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유선의 사연
* * *
허공에 붕 뜬 채로, 온몸을 조여오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유선은 두 눈으로 끊임없이 외쳤다.
나를 봐.
바로 나라고.
나를 알아볼 수 있잖아?
“근육이 뒤틀리고 힘줄이 뽑히는 고통을 겪어야 입을 열 건가?”
이건 내가 당신한테 주는 기회야.
내 영혼을 느껴보라고.
“네 심령을 속박해 입을 열게 만들 힘이 본좌에게 있음을 모르는 것인가?”
기대에 찼던 유선의 눈빛에 서서히 걱정이 번졌다.
설마…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말하라. 그 무공을 네게 가르친 게 누구지? 어째서 본좌의 행사를 방해한 것이냐? 그가… 그렇게 시키던가?”
행사를 방해해?
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
그가 시켰냐고?
날 배신자로 의심하는 거냐고!
유선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날… 못 알아보는구나.
“당신한테는 해줄 말이 없어.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스스로 알아내. 고문을 하던 뇌를 가르던 알아서 하라고!”
“뭐라고? 이 어린 것이…!”
삿갓 사내, 호랑이 혈승이자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인 남궁윤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허공섭물을 펼치던 오른손을 꽉 움켜쥐자 유선의 목뼈에서 그르륵 소리가 울렸다.
“중요치도 않은 정보 몇 개 때문에 널 살려둘 줄 알았다면 착각이다.”
중요치 않다고?
나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고?
남궁윤에 대항할 힘도 없었지만, 힘이 있더라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충격이 컸다.
설사 자신을 못 알아보더라도, 최소한 찾기 위한 노력은 해줄 줄 알았는데.
목이 서서히 꺾이며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외치는 급박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손 놓지 못할까!”
쐐애액~
쾌속의 신법으로 날아든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남궁윤을 향해 장력을 갈겼다.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공기를 남궁윤은 무시하지 못하고 마주 장력을 날렸다.
콰아앙!
힘의 차이는 대번에 드러났다.
남궁윤의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날아가는 사내.
하지만 목적은 이루었으니, 그사이 유선의 팔을 낚아채 함께 물러선 것이다.
“흥, 가소로운 마교의 잡졸이구나. 둘이 한패냐?”
광군영은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비록 단 일 장을 교환한 것뿐이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도저히 삿갓을 쓴 저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쩌다가 저런 괴물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던 거요?”
남궁윤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로 광군영이 유선에게 물었다.
“그건 내 사정이고. 넌 상관하지 말고 빨리 도망쳐라.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아무 대책 없이 온 것도 아니고.”
“최근에 실력이 는 것은 알지만, 그 정도로는 턱도 없어. 난 내버려 두고 빨리 가!”
자신과 호랑이의 문제에 누군가 개입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
“흥, 누구 맘대로 도망을 친다는 말이냐? 감히 본좌 앞에서….”
남궁윤이 바람처럼 쇄도하며 묵직한 장력을 날렸다.
신분을 드러내기 싫었던지 혈승의 무공도 남궁세가의 무공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방출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치잇.
유선을 멀찍이 밀어내며 광군영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뒤로 두어 바퀴를 구르며 나가떨어지는 그의 입가엔 피가 흘렀다.
제길. 천마의 지도를 받은 후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어린 것이 제법이구나. 마교에 너 같은 젊은 고수가 있었던가? 마교 후기지수 중 최강이라는 흑철기린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공중에 남아 진득하게 달라붙는 마기를 털어내며 남궁윤이 말했다.
분명 칭찬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래 봐야 후기지수라는 비아냥.
남궁윤이 지체 없이 두 번째 장력을 날렸다.
콰아앙!
온몸의 마기를 쥐어짜듯 뽑아내 장력을 맞받아쳤지만, 광군영은 여지없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이번 충격은 훨씬 더 컸는지, 억지로 일어서는 그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 바보야! 네 상대가 아니라니까. 어서 도망쳐!”
유선이 재빨리 다가와 광군영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이런 전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거의 된 것 같소. 조금만 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광군영은 품속에서 시커먼 환약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귀찮은 파리 떼를 쫓듯 마기를 털어내던 남궁윤이 세 번째 장력을 날리려 했다.
부우웅!
오른손에 뭉쳐진 거대한 기의 광체가 막 쏘아지려던 순간.
남궁윤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먼 곳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
아직 거리는 멀었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런 비겁한 것들. 조력자를 부른 거냐?”
가소로운 듯 말했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쇄도하는 기운은 그로서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력한 것.
여기서 세상 떠들썩 한 소란을 피울 게 아니라면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옳았다.
주변을 재빨리 훑은 남궁윤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퍽, 퍽, 퍽, 퍼억.
바닥을 뒹굴고 있던 네 명의 복면인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어서 손을 뻗자 정옥수의 몸뚱이가 붕 떠서 날아왔고, 재빨리 그녀를 옆구리에 낀 남궁윤이 몸을 돌렸다.
“가긴 어딜 가! 난 할 말 안 끝났다고!”
유선이 악을 썼지만 남궁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떠나갔다.
“유선 소저. 우리도 빨리 가야 합니다.”
“그가… 그가 그냥 갔어. 내가 어디 있는지 묻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유선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광군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강제로 들쳐 없고 달렸다.
쐐애액~ 턱.
광군영이 막 현장을 벗어난 순간, 나는 새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온 누군가가 공터 중앙에 착지했다.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또 다른 두 명의 노인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쯧쯧, 명색이 무림맹의 장로라는 분들이 이렇게 느려서야….”
“헉헉, 저희가 느린 게 아니고 맹주께서 빠른 거지요. 그나저나 그놈은 어디로 간 겁니까?”
