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신룡대회 (5)
* * *
숙소로 옮겨 요상단을 먹였음에도 유선은 몇 시진째 깨어나지 못했다.
강한월이라면 내력을 불어넣어 치료했겠지만, 제갈윤이나 위청보의 실력으로는 무리.
“어쩌죠? 내상이 심한가 본데. 이러다 영영 못 일어나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아. 남궁환이 공식 참가자를 그리 심하게 다뤘을 리 없어. 피 토하는 걸 억지로 참느라고 기혈이 막힌 거야.”
제갈윤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막힌 기혈이 덜 풀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맞지만, 사실 남궁환의 마지막 공격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
다만 유선이 내공이 없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는데, 내공끼리 반발하고 격돌했으면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유선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명색이 본인도 혈승인데, 음모를 밝히겠다고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청보야.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전향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야.”
“하지만, 대장은 회귀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건 다른 문제지. 대장은 회귀자의 존재 자체가 용납될 수 없다고 한 거다. 그건 순리에 대한 문제. 사람이 과거를 후회하고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와는 결이 다른 문제야.”
“그럼 선배는 유선 소저가 정말 우리 편이 되었다고 믿는 거예요?”
“무슨 소리? 나 역시 아직 믿지 않는다. 하지만… 신룡대회 기간만큼은 그녀와 한편이 될 수밖에 없잖아. 기왕 같은 편에 섰으면 의심보단 신뢰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할 뿐이다.”
“헤헤, 제갈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저도 유선이 싫지는 않더라고요.”
그래. 성격이 드세고 말이 험하긴 하지만 밉상인 여자는 아니지.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랄까.
“청보야. 그보다 앞으로가 걱정인데. 비무대회 예선이 끝났으니 이제 적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야.”
“그렇겠죠. 상당히 위험할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너 부적 좀 챙겨왔지?”
“당연하죠. 이것저것 다양하게 가져왔어요.”
“이름이 증공부(增功符)였나? 그것도 있어?”
“증공부요? 그건 안돼요! 우리 모산파에도 몇 장 안 남은 거란 말이에요!”
“청보 너! 부적이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냐?”
“그, 그건 아니지만….”
* * *
어두운 밤, 낡은 사당.
정옥수는 흑의 복면인이 건네준 문서를 꼼꼼히 읽었다.
“이로써 후보 선정은 모두 완료된 거네?”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적합한 재료를 다수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혈복으로 만들 열두 명을 모두 선정했고, 혈면귀로 만들기 적합한 재료도 무려 아홉 명이나 발견했습니다.”
“좋아. 그리고… 봉황대회 출전자 중 적합자들은 혈서시로 만들겠다고?”
“네. 모용미를 포함한 세 명이 적합 판정을 받았습니다. 향후 거대 문파의 안주인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혈서시로 만들어 혈락환희대법을 전수할 생각입니다.”
모용미라…?
정옥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남궁세가가 신룡대회를 개최해 비술에 적합한 재료를 찾아주되, 오대세가의 가족들만큼은 건드리지 않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궁혁에게 붙어 아양이나 떠는 재수 없는 년을 그냥 놔두기는 싫은데….
‘약속은 혈복이나 혈면귀 비술을 걸지 않겠다는 거였지, 혈서시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약속을 재해석한 정옥수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렇고, 유선 얘는 뭐야? 아직도 판정 불가라니?”
“멍청한 남궁세가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지요. 배경이 없는 아이라 중요성은 떨어집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본선에서 대공녀와 비무를 하도록 대진표를….”
“필요 없어. 그 아이 하나 때문에 일정을 늦출 필요는 없지. 비술 대법은 본선 이전에 바로 시행토록 한다.”
“충! 차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 * *
이틀간 의식이 없던 유선은 본선 진출자 축하 행사 전날 눈을 떴다.
“드디어 일어났네요! 부상이 심한 건 아닌지 걱정을….”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은 차갑게 했지만 사실은 고마웠다.
