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71화 (71/210)

071화. 신룡대회 (3)

* * *

“피 냄새? 난 모르겠는데요? 숙소 청소를 제대로 안 했나?”

“능청 떨지 말고. 제갈 너도 무슨 뜻인지 알고 있잖아.”

“혈승이 개입한 것 같다는 거겠죠. 하지만 남궁세가 가주는 혈승이 아니라면서요?”

“그랬지. 혈교의 인물로 보이는 자는 없었어. 하지만….”

제갈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선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와 혈승에 대해 논의한다는 사실이 영 불편했다.

소영영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기회를 준 것일 뿐, 그녀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대장이 있으면 알아서 판단해주겠지만, 이곳엔 자신과 위청보뿐.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대회를 마쳤으면 하는 바람인데….

“하지만 뭐요? 어떤 점이 마음에 걸리는 건데요?”

제갈윤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이어갔다.

바람은 바람일 뿐, 만약 신룡대회에 혈승의 음모가 숨어 있다면 억지로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일.

“오늘 시험을 통해 참가자 중 구 할이 암기에 맞고 피를 흘렸다. 가벼운 상처였기에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사실 좀 이상하긴 했어요. 굳이 상처를 입히지 않아도 수준을 판별할 다른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렇지. 분명 의도한 바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게 뭘까?”

“혹시… 피 묻은 암기를 조심스레 회수해간 것과 연관이 있나요?”

“아마도. 단지 몇 방울의 피일 뿐이지만 그걸 통해 혈액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거든.”

“혈액에도 종류가 있어요?”

“혈교에서는 혈액을 여덟 종류로 구분한다. 누가 어떤 종류의 피를 가지고 있는지 알면 비술을 시전할 때 많은 도움이 되지. 예를 들어 혈복(血僕)을 만든다거나….”

혈복이라면 제갈윤과 위청보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항주에서 돼지 혈승과 싸울 때 진가린이 당할 뻔했던 바로 그 비술.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혈교의 꼭두각시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요.”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어. 혈액 종류를 안다고 바로 비술을 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후로도 여러 단계가 필요해. 아마도 이번 비무대회는 그런 목적으로 설계된 걸 거야.”

“그래서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 보겠다는 거군요?”

“맞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면 우리가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유선의 말이 맞았다.

이미 탈락한 위청보는 어쩔 수 없지만, 제갈윤과 유선은 다음 단계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계속 도전하며 체험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성품이 단순한 위청보가 단도직입적으로 그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요… 유선 소저는 왜 우리를 돕는 거죠? 혈교의 편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유선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으니까.

한참을 망설이다 나온 그녀의 답변은….

“비술 따위로 사람을 조정하는 거 나는 싫다. 원하는 게 있으면 주먹으로 해결해야지.”

* * *

둘째 날, 이 단계 관문이 열렸다.

병장기를 다루는 시험이었고, 시험관으로는 모용세가의 검객들이 투입됐다.

암기를 피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관문이었기에 참가자들의 열기도 뜨거웠다.

“오늘은 어떤 숨겨진 음모가 있을까요?”

먼저 시험대에 오른 참가자를 지켜보며 제갈윤이 물었다.

“어제 확보한 혈액을 바탕으로 보다 정밀한 분석을 하려 하겠지. 그러려면 일 단계보다 더 많은 피가 필요할 거야.”

유선의 예측은 제법 그럴싸했다.

더 많은 피를 확보하려면 검에 베인 상처만 한 것이 없을 테지.

과연 모용세가의 시험관들이 그처럼 독하게 검을 휘두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첫 번째 참가자의 심사가 시작됐다.

무림맹 백호대에 소속된 무사였는데, 자기 키만 한 언월도를 능숙하게 휘두르는 모습이 제법 용맹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일류의 솜씨였고, 모용세가의 시험관은 능숙한 절정의 검객.

서너 초를 교환하는 사이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이후로는 시험관의 검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관중들이 힘찬 응원을 보냈지만….

