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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76화 (76/210)

076화. 용의 피 (3)

* * *

“소 사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 거야?”

무림맹 정문 근처 어두운 골목길에 몸을 숨긴 광군영이 마땅치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에요. 다른 방법 생각할 시간도 없고요.”

“하지만 진짜 무림 맹주라도 나서면 어쩌려고? 신룡대회 행사장까진 거리가 꽤 된다고. 도착하기 전에 따라 잡히면 위험한 상황이….”

“십만대산에 다녀오면서 광 사형 실력이 꽤 늘었다면서요. 경공도 일취월장한 것 아닌가요?”

“흠, 나야 뭐 그럭저럭 속도가 나오겠지만, 사매가 걱정되어서 그러지.”

“저요? 아니 제 걱정을 왜 해요? 저는 같이 안 갈 건데?”

당황하는 광군영의 등을 밀어 골목길에서 내보내며, 소영영이 내공을 담아 힘껏 외쳤다.

“아악! 마교다! 천마신교의 마인이 쳐들어왔다!”

이런, 제길….

광군영의 눈에 당황하는 무림맹 경비병들의 모습이 비쳤다.

에이 씨,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훌쩍 뛰어올라 경비병들의 머리 위를 타 넘은 광군영이 검은 마기를 무럭무럭 끌어올리며 강력한 육합흑철마장을 날렸다.

콰아앙!

육중한 무림맹 대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휘날리는 수백 수천의 나무 파편.

“으하하하! 약해 빠진 정파의 샌님들아. 잡을 수 있으면 나를 잡아 보거라!”

분노한 경비 무사들이 휘두르는 검을 요리조리 피하며 광군영이 큰소리로 외쳤다.

제발 무림 맹주의 귀에도 들리기를 바라면서.

* * *

쐐애액~

정옥수의 삼안혈도가 밤하늘을 갈랐다.

용수철처럼 허리를 튕겨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유선.

재빨리 도를 회수하며 머리를 노렸지만 역시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고 말았다.

뭐야… 이건?

생명원 사건 때 강한월에게 밀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정옥수지만, 지금은 당황과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예선 때 보여준 실력은 분명 이류라고 했는데?

정보가 잘못된 건지 형편없다던 내공도 절정의 수준은 되어 보이고, 싸움의 감각은 그 이상으로 보였다.

그래, 바로 그것이 그녀의 화를 돋우었다.

스스로 무공의 천재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듣도 보도 못한 무명의 여인이 자신보다 더한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재수 없는 것. 넌 죽었어!

늘어난 분노의 크기만큼 공력을 쥐어짜 내며 부친에게 전수받은 절초를 연거푸 펼쳤다.

절세의 보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도기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맹렬한 기세에 주눅들 만도 하건만 유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은 단도 두 개를 휘둘러 도격을 막아냈다.

사실 유선도 그리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공명단과 증공부의 도움으로 적지 않은 내공이 생겼지만, 그렇게 얻은 기운이 본신 진력으로 자리 잡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

맞지 않는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몹시 어색하고 불편했으니.

공력의 문제를 억지로 덮고 있는 것은 역시나 그녀의 전투 감각.

절대경에 올랐던 경험은 그녀의 근육과 신경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덕에 천재적인 싸움꾼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칼을 거칠게 놀리는 걸 보니 역시 사파네. 흑사련인가?”

열십자로 겹친 단도로 도기를 튕겨내며 무심한 듯 묻는 유선.

정옥수는 기가 막혔다.

상대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 건 자신인데, 오히려 역으로 취조를 당하는 꼴이라니.

쐐애액, 채앵.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우리 일을 방해하는 거지?”

챙, 채앵, 쉬이익.

“내가 누구냐고? 너희가 준 독약을 먹고 죽을 뻔한 사람이지.”

“헛소리! 어디까지 알고 온 거지? 무림 맹주가 보낸 건가?”

“아닌데. 너 버릇 좀 고쳐 달라는 네 부친의 부탁을 받고 온 건데.”

“이 년이!”

핑, 핑.

정옥수의 손가락에서 가락지 두 개가 벼락처럼 쏘아졌다.

흠칫 놀란 유선이 몸을 수평으로 눕히며 가까스로 피했지만, 머리카락이 우수수 베어지는 것까지 막진 못했다.

