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75화 (75/210)

075화. 용의 피 (2)

* * *

한편, 본선 진출에 실패한 위청보는 홀로 문무대로 복귀했다.

“어? 청보 왜 혼자야? 제갈하고 유선이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글쎄 알고 봤더니 신룡대회가 혈승들이 꾸민 음모였더라고요!”

“뭐라고? 역시 남궁세가에서 개입을 한 거군. 그런데 왜 혼자 온 거야? 위험할 텐데, 모두 함께 빠져나왔어야지?”

소영영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고, 광군영과 곽철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공이 딸리는 제갈윤과 공력을 모두 잃은 유선 둘이서 혈승의 음모에 맞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유선 소저의 의지가 강했어요. 후기지수들이 혈승의 꼭두각시로 변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둘이서 뭘 어쩌려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영영조차도 유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유선은 특별히 나쁜 아이는 아니었지만 분명 어딘가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는데,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고 나선 걸까?

설마…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과거를 반성하고 전향하려는 것인가?

“그건 그렇다 치고, 분명 계획도 있겠지? 똑똑한 제갈윤이 아무 대책 없이 위험에 뛰어들진 않았을 텐데?”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에요. 제갈 선배랑 헤어지기 전에 교신용 부적을 나눠 가졌는데… 바로 이거예요.”

위청보가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부적 하나를 꺼냈다.

“저는 본선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는 터라 임시방편으로 이 부적을 쓰기로 한 건데, 제갈 선배가 가진 부적에 표기를 하면 제가 가진 부적에도 표시가 나타나는 거죠. 별 위험이 없으면 파란 동그라미, 혹시 위험한 상황이면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지도록 했어요.”

부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곽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좀 이상한데? 이 부적엔 파란색과 빨간색 동그라미가 모두 나타나 있잖아.”

“그래서 문제가 심각한 거예요. 두 가지 모두 표기되는 경우는… 최악의 위험 상황으로 간주하기로 했거든요.”

“뭐라고? 그럼 큰일 난 거잖아!”

“부적에 표시가 나타난 건 방금 전이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어요.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하루 이틀 내에 위기가 닥칠 거라고요.”

“그래서 제갈윤이 뭐라고 했는데? 최악의 위기 상황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데?”

“제갈 선배가 말하기를 대장이 복귀했으면 가장 좋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않다면?”

“대장이 없으면 대신 무림 맹주라도 행사장으로 끌고 오라고 했어요.”

“뭐라고? 허허.”

광군영 등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림 맹주가 동네 꼬마 이름인가, 대신 끌고 가게?

혈승의 음모를 막으려면 그 정도 고수가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어떻게 맹주를…?

“꼭 맹주여야 할 필요는 없는 거지? 요컨대 무림맹의 고수들을 행사장으로 끌고 가면 되는 거잖아?”

잠시 고민하던 소영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번뜩이는 계획이라도 있는 걸까?

모두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제대로 된 협조를 얻어내는 건 어렵겠지만, 단지 행사장으로 끌고 가는 거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 * *

쨍그랑~

정옥수가 집어 던진 화병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정 노인! 지금 이거 어떡할 거야? 왜 그년이 피를 토했냐고?”

“대, 대공녀님. 제발 믿어주십시오. 환약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문제가 없는데 왜 피를 뿜고 쓰러져? 게다가 은침으로 확인하니 검게 변했다며?”

“그 또한 이상합니다. 아무리 병급에 줄 환약이라고 한들 설마 제가 독을 섞었겠습니까?”

“독을 안 섞었는데 왜 그년이 피를 토했냐고!”

쨍그랑~

이번엔 찻잔이 날아가 노인의 이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주르륵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노인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유선 그것이 혼자 연극을 한 겁니다. 맞습니다! 모두 그년이 꾸민 일입니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연극? 우리 일을 방해하려고 자작극을 벌였다는 건가? 왜? 무슨 목적으로?”

“모, 목적까지는 소인이 알 도리가….”

“흥, 쓸모없는 것.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

노인이 무릎으로 기어 방을 나가자 정옥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제부터는 화를 가라앉히고 냉정히 머리를 써야만 했다.

좀 전에 벌어진 사단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작극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유선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이 불러온 여파는 컸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후기지수들이 모두 영약 복용을 거부한 것이다.

남궁혁이 나서서 설득을 해봤지만, 유선이 쓰러진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영약 복용을 미루자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어떡하든 방법을 찾아 용혈단을 복용시키겠지만, 이미 발생한 잡음만으로도 부친의 책망을 피하긴 어려웠다.

남궁세가와 협업하여 구상한 이번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게다가 신룡대회를 개최해 후보자를 찾는 건 남궁세가의 임무지만, 용혈단을 복용시키는 건 흑사련의 임무. 즉 정옥수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인 것이다.

‘칫, 별 볼 일 없는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이게 뭐람.’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정옥수는 생각을 거듭했다.

배경도 없고 무공도 변변찮은 여자애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작극을 꾸민 걸까?

튀는 행동을 해서 관심을 받으려고?

아니면 자해공갈단 그런 건가? 남궁세가에서 보상금이라도 받아 보려고?

수십 가지 이유를 떠올려봤지만 모두 말도 안 되는 것들뿐.

하지만 분명 목적이 있을 텐데….

‘설마, 혹시?’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정옥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가 아니야.

분명 그것 외에는 설명이 안 돼!

유선이 벌인 자작극의 타당한 이유.

그건 분명 후기지수들이 영약 복용을 거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고, 그렇다는 것은 영약이 실은 영약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하면 유선은 이 신룡대회 자체가 음모임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틀림없어! 누군가 우리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정옥수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번졌다.