샤악.

날카로운 검에 언월도의 손잡이가 잘렸고.

타앙.

이어지는 검이 언월도의 옆면을 때리자 결국 도를 놓치고 말았다.

거기서 끝나야 했는데, 시험관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아끼는 후배에게 가르침을 베풀기라도 하듯 빠르고 화려한 검식이 이어졌고….

샤아악.

빛살처럼 뻗은 마지막 검이 백호대 무사의 어깨를 스쳤다.

피부를 베인 것에 불과했지만, 무복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피가 흘렀다.

“자네의 언월도는 강맹하지만 쾌검을 상대하는 데 약점이 있는 것 같아 내 한 수 선보였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먼.”

“감사합니다.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백호대 무사가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사이,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달려 나와 상처의 피를 닦아내고 금창약을 발라줬다.

참가자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진행 요원들의 훌륭한 대처.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다른 의미로 비췄다.

“봤지?”

“한 명 가지고 섣불리 판단할 순 없지만… 정말 그래 보이네요.”

“어제 일 차로 걸러냈을 테니 모든 참가자에게 상처를 입히진 않을 테고… 일 차 평가에서 피를 확보하지 못한 참가자들, 그리고 추가로 분석이 필요하다 선택된 자들은 분명 검에 베일 거다. 지켜보자고.”

유선의 예측은 한치의 빗나감이 없었다.

이후로 시험이 이어졌는데, 세 명에 한 명꼴로 시험관의 검에 당한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때마다 의원이 달려 나와 피를 닦아줬고.

대부분 자연스레 발생한 부상처럼 보였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다음 참가자. 문무대 제갈윤 앞으로 나오시오!”

유선, 위청보와 눈빛을 교환한 후 제갈윤이 시험대에 올라섰다.

과연 자신도 피를 볼 대상자일까?

설마… 모용세가의 무사가 제갈세가의 이공자인 자신을 검으로 찌를 수 있을까?

뭐, 일단 시험은 제대로 치러야겠지.

남궁혁 같은 놈들에게 망신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자신에게 집중된 수많은 눈길을 의식하며 제갈윤이 검을 뽑았다.

채앵~

제갈윤과 시험관의 검이 맞부딪혔다.

파르르 떨리는 검.

역시 시험관의 공력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문무대에 들어간 후 실력이 일취월장했으니, 상대가 절정의 고수라 한들 쉽게 져줄 생각은 없었다.

채앵, 샤악, 챙~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오십 초가 넘는 공방이 이어졌다.

시험관이 적당히 실력을 맞춰주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건 관중들의 생각일 뿐.

승기를 잡을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쳤는데, 제갈윤이 보기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벼운 부상이지만 피는 많이 흘릴, 그런 기회가 아니었기에 머뭇거린 것.

이 정도 했으면 됐겠지?

제갈윤은 일부러 왼쪽 허벅지에 허점을 노출시켰다.

역시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찔러 들어오는 검.

샤아악.

반 치도 안 되는 얕은 깊이, 하지만 피가 주르륵 흐르도록 길게 찢긴 상처.

“그만! 평가는 끝났소. 참가자는 얼른 상처를 치료하시오.”

득달같이 달려 나와 피를 닦아주는 의원을 보며 제갈윤은 쓴웃음을 삼켰다.

수건을 흠뻑 적신 자신의 피가 몰래 분석될 거라 생각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제갈세가 이공자의 몸에 거침없이 상처를 낼 정도로 적들은 적극적이라는 것.

도대체 무슨 음모일까?

“다음 순서는 문무대 유선!”

* * *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에게 배정된 숙소의 으슥한 공간.

훤칠하고 아리따운 남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얼핏 밀회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것 치고는 사내의 표정이 몹시 냉랭했다.

“정 소저. 가급적 모든 편의를 봐 드리라는 부친의 명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소. 오대세가 자제들을 상대로 일을 벌이려면 최소한 사전에 나에게….”