겨우 머리카락.

회심의 한 수마저 실패하자 정옥수는 얼른 호각을 꺼내어 불었다.

남궁세가의 진행요원들이 막아주고 있다지만 이곳에서 오래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것.

자존심은 상했지만, 속전속결을 위해 수하들을 부른 것이다.

가까운 수풀 속에서 뛰쳐나오는 네 명의 복면인들.

“쳇, 이제 보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였군. 너… 실수한 거야!”

검을 뽑아 들고 접근하는 복면인들은 일류 고수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눈빛이 차갑게 갈무리된 것을 보니 제대로 된 살법을 수련한 듯했고, 분명 합격술에도 능할 터.

그렇다면 유선도 대응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진 마교의 무공을 숨기느라 초식을 사용치 않고 임기응변으로 손을 썼지만, 이제부턴….

한 마리 난폭한 늑대처럼 복면인들 사이로 뛰어든 유선이 단도를 휘둘렀다.

마공을 상실했기에 검은 마기를 뿜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것은 분명 천마신교 최상의 절기들.

강호일절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초절한 무예가 뿜어져 나오자 복면인들은 단숨에 수세로 몰렸다.

“뭐해? 네 수하들 다 죽게 내버려 둘 거야? 너도 함께 덤벼!”

기괴하고 악랄한 변식으로 좌측 복면인의 어깨에 단도를 쑤셔 넣으며 유선이 외쳤다.

“닥쳐! 이 건방진 것.”

쓰러지는 복면인을 대신해 정옥수가 뛰어들었다.

유선이 의도한 대로 된 것이다.

함께 수련하며 손발을 맞춰봤을 리 없는 정옥수가 합류했으니 복면인들의 합격술은 이미 깨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외려 서로를 방해하게 될 테니.

유마미보의 보법을 펼치며 유선이 사방을 휘저었고, 정옥수가 뿌리는 도기가 뒤따라 날아들었다.

유선의 단도를 피하기에도 정신이 없던 복면인들로서는 매우 난감한 상황.

게다가 유선이 움직이는 동선은 천재적인 감각으로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었으니….

“크아악.”

복면인 한 명이 정옥수의 도기에 허벅지를 크게 베여 쓰러졌다.

냉혹한 그녀로서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지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그 틈에 유선이 쏜 지풍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또 다른 복면인의 미간을 꿰뚫었다.

“너! 그건… 마교의 골령회풍지? 감히 마교의 잡것이 무림맹에 숨어든 거냐?”

그제야 유선의 독특한 무공을 알아본 정옥수가 놀라 소리쳤다.

“흑사련의 잡것이 신룡대회에 참가했는데, 마인이라고 오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하지만 난 마교가 아니야. 네 눈엔 내 공력이 마공으로 보이냐?”

“거짓말! 비록 공력은 마공이 아니지만 네 악랄한 수법은 분명 마교의 회풍지였어!”

“그래? 그럼 이건 뭘까?”

유선이 차갑게 웃으며 두 자루 단도를 공중을 향해 던졌고, 달빛을 받으며 하늘로 치솟던 단도가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심해! 마교의 흑월유성이다!”

정옥수가 놀라며 경고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공중에서 사라졌던 두 자루 단도가 갑자기 마지막 복면인과 정옥수의 눈앞에서 나타나 빠른 속도로 쇄도한 것이다.

“크억.”

초절정의 정옥수는 재빨리 삼안혈도를 휘둘러 단도를 쳐냈지만, 복면인의 순발력은 그녀에 미치지 못했다.

목의 대동맥이 크게 베여 그대로 쓰러지는 복면인.

“너… 너… 도대체 뭐야?”

바닥을 뒹구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정옥수는 기가 질린 듯 물었다.

“똑같은 질문이 벌써 몇 번째인지… 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너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는구나.”

“내가 누군지 알겠다고?”

“그래. 네 무공을 보니 분명 사파이고, 보기 드문 보도를 든 것을 보니 매우 귀한 신분이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초절정의 공력을 지니고 마교의 무공을 줄줄이 꿸 정도로 견식도 넓은 것으로 보아 누구에게 교육받았을지도 얼추 답이 나오는군. 그리고….”

“그리고, 또 뭐지?”

“넌 용의 부하이지.”

용? 이건 또 뭔 소리야?

