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신룡대회 (4)
* * *
워낙 능숙하게 막아내고 있어 의심을 살 만했지만, 사실 모용세가 검법의 파훼식 따위 유선은 관심도 없었다.
타고난 무공 천재인 데다, 전생과 현생에서 두 차례나 절대경을 돌파했던 경험이 있으니 웬만한 무공 초식은 훤히 꿰뚫어 보는 안목이 생겼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
이제 그만 끝내야 할 시점인 것이다.
각종 현란한 초식을 쏟아부어도 통하지를 않자 시험관은 갈등에 빠졌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면 모용세가의 망신.
이 단계 시험에서는 금지된 내공을 써서라도 저 건방진 여자에게 한칼 먹여줘야 하는데….
남몰래 검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강력한 한 수를 준비하던 바로 그 순간.
지금껏 보이지 않던 큰 허점이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시험관은 지체 없이 쾌검을 찔렀다.
쐐애액!
내공까지 듬뿍 담겨있던 터라, 시험관의 검은 벼락같은 속도로 유선의 허리를 갈랐다.
관중들의 다급한 탄성이 터졌고, 검에 스친 허리에선 핏물이 튀었다.
이런 제길….
하지만 정작 당혹한 표정을 짓는 것은 시험관 본인이었다.
알싸한 통증과 함께 옷 위로 번지는 붉은 피.
검에 베이기 직전 유선이 던진 비수가 그의 팔뚝을 살짝 스치고 날아간 것이다.
후다닥 달려 나온 의원이 유선의 허리에서 피를 닦아냈다.
명주 수건을 흥건히 적신 피.
의원은 이어서 금창약을 바르고 허리에 붕대를 감아줬는데….
유선이 갑자기 의원의 손에서 피에 젖은 수건을 빼앗아 들더니, 곁에 서 있던 시험관의 팔뚝을 잡고 그의 피를 닦았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요?”
의원과 시험관이 깜짝 놀라 제지했지만, 수건에 묻은 피는 이미 유선의 것인지 시험관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험관님도 부상을 입으셨는데 저만 치료를 받아서야 되나요? 어서 지혈을 하고 약을 바르셔야….”
유선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답변하고 시험대에서 내려갔다.
잡아먹을 듯 인상을 쓰는 시험관을 뒤로 한 채.
* * *
이 단계 시험도 끝났다.
일 단계에서 절반 이상 걸러졌고 이 단계에서도 많은 탈락자들이 나와 이제 남은 인원은 예순네 명.
삼 단계에서 다시 절반이 탈락하게 될 것이고, 남은 서른두 명이 비무대회의 본선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제갈윤은 삼 단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법 훌륭한 검술을 선보인 데다가 제갈세가라는 배경도 작용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고, 당연한 것인지 아니면 의외인지 평가가 애매한 것은 유선 또한 합격했다는 것.
“유선 소저. 축하할 일이기는 한데… 너무 주목을 끈 거 아닐까요?”
제갈윤은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빼어난 미모 때문에 관심을 표하는 관중들이 많은데, 시험관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의 무공을 선보이자 관심이 더 많아진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음모를 파헤치려면 중간에 탈락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시험관에게 상처를 입힐 것까지야….”
“됐고. 삼 단계 시험 대비나 잘하도록 해. 여기서 탈락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뭐, 그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예순네 명의 합격자 중 실력이 모자란 자들이 대거 섞여 있는 터라. 서른두 명 안에 드는 건 문제없을 거예요. 저보다는… 유선 소저가 걱정이네요. 삼 단계를 통과할 수 있을지….”
유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그게 문제인 것이다.
삼 단계는 내공을 겨루는 시험이라는 것이.
* * *
달도 뜨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오대세가의 숙소를 몰래 벗어난 정수옥이 인적 없는 야산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참을 올라가 다 쓰러져가는 사당 앞에 도착한 그녀.
휘리릭~
입술을 모아 새 울음소리를 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충!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정수옥, 아니 흑사련의 대공녀인 정옥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어떻지?”
