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74화 (74/210)

074화. 용의 피 (1)

* * *

“실은 이번 신룡대회의 백미는 바로 오늘입니다. 대회의 후원자인 남궁세가에서 모든 본선 진출자들을 위해 화끈한 선물을 준비했으니까요.”

“우와와~”

진행자가 깜짝 발표를 하자 행사장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남궁세가의 명성과 부를 생각하면 보통의 선물이 아닐 것이기에 잔뜩 기대가 될 수밖에.

“우승자에게만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른여섯의 본선 진출자 모두에게 귀한 영약을 드리겠습니다. 남궁세가에서 천하제일 만선의가에 의뢰하여 제작한 이 영약은 십 년 가까이 여러분의 내공을 늘려줄 것입니다!”

십 년 내공!

한동안 대회장 내에 정적이 흘렀다.

강호에 내공을 늘려주는 영약이 드문 것은 아니나, 십 년 공력의 효능을 갖춘 것은 보물이라 불릴 만했고, 거대 문파나 세가의 직계라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진행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본선 진출자들은 실로 엄청난 기연을 얻게 된 것이다.

—십 년짜리 영약이 동시에 서른여섯 알이 제공된다고? 만선의가가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인가?

인상이 굳어진 유선이 전음을 써서 제갈윤에게 물었다.

내공을 상실한 그녀는 당연히 전음도 쓸 수 없었는데, 이번 전음은 공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으로 향하기 직전, 위청보가 몹시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건네준 밀음부(密音符) 부적의 힘을 빌린 것.

—만선의가의 의술은 대단하지만, 이런 영약을 만들려면 의술 못지않게 재료도 중요하죠. 대량의 공청석유, 만년설삼 등이 필요했을 텐데… 남궁세가가 이렇게나 많은 영약 재료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남궁세가에 회귀자가 있다면 대량의 영약 재료를 확보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재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많은 후기지수들의 공력을 늘려준다는 말인가?

분명 이면에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인데….

—느낌이 좋지 않아.

—당연하죠. 이거 음모인 게 뻔한데 느낌이 좋을 리가….

—그런 문제가 아니야. 십 년 내공을 줄 수 있는 환약. 아무래도 용혈단(龍血丹) 같다고.

—용혈단? 그건 또 뭔데요?

—바보! 용혈단이라는 이름에서 뭐 떠오르는 거 없어?

—용(龍) 혈승이 꾸미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게 어때서요? 당연히 십이간지 중 누군가가….

—용은 차원이 다르다고! 하지만 정말 이상해. 그가 남궁세가에 숨어 있을 리는 없는데…?

유선은 혼란스러웠다.

제사장인 용 혈승이 명문 정파인 남궁세가에 있다고?

피와 살육을 즐기는 그가 명문 정파에서 스스로를 감추고 지낸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갔다.

정파에 몸을 숨기기에 어울리는 혈승이라면….

분명 호랑이 인 혈승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선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이번 일에 임했던 이유.

호랑이 혈승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는데.

제길… 호랑이가 아니라 용이라고?

다 때려치우고 도망쳐야 하나 고민할 때, 진행자가 설명을 마무리했다.

“자, 오늘부터 삼 일간 하루에 열두 명씩 영약을 지급하겠습니다. 왜 한 번에 다 주지 않냐고요? 왜냐하면 영약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분의 체질을 확인하고, 복용 후 약효가 빨리 퍼지도록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해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 * *

그날 밤, 각각 배정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제갈윤과 유선이 몰래 만났다.

“어떻게 되고 있어?”

“알아봤더니 우리는 내일로 예정되어 있어요. 오늘로 정해진 사람들은 이미 불려 가기 시작했고요.”

“쳇, 벌써 시작되었군. 꺼림칙해서 영약 복용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고?”

“없어요. 다들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고요. 무림맹 공식 행사인 데다 남궁세가에서 준비한 영약이니 의심할 이유가 없는 거죠.”