정옥수의 눈빛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 모습을 본 유선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혈승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구나.

그렇다면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예전에도… 너와 같은 아이가 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미쳐 날뛰었는데, 어느 순간 많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 세상일이 그렇듯, 그건 너무 늦은 후회였어.”

“미친년! 뭔 헛소리야? 잔말 말고 어서 덤벼!”

“네가 안돼 보여서 한 말이다. 네 말 대로 쓸데없는, 공허한 소리이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도를 툭 차올려 손에 쥔 유선이 유령처럼 쇄도했다.

거리낄 것 없이 마교의 초식을 사용하는 데다 새로 얻은 내공에도 보다 익숙해진 터라 매우 위협적이었다.

반면 정옥수는 이미 기가 질린 상태였으니.

쐐애액~

아랫입술을 질끈 문 정옥수가 반월형 도기를 마구 뿜어냈지만, 유선은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피하며 단도를 휘둘렀다.

샤악, 샤악.

정옥수의 값비싼 무복에 하나 하나 혈선이 그어졌다.

“으아아아악!”

야생의 늑대처럼 괴성을 지르며 정옥수는 몸부림쳤다.

하지만 혈교의 미친개였고, 마교의 절대급 천재였던 유선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가진 공력은 정옥수가 더 컸지만, 존재의 그릇이 너무 차이가 났다.

샤악, 샤악.

단도가 춤을 출 때마다 빨간 혈선이 그어졌고, 어느새 정옥수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마무리할 시간.

붉게 충혈된 정옥수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던 유선이 무심히 손을 뻗었다.

피잉!

쏜 살보다 더 빠르게 나르는 단도.

막 정옥수의 심장을 파헤치려 할 때, 그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날아온 무언가가 단도의 날을 강타했다.

타앙!

목적을 이루지 못한 단도가 땅 위에 꽂혔고, 죽음의 공포로 기혈이 역류한 것인지 정옥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누구지?

유선은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나무숲을 바라봤다.

돌조각이 날아온 그곳에서 검은 삿갓을 깊이 눌러쓴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쿵.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두웠고 삿갓을 쓴 탓에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아니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겠지만… 유선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말없이 단도를 주워들었다.

쓰러져 있는 정옥수의 가슴을 향해 단도를 찔러가는데….

“멈춰라. 한 치만 더 움직이면 네 심장에 먼저 구멍이 날 테니.”

목소리는 바뀌었지만 말투는 여전하네.

무시무시한 경고였지만 유선은 무시하고 단도를 움직였다.

피잉! 탕!

여지없이 날아드는 돌멩이.

쥐고 있던 단도가 저 멀리 튕겨 날아갔고, 그 충격에 유선의 손아귀가 찢어졌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손을 멈춰라.”

왜? 이 계집애를 위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유선은 차갑게 웃으며 곧게 편 손가락에 공력을 집중했다.

단도 대신 손가락으로 정옥수의 심장을 찔러갈 때, 다시 한번 돌멩이가 날아왔다.

삿갓인의 경고는 헛말이 아니었던 듯, 이번 돌멩이는 유선의 심장을 노렸다.

유선의 왼손이 기이한 각도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돌멩이를 향해 장력을 날렸다.

타앙!

다행히 돌멩이를 막아냈지만, 공력의 차이가 컸던 듯 유선의 왼손 뼈가 산산이 부서졌다.

유선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고, 삿갓에 감춰진 사내의 두 눈은 의혹으로 번득였다.

“너! 어떻게 그 장법을 알고 있는 것이지?”

유선을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며 사내가 물었다.

“왜요? 내가 이 무공을 알면 안 되나요?”

반문하는 유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내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가공할 기운이 순식간에 유선을 옥죄며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네 말장난을 받아줄 생각은 없다. 말하라. 어디서 이 무공을 배운 거지?”

허공에 둥둥 떠서 삿갓 사내의 눈앞까지 끌려간 유선.

고통스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호랑이 혈승이 이렇게 흥분하는 건 아직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니까.

과연 나를 알아볼까?

유선은 한 가닥 기대를 놓지 않고 있었다.

비록 천마의 고독술에 걸려 혈령의 기운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호랑이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외모가 바뀌고 혈승의 공력은 사라졌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내 영혼은 예전 그대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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