“그게 참 애매하게 되었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오는 건데. 괜히 두 분 발맞춰주다가 이리된 거잖소. 에이 참.”
“뭐가 어찌 된 건데요?”
무림맹주 위무진이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마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마인이 여기서 싸움을 벌였는데, 아니 실은 그자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싸움이 있었던 것 같고. 어쨌든 마기를 잔뜩 품은 자가 저기 저쪽으로 도주했소.”
“그럼 그쪽으로 쫓아가면 되지 뭐가 애매하단 말입니까?”
“도주한 속도가 너무 빠르거든. 아까 무림맹에서 도망칠 때보다 훨씬 더. 그리고… 저기 저 방향으로도 도주한 자도 있는데… 어느 쪽을 쫓아야 할지?”
“그게 뭐가 고민입니까? 당연히 마기를 풍기는 쪽을 쫓아야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나 먼저 갑니다.”
휘리릭 돌개바람이 일며 무림맹주가 쏘아져 나갔다.
남궁윤이 도주한 방향이었다.
그의 몸에는 광군영이 뿌린 마기가 진득하게 붙어 있었고, 반면 광군영은 마기를 숨기는 환약을 먹었기에 무림맹주조차 깜박 속아 넘어간 것이다.
* * *
신룡대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영약 배포 시 발생한 작은 사고도 원인 중의 하나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마인의 급작스런 출현 때문이었다.
남궁윤의 뒤를 쫓던 무림맹주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고, 그 즉시 신룡대회 중단을 선언했다.
신룡대회가 끝난 지 삼 일째 되던 날.
긴 여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남녀가 문무대에 도착했다.
장백산에서부터 쉴 새 없이 달려온 강한월과 진가린이었다.
“대장! 가린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오래 걸리다니? 이 정도면 빨리 다녀온 건데. 왜? 무슨 일 있었어?”
“휴우. 말도 마세요. 일도 아주 큰 일이 있었죠.”
과장되게 한숨을 내쉰 제갈윤이 설명을 시작했다.
신룡대회에 참여하게 된 것부터 혈승의 음모를 알게 된 것, 그리고 광군영이 유선을 구해온 것까지.
설명은 길게 이어졌고, 웬만해선 담담함을 잃지 않는 강한월도 몇 차례 표정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결과는 좋았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했다. 제갈 너답지 않은 행동이었어. 다음부터는 그런 모험은 하면 안 된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그건 그렇고 유선 소저랑 이야기 좀 해보세요.”
“유선에게 문제가 있나?”
“좀 이상해요. 혼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강한월은 즉시 유선을 만나러 갔다.
함께 힘을 합쳐 싸운 것에 대한 배려랄까, 그녀는 더 이상 지하실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은 마치 스스로를 감금해 놓은 것 같았다.
“유선. 이야기 좀 할까?”
“흥, 그 면상 안 봐서 한동안 편했는데, 좋은 날도 이제 끝났구나. 난 너랑 할 말 없다.”
“신룡대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런 거라면 제갈한테 들으면 될 텐데?”
“그곳에서 누굴 만난 거야? 호랑이를 만났나?”
호랑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무표정했던 유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장백산에서 독심술이라도 배워온 거냐?”
“그리 어려운 추리는 아니잖아?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 그렇게 열성을 보였던 것을 보면 분명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테고, 그건 아마도 동료 혈승을 만나는 거였겠지.”
“그래, 그것까진 짐작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뜬금없이 호랑이라니…?”
“닭이나 원숭이를 만났을 때의 네 모습을 보면 모든 혈승과 친한 건 분명 아니고… 너와 같이 무술을 담당하는 혈승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무술 계열 혈승의 수장은 호랑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건 분명 긍정의 의미였다.
“왜 호랑이를 따라가지 않았지?”
“…….”
“그가 너를 구하려 하지 않던가?”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네가 알려줘. 무엇이 그리 서운했는지.”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서운했냐는 질문을 받자, 가슴 속에 응어리져있던 무언가가 겉잡을 수없이 치솟아 올랐다.
너무도 서운했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울했다.
자신의 삶이 의미 없어졌고,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
그래, 말을 하자.
이 세상 누구 한 명쯤은 내 억울한 사연을 알고 있어야지.
“흑룡강 어귀 구석진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어.”
유선은 어두운 천정에 눈을 고정하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제법 긴 이야기일 것을 알았기에 강한월도 방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몹시 춥고 척박한 곳… 마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살기 힘든 곳이었지.”
그곳이 유선의 고향이었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어린 유선은 마을 객잔에서 일하며 힘들게 살았다.
원래 희망이 없는 곳이었고, 객잔 점소이에겐 더더욱 미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인근에 새로 문을 연 정무관이라는 무술 도장의 사부가 유선의 자질을 알아보고 제자로 들이기로 한 것이다.
“난 무술이 뭔지 몰랐고 무인이 되는 꿈도 꿔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말에 두말없이 무관의 제자가 되기로 했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무공을 배우는 다른 제자들은 자질이 있다는 이유로 기명제자가 된 유선을 따돌리고 괴롭혔다.
대련을 핑계로 두들겨 패기 일쑤였고, 심한 날은 얼굴이 부어 밥을 씹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 년 가까이 지냈어. 수업료를 내는 관원들의 눈치가 보였는지 사부도 날 보호해주지 않았어. 이젠 더 이상 못 버티겠다, 이 지옥 같은 무관을 탈출해야겠다 결심할 무렵… 그가 나타난 거야.”
사부가 어느 날 사내 한 명을 데려왔다.
무관을 차리기 전 가르쳤던 아이였는데, 몇 년간 병역을 치르고 돌아온 것이라 했다.
유선보다 다섯 살 많은 강철 같은 체격의 사내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