봐야겠어.”
“갑자기 왜요? 이런 거 관심 없다면서요.”
“관심이 생겼어. 냄새가 심하게 나거든. 아주 비린… 피 냄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