“이대로 놔두면 오늘 용혈단을 먹는 열두 명은 구제하기 어려울 거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오늘 행동할 수밖에 없겠어.”

“우리 둘이서 되겠어요? 차라리 지금 도망쳐서 무림맹 수뇌부에 도움을 청하는 게….”

“도망치긴 쉬울 것 같아? 분명 이 행사장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감시하고 있을 텐데. 지금 바로 행동해야 해. 쫄리면 넌 빠지고.”

“아, 아니… 빠지겠다는 건 아니고요….”

* * *

영약을 지급하는 전각.

대청에는 후기지수들이 기쁜 표정으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방 안에서는 영약 복용과 추궁과혈이 시행되고 있었다.

세 번째 순서인 청성파 제자 금서인에게 영약을 먹인 후 진기를 운용해 몸을 주무르고 있던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문 밖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와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왜 이리 소란인가? 내 시술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노인이 짜증 섞인 호통을 치자, 방문이 반쯤 열리며 진행요원 한 명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원래 내일로 예정된 후기지수 한 명이 순서를 어기고 오늘 꼭 영약을 복용해야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무엇이? 명색이 정파의 후기지수라는 자가 이리 참을성이 없고 이기적이라니! 허허, 참.”

노인은 거칠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웅성거리는 후기지수들에 둘러싸인 채로, 한 젊은 여성이 진행요원들과 거칠게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왜 안 되는데요? 난 특이한 체질을 타고나서 만월(滿月)이 뜨는 날에는 운기행공을 할 수 없다고요. 내일이 보름이라 오늘 영약을 먹어야 한다고요! 이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소저의 개인 사정이고. 행사 규정이 있으니 고집 그만 부리고 정해진 순서대로….”

대략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보아하니 저 젊은 여인이 약효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짜를 부리는 것 같은데… 허허, 어리석은 것.

“잠깐. 난 영약 지급을 총괄하는 만선의가의 정 총관일세. 소저는 누군데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겐가?”

“아, 정 총관님. 저는 유선이라고 합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는 오늘 영약을 복용해야 한다고요!”

유선?

노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유선이라면 분명 몇 안 되는 병급으로 분류된 자인데….

“흠흠, 그건 불가하네. 보아하니 자네는 음의 기운이 충만한 만월을 피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 영약은 음양의 기운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으니 내일 복용해도….”

“남들은 몰라도 저는 안 된다고요! 저는 특이한 체질이라 반드시 오늘 복용해야 해요!”

“이런, 건방진! 만선의가 총관인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점잖게 타이르려 했음에도 유선이 고집을 피우자 노인은 울화가 치밀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임무를 수행 중인데, 배경도 변변치 않은 여자애가 속을 긁고 있으니.

당장 유선을 쫓아내라고 진행 요원들에게 명을 내리려 할 때, 몇 발짝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후기지수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의 허료라고 합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오늘 제 순서를 유선 소저에게 양보하면 안 되겠는지요?”

불문의 제자라 자비심이 발동한 건가, 아니면 원래 오지랖이 넓은 건가?

허료가 순서를 양보하겠다고 나서자 노인은 잠깐 고민이 되었다.

대 소림의 수제자의 말을 무시하기 뭣했고, 더 이상 소란이 이는 것도 몹시 불편한 상황.

“흠, 소림 제자가 양보를 하겠다면야… 뭐, 그렇게 합시다. 유선 자네는 따라 들어오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노인을 따라 유선이 걸음을 옮길 때, 소림의 허료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건넸다.

“하하,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저에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흥, 멍청하긴. 누가 누구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

속마음은 그랬지만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는 법.

유선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 * *

갑, 을, 병 세 가지 분류 중 병급은 단 네 명이었다.

혈복이나 혈면귀로 만들기에 부적합한 피를 가진 후기지수들이 바로 병급으로 분류되었는데, 유선은 혈액 검사 자체를 못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병급에 포함된 것.

지급되는 영약은 유선이 추리했던 바로 그것, 용혈단.