제갈윤과 위청보의 퀭한 눈을 보니 그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대번에 느껴졌다.
“비무대회는 어찌 되었어?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난 건 아니겠지?”
“저랑 유선 소저는 본선에 올랐어요. 다행히 늦진 않은 게, 내일이 본선 첫 모임이거든요.”
“내일이라… 준비할 시간도 없군. 내가 누워있는 동안 계획은 세웠겠지?”
“제가 무슨 계획을 세워요? 지금까지 유선 소저가 주도했잖아요?”
“장난하지 말고. 제갈 성씨를 달고 있는 네가 계획이 없을 리 없잖아.”
유선은 제갈윤을 노려보며 매섭게 다그쳤다.
그럴듯한 계획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고작 혈액을 검사하는 것이라 별 위험이 없었으나 앞으로는 다를 테니까.
“정말로 계획 같은 거 없다고요. 상대가 어찌 나올지 알아야 계획을 세우죠. 단지….”
“단지 뭐?”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거죠.
“역시… 계획이 있구나?”
“계획 없다니까요!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자는 거예요. 무공이 별 볼 일 없는 우리 셋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나마 최선의 방안은….”
제갈윤은 며칠간 생각했던 바를 설명했다.
그의 입장에선 단순한 상황 정리와 현실에 맞춘 당연한 행동 방향이었지만, 유선의 귀에는 나름 근사한 계획으로 들렸다.
“좋은 계획이네. 역시 제갈이야.”
“네? 이건 계획이 아니라고요! 성공을 확신할 수 있어야 비로소 계획이라….”
“당장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닥이 잡혔으면 됐지 뭐. 그건 그렇고… 이건 뭐야?”
유선이 자신의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등판에 무언가 붙어 있는 불편한 느낌.
“아… 그거요. 그게 우리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그걸 붙이려면 어쩔 수 없이 옷을….”
제갈윤과 위청보가 얼굴이 빨개지며 횡설수설했다.
불가피한 일이긴 했지만, 유선의 상의를 벗겼던 일이 떠올라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부적이에요. 모산파에서도 보물로 치는 증공부라는 부적인데, 몸에 붙이고 최소 이틀은 지나야 효과가 발휘되는 거라….”
“증공부?”
“한시적이긴 하지만 공력을 두 배 이상으로 증폭시켜주는 부적이에요. 효과를 발휘하는 동안은 내공의 소모도 막아주고요.”
“헐, 대단한 부적이네. 근데 이 귀한 걸 왜 나한테 붙인 거야? 남아 있는 내공이 전혀 없어서 증폭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설마 우리가 아무 대책 없이 아까운 부적을 낭비했겠어요? 여기 이거….”
제갈윤은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주저하는 표정으로 보아 매우 귀한 물건으로 보였는데.
“이건 또 뭔데?”
“공명단(孔明丹)이에요.”
제갈윤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유선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명단이라면 그녀도 익히 들어본 적 있는 영약.
제갈공명으로부터 전해진 처방을 써 제조한 것으로, 제갈세가의 직계들에게 단 한 알씩만 주어진다는 귀하디귀한 보물이었다.
“이걸 먹고 사라진 내공을 보충하라는 말이냐?”
“맞아요. 그래 봐야 고작 칠팔 년 치 내공이 생기는 거지만… 부적의 증폭 효능이 더해지면 십 년 아니 잘하면 이십 년, 즉 일류 고수급의 내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귀한 영약과 부적을 소모하면서 나한테 공력을 주겠다고?
미친 건가? 나를 어떻게 믿고?
“너희…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공명단을 손에 쥔 유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알아요. 예전의 공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절대경을 돌파했던 당신은 십 년 공력만 있어도 다른 모습이 되겠죠.”
“맞아. 그런데도 이걸 나에게 준다고? 내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도망이라…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럼 저도 뭐 하나 물어볼게요. 내력이 없는 지금 상태에선 저하고 청보를 제압할 수 없나요?”
