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천산 백응신장 (1)
* * *
“사형이 무관에 온 후로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어. 사형이 나를 무척 챙겼거든.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섰던 몇 명은 두 눈이 시퍼렇게 멍든 후에 무릎을 꿇었지.”
이후로 몇 년은 유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형은 가족이 되어주었고 매일 밤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형에게 무공을 배우면서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그렇게 계속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사형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흑룡강 시골 마을에 처박혀 살기엔 너무도 뛰어났지.”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사형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유선 본인도 진작에 사부의 무공을 뛰어넘었으니까.
보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보다 뛰어난 절기를 배우면 절정을 넘어 초절정의 고수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테니까.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어느 날 사형이 정무관을 뛰쳐나갔다.
“난 혼자 버텨야 했어. 더 이상 나를 구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 사형이 없었으니까.”
유선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무공 수련에 몰두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사형에 대한 원망이 쌓이고, 쌓인 원망만큼 무공도 늘어갔다.
오 년이 흘러 고독감이 폭발하기 직전… 사형이 돌아왔다.
그는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수준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고수가 되었고, 위엄과 패기가 넘쳤다.
천하제일인, 아니 신과 같은 존재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나와 함께 가자고, 너도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유선은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유선은 혈교에 가입했다.
“혈교의 교리 따위는 관심도 없었어. 그저 사형과 함께 무공을 수련하고 함께 싸우는 것이 좋았을 뿐. 미친 듯이 신나게 수련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난 십이혈승 중 하나가 되어있었지.”
“그곳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초반엔 좋은 곳이라 생각했지. 실제로 삶에 지친 민초들을 많이 도왔으니까. 나중엔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눈에 보이더군. 특히나 비술이라 불리는 지저분한 짓거리들….”
피를 주입해 꼭두각시를 만들고 자폭의 주술을 거는 행위들.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끝없는 전투.
사형 곁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신나는 일이 없었다.
“삶에 염증이 쌓여갔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무렵 그 일이 터졌어. 척혈단과의 마지막 전투. 그 뒤는… 뭐 강한월 너도 아는 이야기지.”
“그렇군. 그런데… 뭐가 그리 서운한 거지?”
무심한 듯 묻는 강한월을 향해 유선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내가 혈승이 된 건 사형 때문이라고! 원한 적도 없는 회귀까지 하면서 사형을 따라왔는데 그는 날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건 지난 생의 이야기잖아. 이번 생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번… 생?”
“그래.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의 너와 회귀 전의 너는 좀 다른 것 같더군. 과거의 너는 무공 수련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며?”
“그랬지. 그게 바로 나다.”
“하지만 천마신교에서의 네 모습은 그렇지 않던걸. 물론 무공에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신녀궁의 유선은 머리를 써 사람 조정하기를 좋아하고, 위장에 능하고, 오만하고 도도하지만, 때론 살갑게 굴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잖아?”
“칭찬은 아니군.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난 네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 거지 뭔가를 말하러 온 게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강한월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견지하던 원칙과 달랐기 때문이다.
회귀자는 역천의 존재이고, 그 자체로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던 진가린의 사부를 본 후 조금은 생각이 변한 걸까?
말없이 일어나 방을 나서는 강한월을 향해 유선이 물었다.
“어째서 묻지 않는 거지?”
“내가 뭘 물어야 하지?”
“혈교의 우두머리, 자 혈승.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면… 알려줄 생각은 있고?”
유선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침잠된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무서운 적은 바로 자 혈승이라고.
그를 막지 못하면 나머지 혈승 모두를 잡더라도 아무 소용없다고.
강한월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유선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기를 바랐지만, 성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외려 본인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것.
유선의 전생이 사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면, 강한월의 삶은 오롯이 사부에 이끌려온 것인데….
‘사부님. 왜 아무런 연락이 없으십니까?’
* * *
겹겹이 늘어선 높은 산들.
광활한 천산산맥에서 백응신장의 은거지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신주의협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 만난 유목민 가족의 말을 들어보면 저 산 너머 계곡에 그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주위에 보는 눈도 없겠다, 오랜만에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쳤다.
쐐애액~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뒤로 사라졌고, 신주의협은 이미 산 너머에 도착했다.
‘확실히… 주변 공기가 범상치 않구나. 선배가 은거할 만한 곳이야.’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반 시진쯤 걸었을 때, 신주의협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백여 장쯤 떨어진 나무숲 뒤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고수의 기운.
“백응신장 선배 계십니까? 후배 고검이 인사 올립니다.”
“고검? 신주의협께서 무슨 이유로 이 누추한 곳을 또 찾아오셨소?”
나무숲 뒤에서 울려 나온 목소리는 몹시도 차가웠다.
게다가 ‘또’ 찾아왔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뵙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만….”
만남이 내키지 않는 듯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을 내칠 수는 없었는지,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들어오시오.”
나무숲 뒤의 허름한 나무집.
초야에 은거한 고인이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는 거야 이상할 게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분위기가 너무나 을씨년스러웠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백응신장의 상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대어 앉은 모습은, 과거 천하를 종횡하던 초고수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선배.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안녕하셨냐고 여쭙고 싶습니다만… 모습을 뵈니 그럴 수가 없군요.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어디가 편찮으냐고? 그걸 몰라서 묻는 게요?”