“삼 단계 시험을 치를 참가자 중 여섯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분석을 끝냈습니다. 결과가 애매한 자들에 대해 내일 세 번째 분석까지 마치면 최종 후보 열둘을 선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석하지 못한 여섯은 누구누구인데?”
“당연히 대공녀님은 대상이 아니시고, 남궁세가와의 약조 상 남궁혁도 제외했습니다. 그 외에 소림의 허료, 무당의 관오상, 화산의 악소천은 무공이 높아 시험관들이 상처를 입힐 수 없었습니다.”
“흥, 무공이 높기는. 시험관들의 실력이 형편없던 것이지. 어쨌든… 나머지 한 명은?”
“그게… 유선이라는 여인입니다.”
“유선? 솜씨가 제법 좋은가 보지?”
남궁혁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험장에 늦게 도착했던 정옥수는 유선이 시험을 치르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일 단계 이 단계 모두 부상을 당하긴 했는데… 의원들이 검체 확보에 실패한 바람에….”
“흥, 가지가지 하는군. 뭐 좋아, 내일 제대로 피를 뽑으면 될 테니.”
“넵. 유선의 피는 내일 반드시 확보하겠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이 걱정입니다. 후기지수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고수들이라… 과연 삼 단계 심사관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내일 심사를 맡은 건 남궁세가니까 믿어볼 수밖에. 애당초 우리 흑사련과 남궁세가의 협력 조건이 구파일방의 제자 중 여섯은 확보한다는 것이고, 구파일방에서도 소림, 무당, 화산 중 한둘은 꼭 손에 넣어야 하니까.”
“그러니까요. 차라리 저희 쪽에서 심사관을 맡았으면….”
“됐어. 그들 역할을 뺏을 수는 없다. 혹 내일도 피를 확보하지 못하는 자가 생기면 본선에선 나하고 붙을 수 있도록 대진표를 짜면 된다. 내가 제대로 피를 보게 해줄 테니.”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대공녀님이십니다.”
“아부는 집어치우고. 돌아가서 비술 대법 준비나 제대로 하도록.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충!”
* * *
삼 단계 시험이 시작됐다.
내공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시험관으로 나선 것은 남궁세가의 창궁비검대 대주인 남궁환.
현 가주 남궁석의 사촌 동생으로서 천하제일 세가의 당당한 장로급 인사이니, 이전의 시험관들과는 급이 다른 거물인 것이다.
그런 거물이 나선 것에 비해 시험의 방식은 간단했다.
참가자는 시험관과 두 손을 마주 대고 내공을 겨루면 그만.
대부분 빠른 시간 안에 결론이 났는데, 간혹 제법 시간을 끄는 자도 있기는 했다.
지금 시험대에 올라있는 화산파의 악소천이 바로 그런 경우.
사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고, 향후 여중 제일 고수가 될 거라는 평가를 받는 그녀는 벌써 일각째 내공을 겨루고 있었다.
과연 화산파의 기재는 대단하구나.
남궁환은 내심 감탄하며 내공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사실 평가는 진작에 끝났지만, 악소천이 피를 토하게 만들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시간을 끌던 참이었다.
심각한 내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피를 토하게 만들려니, 초절정 고수인 그의 입장에서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쿨럭.
결국 악소천이 피를 토했다.
새빨간 피를 뿜어 앞섶을 적시자,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달려 나와 피를 닦아주고 내상을 치료하는 요상단 한 알을 건넸다.
이로써 혈액 채취를 못 한 참가자는 단 세 명.
소림의 허료, 무당의 관오상, 그리고 유선.
“괜찮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시험은 답이 없는데….”
제갈윤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유선에게 물었다.
그녀가 이전의 시험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건 내공이 필요 없는 분야였기에 가능했던 것.
하지만 이번 시험은 제목부터가 내공 평가이니.
“답이 없으니 어떡하라고?”
“혹시 탈락하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요. 유선 소저는 충분히 최선을 다했고, 내공 겨루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흥.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사실 그녀는 머리가 복잡했다.