혈승 중 비술왕인 용 혈승의 진혈을 섞어 만든 단약으로서 십 년 공력을 늘려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공력 증대는 부가적인 효능일 뿐 원래 목적은 따로 있었는데, 갑급으로 분류된 열두 명은 혈승의 꼭두각시인 혈노로 변하게 되고, 을급으로 분류된 자들은 자폭 공격을 담당하는 혈면귀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흐흐, 별것도 아닌 병급 주제에. 어쨌거나 운이 좋은 년인가? 그래도 몇 년 치 공력은 얻어가겠구나.’

유선에게 지급할 영약을 꺼내며 노인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병급에게 복용시킬 영약은 사실 용혈단이라 부를 수 없는 것.

귀하디귀한 용 혈승의 진혈을 용도도 불분명한 병급에게 나눠줄 수는 없으니, 남궁세가와 흑사련에서 보유하고 있던 영약 몇 개를 적당히 섞어 모양만 흉내 낸 것이었는데… 그래도 명색이 영약인지라 이삼 년 치의 공력을 늘려주는 효과는 있었다.

“자, 마음을 가다듬고 이 영약을 먹게. 복용 후에는 내가 일러주는 대로 운기해야 하네. 그 후에 내 직접 추궁과혈을 통해 약의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야.”

“이게 십 년 공력을 늘려주는 영약인가요?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 흠… 이건 무슨 냄새죠? 피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피 냄새라는 말에 노인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병급 용 영약엔 진혈을 섞지 않았는데?

설마 좀 전에 다른 자들에게 지급했던 영약의 잔향이 남아있는 것인가?

“피… 피 냄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복용하지 못할까? 밖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게냐?”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발끈하세요?”

노인의 속을 박박 긁으며 유선이 환약을 입에 넣었다.

제법 좋은 것이 맞는지,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 없어지며 알싸한 약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제 내가 불러주는 순서대로 진기를 운용해봐라. 우선 관원혈에서 시작하여 황유, 천추를 거쳐 거궐혈로 진기를 보내고….”

노인이 성의 없는 목소리로 수십 개의 혈자리를 불러줬다.

혈노나 혈면귀의 비술을 걸 것도 아니었기에 진기의 유통은 그야말로 요식행위.

하지만 심드렁한 노인의 표정과는 반대로 유선의 표정은 진지했다.

약효가 퍼지면서 단전에 모여든 미세한 기운을 모으고 모아 진기 운용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진기가 흐르는 혈 자리는 노인이 불러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바퀴 진기가 돌자 가슴에 돌멩이가 걸린 듯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쯤이면 되었으려나?

살짝 눈을 떠 노인을 살핀 유선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어째서 나에게 독약을…?”

“독, 독약이라니?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당황한 노인이 말까지 더듬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진품 용혈단이 아니라고 한들, 그래도 몸에 좋은 영약임은 분명한데… 이런 부작용이 있을 리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이보게. 진정하시게. 혹시 부작용이 있다면 내가 치료를….”

“가까이 오지마! 으윽.”

노인이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가오자, 유선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방문 앞까지 물러섰을 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는지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밀리는 방문.

그 틈으로 뒹굴 듯 방에서 나오는 유선.

“유선! 이게 무슨 일이야?”

놀라고 당황한 후기지수들을 밀쳐내며 제갈윤이 달려왔다.

쓰러져 있는 유선의 몸을 붙잡을 때, 시커멓게 죽은 핏덩이를 토해내는 그녀.

“이런… 도대체 무얼 먹었길래 이렇게 검은 피를…?”

제갈윤이 품속에서 은색 침을 꺼내어 유선이 토한 피에 갖다 대자 순식간에 검게 변하는 침.

“독이다! 유선은 독에 당했다!”

“독이라니? 그녀가 복용한 것은 영약이다!”

방에서 뛰쳐나온 노인이 제갈윤의 말에 반박했지만, 후기지수들의 눈빛에 번지는 의혹과 의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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