“호호, 남궁 공자께서 왜 이리 화가 났을까? 소녀가 무슨 일을 벌였다고 그러세요?”

“시치미 떼지 마시오! 당신이 몰래 피를 채취하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소? 어젯밤 옷 시침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모용미를 침으로 찔렀지 않소?”

“그래서 마음이 아팠어요? 애틋하네요. 그 정도로 모용 소저를 사랑하는지는 몰랐네.”

“이보시오, 정 소저!”

“이봐요, 남궁 공자. 봉황대회에 출전하는 여인들도 혈액을 채취해야 하고, 내가 그 책임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단단히 항의하려고 불러낸 것이지만, 정수옥이 정색을 하자 남궁혁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뒷배경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 여인을 거스르지 말라고 명할 때의 부친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굳이 모용미까지 그럴 필요가 있겠소? 모용세가와 우리는 남도 아닌데….”

“모용세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어요. 남궁세가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는 예외 없이 피를 채취해야 해요. 이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모용미와 결혼이라도 하던가. 남궁세가의 며느리가 된다면 예외를 인정해줄 테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도대체 고작 피 몇 방울로 무얼 할 수 있다고 이토록….”

“쉿! 그 핏방울의 주인이 오고 있네요.”

누가 오고 있다고?

나는 아무 낌새를 채지 못했는데.

설마 정수옥 이 여자가 나보다 고수라는 말인가?

남궁혁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정말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외진 곳에서 은밀히 대화 중인 남녀.

당연히 모용미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 오해하지 말라고. 우린 단지….”

“단지 뭐요?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하고 있던 거예요?”

모용미의 목소리는 그 눈매만큼이나 싸늘했다.

남궁혁이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으려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정수옥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호호호, 이거 하필이면 모용미 소저에게 들켜버렸네요. 나름 비밀스런 만남이었는데.”

“하필이면 나에게? 도대체 무슨 비밀이죠?”

이제는 싸늘한 수준을 넘어 얼음 같은 냉기를 내뿜는 모용미.

빨리 풀어주지 않으면 칼부림 나겠는데?

정수옥은 속으로 웃으며 모용미를 달랬다.

“하, 이거 비밀인데… 어쩔 수 없네요. 실은 남궁 공자께서 상담을 요청하셨어요.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여인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선물? 정 소저에게 줄 선물인가요?”

“설마 저에게 줄 선물을 저와 상의하겠어요? 당연히 모용미 소저를 위한 거죠. 이번 봉황대회에서 소저가 우승을 할 텐데…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고.”

급조해낸 몇 마디 말이었지만, 얼어붙었던 모용미의 얼굴에 화사한 봄바람이 불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머, 정말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서, 어떤 선물을 주려고요?”

“어? 아… 그건 비밀이야.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까. 나중에 깜짝 놀랄 준비나 하라고. 하하하.”

남궁혁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정수옥을 슬쩍 흘겼다.

여우 같은 계집.

적당히 둘러대 준 것은 고마웠지만, 왠지 그녀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 같아 언짢기도 했다.

“그나저나 두 분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요? 이 단계 심사에 참여해야 하잖아요?”

“아, 그렇지. 이런 자칫하면 늦겠네. 빨리 가자고.”

* * *

유선은 짧은 비수 한 자루를 들고 시험관에 맞서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주력 무공은 권법이었지만, 내공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맨손으로 모용세가의 검을 상대하긴 껄끄러웠던 것.

쐐애액~

기이한 각도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비수를 짧게 휘둘러 연계식까지 막아냈다.

헉헉.

불과 삼십여 초를 겨뤘을 뿐인데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숨이 가빠 왔다.

제길… 내공이 백 분의 일만 남아 있어도….

하지만 검을 맞댄 심사관도 심장이 두근대긴 마찬가지.

그녀처럼 체력이 달려서는 아니었고, 자신의 모든 현란한 검초를 척척 막아내는 상대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우리 모용세가 검법의 파훼식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심사관의 눈빛이 점점 독하게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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