솔직히 자신이 무얼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인데, 어느새 문무대와 한배를 타고 있는 모양새라니.
‘아, 몰라. 일단 끝까지 가본다.’
하지만 어떻게?
내공은 모두 소멸되었고, 남은 건 오기밖에 없는데.
“다음 참가자 유선. 앞으로 나오시오!”
시험대로 올라간 유선은 남궁환 시험관과 손바닥을 마주 댔다.
장심을 타고 조심스레 밀려오는 내공.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는 그녀는 묵묵히 내공을 받아들였다.
남궁환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상대의 대응이 강력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이건… 대체 뭐지?
눈앞의 이 여인은 마치 내공이 전혀 없는 것처럼 아무런 반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상대의 기맥을 물밀 듯 헤집고 침투했는데….
놀랍게도 여인의 기맥은 넓고 튼튼한 것이 마치 초절정 고수의, 아니 이건 초절정인 자신의 기맥보다 훨씬 더 단련된 것이 아닌가!
젊은 여인이 이럴 수는 없는데?
게다가 어째서 내공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놀람과 의혹으로 가득한 남궁환의 표정을 유선은 담담한 시선으로 마주 봤다.
그래, 내 사연을 알지 못하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녀도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절대의 수준까지 단련했던 튼튼한 기맥 덕분에 버티고는 있지만, 이곳저곳을 파고드는 남궁환의 공력 때문에 전신의 기혈이 터질 듯이 아팠다.
오장육부에도 무리가 오기 시작했고….
맞아, 기형적으로 튼튼한 기맥을 타고난 여자가 분명해!
자기 편한 대로 결론을 내버린 남궁환이 본격적으로 내공 공격을 시작했다.
목표는 피를 토하게 만드는 것.
화산의 자랑 악소천도 너끈히 요리했으니, 이런 근본 없는 여인네 따위야….
남궁환의 내공이 유선의 위와 폐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충격을 가해 내부 출혈을 만들고, 기혈을 역류시키면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것.
으으윽.
끔찍한 고통과 함께 내부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지만, 유선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절대경을 넘었던 그녀지만, 내공 없이 남궁환의 공격에 버틸 방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진 않는다.
목구멍을 넘어오는 핏덩이를 다시 꿀꺽 삼키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공은 잃었어도, 오기는 남았으니까.
이년이 정말…!
남궁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장에 맺힌 울혈을 한바탕 뱉어내면 속이 편해질 텐데 왜 이리 고집을 피우는 건지?
그러고 보니 이번 신룡대회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뭐 하려고 몇몇 참가자를 꼭 찍어서 반드시 피를 토하게 만들라고 하는지.
언젠가부터 세가 내에서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기분이 상한 남궁환이 장력을 갈기듯 내공을 확 끌어올렸다.
크윽.
폭포가 역류하듯 피가 치솟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유선은 혀를 말아 목구멍을 닫고 버텼다.
이대로 피를 토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격심한 통증에 정신이 가물가물했고, 갑자기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
강한월… 너 이 새끼….
쿠웅.
아랫입술을 질끈 문 채로 유선이 기절했다.
“의원! 어서 치료를…!”
달려온 의원이 유선의 닫힌 입술을 벌리려 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낑낑대던 의원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 *
기절한 유선을 업고 숙소로 달려간 탓에 제갈윤과 위청보가 지켜보진 못했지만, 남은 참가자들의 내공 시험도 모두 마무리되었다.
소림의 허료와 무당의 관오상도 전력을 다한 남궁환의 내공에 버티지 못하고 코피를 흘렸다.
정옥수의 우려와는 달리,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고수 남궁환이 제 몫을 다한 것이다.
비록 그 여파로 남궁환 본인도 약간의 내상을 입었지만.
그렇게 비무대회의 삼 단계 심사가 끝났다.
이후 발표된 서른두 명의 본선 진출자 명단엔 제갈윤과 함께 유선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기로 버틴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