뜻밖의 질문이었고, 유선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윤은 그녀의 대답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일 단계부터 삼 단계까지 시험을 거치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여자 보통이 아니구나. 진법이나 부적을 써서 대항하면 모를까, 맨몸으로 부딪치면 나하고 청보는 당해낼 수 없겠구나. 그리고….”
“그리고 또 뭐?”
“과연 대장이 이걸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겠죠. 그럼에도 지하실에 감금하지 않고 저에게 맡긴 걸 보면, 최소한 스스로 선택할 기회는 줘도 괜찮다고 판단했던 거겠죠.”
스스로 선택할 기회.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한 권리겠지만 유선에겐 그렇지 않았다.
혈승의 길을 걸었던 전생에서도, 그리고 천마신교에서 자라난 현생에서도.
우습게도 적에게 붙잡혀 공력마저 상실한 지금,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흥, 건방지게 누가 누구에게 기회를 주고 말고 한다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 * *
본선 진출자 축하 행사는 남궁세가가 준비한 거대한 장원에서 열렸다.
서른여섯 명의 본선 합격자와 봉황대회 후보들만 참석할 수 있는 행사.
그러니 위청보는 함께할 수 없었고, 제갈윤과 유선만이 행사장 한편에 뻘쭘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것 참… 적응하기 힘들군.”
수준 높은 음악이 흐르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유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행사를 맡은 남궁세가의 재력을 과시하려는 듯 모든 것은 최고급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참석한 후기지수들도 그에 걸맞은 화려한 의상으로 한껏 자신을 뽐냈다.
유선에게도 근사한 옷 한 벌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갈윤이 후회하고 있을 때,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주하기 싫은 인물들이 다가왔다.
“하하하, 이거 놀랄 일이군. 제갈윤 자네가 본선에 오르다니?”
“놀랐나? 하긴 남궁혁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놀랐을 수도 있겠군.”
“흥, 말빨은 여전하네. 뭐 좋아. 너야 명색이 제갈세가의 직계니 그렇다 치고. 그 옆의 아가씨는 도대체 어떻게 본선에 오른 거냐? 내공도 연마하지 못한 삼류 무인인 것 같던데. 제갈세가에서 뒤라도 봐주는 건가?”
“말을 삼가라, 남궁혁! 예선 심사는 너희 남궁세가에서 주관했잖아. 지금 너희 심사관들이 청탁이라도 받았다고 자인하는 거냐?”
“뭐라고? 이게 어디서 함부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언성을 높이던 제갈윤과 남궁혁이 입을 다물게 된 건, 누군가 읊조린 낮은 불호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세가의 후계자분들이 여기 계셨군요. 저희도 좀 끼어도 되겠습니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소림의 허료를 필두로 무당의 관오상, 화산의 악소천이 다가왔다.
명실상부한 정파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이며 구파일방의 자랑이자, 남궁혁에게 있어서는 신룡대회 우승의 최대 걸림돌들.
“하하하, 어서 오시지요. 소림, 무당, 화산의 기재들을 한 자리에서 뵐 수 있으니 정말 좋습니다. 이런 만남이 바로 이번 행사의 주목적인 것이지요.”
“남궁 공자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분 소저께서는…?”
남궁혁의 뻔한 인사말에 적당히 응대한 허료의 눈길이 유선에게 향했다.
마치 이곳으로 다가온 목적이 그녀인 것처럼.
“아, 이분은 저와 같은 부대에 속해 있는 유선 소저입니다.”
제갈윤이 소개를 했음에도 유선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이.
“유선 소저셨군요. 실은 예선 심사에서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무공을 펼치는 모습이 정말로….”
“내공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초식마저 사용하지 않더군요. 저라면 도저히 그렇게 못 할 것 같은데.”
화산파 악소천의 목소리에도 호의가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