새옹지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유선의 배후만 밝혀낼 수 있다면 용혈단의 복용에 일부 차질이 생긴 것 정도는 덮고도 남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정옥수의 부름에 복면인 하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공녀님. 하명하실 게 있으십니까?”

“유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아봐. 빨리!”

“존명!”

* * *

행사장 외곽의 조용한 독채.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하던 유선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유선 소저. 어때요? 성과가 있었나요?”

“공명단 이거 나쁘지 않군. 효과가 빨라. 고맙다, 제갈.”

진기를 역으로 돌려 일부러 피를 토했던 유선은 제갈윤에게 업혀 이곳 의방으로 옮겨졌다.

그 후 즉시 공명단을 먹고 지금까지 운기행공에 열중한 것이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노인에게서 받은 영약의 효과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공명단을 복용하니 적지 않은 상승 작용을 일으켰고, 아직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진 못했지만, 얼추 십삼사 년의 공력이 단전에 쌓였다.

게다가 등에 붙어 있는 부적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몸 안의 공력에 반응하여 모산파의 보물인 증공부도 신묘한 효능을 발현하려는 것 같았다.

“내 상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제갈 넌 이만 돌아가도록 해.”

“가긴 어딜 가요?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이제 시작이라니?”

“아까 우리가 벌인 일 때문에 적들도 발칵 뒤집혔을 거예요. 유선 소저가 먹었던 약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본인들이 제일 잘 알 거고, 그렇기에 독이 들었다고 난리를 피운 것이 연기였다는 것도 이미 눈치챘겠죠.”

“그래서? 그들이 나를 죽이러 오기라도 한단 말이야? 내가 죽으면 살인멸구했다고 의심받게 될 텐데?”

“그들은 분명 올 거예요. 후기지수들에게 의심받는 것 따위 신경도 안 쓸 겁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밝혀내는 거예요. 그래야만… 용혈단 복용을 망친 책임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갈. 너 제법 똑똑하구나.”

“하하, 새삼스럽게 뭘….”

“상황을 읽는 능력이 탁월해. 네 말이 다 맞아. 그러니까 넌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유선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가시며 냉정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나를 홀로 놔두고 넌 도망치라고.

용혈단 복용을 망친 만큼 모든 위험이 그녀에게 집중될 것은 자명한 일.

분명 강력한 적들이 그녀를 잡으러 올 것이고, 아무리 내공을 일부 회복했다고 한들 이길 가능성보다는 패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넌 잡히면 안 돼. 혈교의 고문과 취조술을 얕보지 마라. 너는 잠시도 이겨내지 못하고 문무대와 강한월에 대한 모든 걸 불게 될 거야. 후기지수들이 용혈단 비술에 당할 위험은 잠시 미뤄졌으니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다. 넌 빨리 탈출하도록 해.”

“소저 말이 맞아요. 원래 우리 목표는 음모를 막는 거지 혈승을 잡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이쯤에서 함께 빠지도록 하죠.”

“난 할 일이 남았다. 너 혼자 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두고 혼자 갈 수는 없어요.”

혹시 내가 도망칠까 봐 걱정하는 건가?

잠시 헷갈렸지만 유선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제갈윤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이 걱정돼서 그런 것일 뿐.

“풉. 명색이 정파라고 지금 협객 흉내를 내겠다는 거야?”

유선이 갑자기 손가락을 뻗자 몇 줄기 지풍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워낙 빠른 움직임인 데다, 이런 상황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기에 제갈윤은 꼼짝없이 수혈을 짚이고 말았다.

“다… 당신… 어째서…?”

앉은 자리에서 스르륵 쓰러지며 제갈윤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한잠 자라고. 자고 일어나면 얼추 정리가 되어 있을 테니.”

* * *

잠든 제갈윤을 안전한 곳에 눕힌 후 유선은 행사장 외곽 외진 야산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은밀한 눈길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선은 널찍한 야산의 등선에 올라섰다.

누가 올까?

조무래기들이 몰려온다면 간만에 몸 좀 풀겠지만, 만에 하나 용이 직접 온다면 삼 초를 못 버티고 이곳에 쓰러지겠지.

만약… 호랑이가 온다면.

그가 온다면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니, 멍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젠장, 아무것도 정리되는 것이 없구나.

잠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드디어 빠르게 접근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달려오는 속도로 볼 때 조무래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용이나 호랑이도 아닌 누구.

유선은 진기를 끌어올리며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쐐애액~

검은 그림자가 비조처럼 하늘을 날아 유선 앞에 착지했다.

큼직한 대도를 손에 쥔 여인, 정옥수였다.

“보아하니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군?”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래? 내가 볼 땐 바보 같은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일을 벌이는 걸 보면. 어쨌거나 이유나 좀 알자고. 그런 자작극을 벌인 이유.”

“영약이 아닌 걸 아니라고 한 게 자작극인가?”

“그 약에 독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가? 난 저열한 음모도 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뭐라고? 뭣도 아닌 년이 진짜!”

우선 팔이라도 한 짝 베어줄 요량으로 도를 치켜들던 정옥수가 주춤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유선이라면 변변치 않은 실력으로 예선을 겨우 통과한, 아니 혈액 검사를 못 한 것만 아니었다면 절대 본선에 오르지 못했을 하수인데.

어째서 싸한 느낌이 드는 거지?

“유선! 너 정체가 뭐지?”

“예의가 없군. 본인 정체 먼저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흥, 숨겨둔 실력이 한 가닥 있는 것 같다만… 너 오늘 잘못 걸렸어!”

싸늘한 미소와 함께, 정옥수의 보도가 유선을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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