“자세한 것은 진맥을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아마도 근육과 신경을 굳게 만드는 독한 수법에 당하신 것 같군요. 게다가 혈맥도 서서히 말라가서 공력의 흐름도 저해되고 있는 듯….”
“지금… 날 놀리는 걸로 보입니다만.”
몸이 아프니 심경이 불편한 걸까?
백응신장의 표정은 어두웠고 목소리는 사나웠다.
“그럴 리가요. 제가 진맥을 한번 해봐도 되겠습니까? 비록 의원은 아니지만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같은 노여움을 뿜어내던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신주의협의 모습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인데….
“몹시 혼란스럽구려. 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정말 이곳에 처음 와본 거요?”
“처음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을 찾느라 고생 좀 했지요.”
“허허, 이것 참. 내가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신주의협이 그리 말씀하시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허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휴우.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합시다. 내 손님 대접이 소홀했소.”
집 안으로 들어간 백응신장은 손수 차를 끓여 신주의협의 잔에 따랐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차를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던 노인이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십여 년 전 강호를 은퇴한 나는 이곳 천산에 자리를 잡았소. 초야에 묻혀 조용히 말년을 보낼 생각이었고, 또한 우리 사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지.”
말동무해 줄 시동 한 명만을 데리고 시작한 은거 생활.
처음 몇 년간은 정말 한가롭고 평안한 시간이었다.
인생을 되돌아보며 시를 한 수 짓거나, 이제는 쓸 일도 없었지만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기도 했다.
그런 복된 시간이 처참히 망가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두 명의 사내가 계곡으로 찾아왔다.
“나를 만나려고 온 것은 아니었소. 이곳에 보관되고 있던 어떤 물건 때문이었지. 그 물건을 탈취하려고 들이닥친 것인데, 내 존재를 알고는 몹시도 당황하더군.”
사내들은 둘 다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러니 성공을 자신하며 당당히 들이닥친 것인데, 매우 운이 없게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천하 십대고수로 명성 높은 백응신장.
변변히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호된 꾸지람을 들은 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의 일은 어찌 보면 백응신장의 실책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습격을 받았으니 보호하고 있던 물건을 챙겨 어디 먼 곳으로 피했으면 좋았을 것을. 워낙 무공에 자신이 있다 보니 누구든 올 테면 와보라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더니 결국…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와 보니 가면을 쓴 사내가 평상에 느긋하게 앉아있더군.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지. 먼저 왔던 두 사내가 속한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가면 사내는 변조된 목소리로 담담하게 요구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 곱게 그 물건을 내놓으라고.
백응신장은 코웃음을 쳤다.
천마나 흑사련주가 직접 오더라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얼굴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 자가 혼자 찾아와 이렇듯 건방진 소리를 해대다니.
은거 이후 더욱 원숙해진 천응공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가면인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콰아아아앙!
목구멍을 역류하는 핏덩이를 삼키며 백응신장은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가볍게 맞받아치는 가면인의 장력에 자신의 천응공이 거품처럼 소멸되며, 작지 않은 내상까지 입은 것이다.
“내 비록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가면인도 마찬가지. 그 한 수의 공방으로 사실상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소.”
“믿을 수가 없군요. 선배의 천응공 장력은 소림 장문이라도 함부로 맞받아칠 수 없었을 텐데. 가면인의 무공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습니까? 선배의 안목이라면 분명 알아볼 수 있었겠죠?”
“아니. 아무것도 알 수 없었소. 내가 아는 그 어떤 무공과도 결이 달랐지. 뭐랄까… 무공이라기보다는 순수한 힘의 결정체 같았다오.”
신주의협의 입에서 깊은 한탄이 흘렀다.
고령으로 인해 원기가 쇠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백응신장은 분명 절대급의 고수.
그런 백응신장을 단 한 수에 누를 수 있는 고수는 과연 누구일까?
설마 천마가 마신강림의 능력을 각성하고 다녀갔단 말인가?
“승부는 뻔했지만 그렇다고 가면인이 원하는 물건을 넘겨줄 수는 없었지.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재차 공격을 가했소. 내 평생 처음으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짠 공격을 퍼부었지만 모두 소용없었소. 나는… 나는 그제야 깨달았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그때 이런 부상을 입으신 거군요.”
“그자는 나를 헤칠 생각은 없어 보였소. 하지만 끝까지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근맥을 끊는 고문을 가했고, 고통에 겨워 내 정신이 약해진 틈에 섭혼의 비술을 걸어 내가 입을 열게 만들었지.”
“정말… 악독한 인물이군요. 도대체 그는 누굴까요? 짐작 가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백응신장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몹시 목이 탔는지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고, 그리고는 신주의협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짐작이라… 실은 강하게 의심 가는 사람이 있지. 아니, 실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소.”
“누굽니까, 그자가?”
“신주의협.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가면을 쓰고 와 물건을 약탈해간 그자는 바로 당신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