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천산 백응신장 (2)
* * *
황당함에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가면인이 나였다고?
자신을 반기지 않는 백응신장을 보고 오해가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선배. 그렇게 생각하셨던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우선 첫 번째로는 가면인의 가공할 무공이오. 세상에 나를 제압할 고수가 많을 리는 없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천마와 흑사련주, 그리고 신주의협 당신뿐이었소.”
맞는 말이었다.
백응신장은 십대고수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던 초고수.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밑이었고, 전대 고수인 소요자쯤 되어야 승부를 논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고 저를 의심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차라리 마교나 사파를 의심하심이….”
“나라고 당신을 의심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가면인에게선 마공이나 사공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소. 게다가 먼저 왔던 두 명의 초절정 고수. 그들은 분명 정파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오. 그러니 더욱 신주의협이 의심될 수밖에.”
“하지만….”
“수천, 수만 번 넘게 당시의 치욕적인 대결을 복기해봤소. 그러면서 얻은 결론은, 가면인은 이미 절대의 경지를 넘어 초월경에 이르렀다는 거요. 당금 무림에서 초월경에 오를 자질을 갖춘 사람은 신주의협뿐이라고 난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소.”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떠십니까? 여전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백응신장은 신주의협의 두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당신의 눈매가 가면인의 그것과 매우 닯았다는 것은 분명하오.”
“선배….”
“하지만 당신의 눈빛을 보니… 그 진심을 믿지 않을 수가 없구려. 천하제일의 협객 신주의협이 남의 물건을 약탈할 리가 없지. 내가 노망이 들어 잠시나마 의심했던 것을 사과드리오.”
“휴우,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군요. 그 가면인은 도대체 누굴까요?”
백응신장은 뼈만 남은 앙상한 팔목을 내밀었다.
마치 진맥을 해보라는 듯이.
“내 몸에는 가면인의 공력의 흔적이 남아 있소. 당신이라면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신주의협은 사양하지 않고 백응신장의 완맥에 손을 얹었다.
가면인의 무공을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백응신장의 부상을 치료하려는 목적이 컸다.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웅혼한 내공을 아낌없이 사용한 성과가 드러났다.
백응신장의 뒤틀린 근골은 제자리를 찾았고, 검게 물들었던 얼굴엔 혈색이 돌았다.
치료하는 동안 중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는데, 백응신장의 사문에서 대대로 지켜오던 보물에 대한 것이었다.
핏빛 월장석(月長石) 두 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왜 지켜야만 하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수백 년 전 이 돌들을 발견한 선조가 세상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지키라는 명을 남겼을 뿐.
“이 정도면 되었소. 오히려 부상을 입기 전보다 더 힘이 넘치는구려. 신주의협의 귀한 시간과 내공을 낭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죄송하고 또한 감사하오.”
“별말씀을요. 선배의 무공이 워낙 깊고 탄탄해서 치료가 크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 거요. 강한월이라 했던가? 제자의 소식이 들려오면 내 반드시 전력으로 돕겠소.”
“감사합니다.”
“그래, 신주의협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보시려오?”
“원래는 몇몇 선배들을 더 찾아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면인을 추적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군요.”
“흠, 마땅히 그래야 할 거요. 그자는 분명 세상에 큰 위험이 될 테니까.”
“하지만 추적할 단서가 너무 없어서 걱정입니다.”
“운남으로 가보시면 어떻겠소?”
“운남이요?”
“그렇소. 가면인보다 앞서 찾아왔던 두 명의 고수들. 그들은 운남 대리국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소.”
“대리국… 천룡사의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늙은이의 눈에는 그리 보입디다.”
술 한 동이를 비우며 석별의 정을 나눈 후, 신주의협은 길을 떠났다.
존경하는 선배의 병을 치료한 데다 강한월의 일을 부탁하는 목적도 이루었으니 충분한 성과를 올린 것이지만, 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백응신장의 근골을 치유할 때 느꼈던 섬찟한 감정.
교묘하며 차원 높게 인체를 망가트린 수법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도 신주의협 자신이 창안한 금나수법과 유사한 면이 엿보였던 것이다.
‘가면인. 넌 도대체 누구냐?’
숨이 막힐 정도로 달려야 이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될까?
쐐애액~
신주의협은 나는 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천산 지역을 벗어났다.
* * *
낙양 문무대.
대원들이 모두 모여 강한월이 꺼내 놓은 보석 두 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 시간의 돌이라고요?”
“그래. 이런 돌이 세상 어딘가에 더 숨겨져 있을 거야. 혹시 천마신교나 모산파에도 있지 않나 해서.”
강한월의 추측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실제로 천마신교와 모산파에는 신비한 힘을 가진 보물들이 여럿 보관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기대하던 답은 엉뚱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이거 우리 제갈세가에 있는 와룡신풍석(臥龍神風石) 같은데요?”
“와룡신풍석?”
“네. 삼국시대 적벽대전 때 제갈공명께서 동남풍을 불게 한 일화는 다들 알죠? 바람을 부르는 제사를 올린 석상에 신비한 능력이 감춰져 있었다고 하는데, 제갈세가에선 와룡신풍석이라 불러요.”
“아직 제갈세가에서 보관 중이고?”
“아마도요. 중요하고 비밀스런 보물이라 태상가주인 저희 할아버지께서 직접 보관하고 계실 거예요.”
강한월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와룡신풍석이라는 이름은 조금 생뚱맞았지만, 그 전설적인 제갈공명이라면 이런 역천의 보물을 소유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분명했다.
“제갈. 나와 함께 제갈세가에 가보도록 하자.”
“왜요? 와룡신풍… 아니 시간의 돌을 내놓으라고 하려고요? 아서요. 가문의 보물이라니까요. 절대로 주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넘겨받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한다. 또한 그걸 노리는 세력이 있다는 경고도 해드려야 하고.”
“아이참. 본가에는 가기 싫은데….”
제갈윤이 울상을 지었다.
태상가주인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좋았지만, 아버지 그리고 큰 형님과의 관계는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이건 공무야! 사적인 감정은 개입시키지 마라.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저도 알아요! 가면 되잖아요, 제갈세가!”
강한월은 이틀 후 출발하겠다고 일정까지 못 박았다.
제갈윤으로서는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는 일.
그저 마음속으로 빌 뿐이었다.
제갈세가에 가는 것이 취소되게끔 아무 사건이라도 터지면 좋겠다고.
그의 간절한 염원이 통했던 것일까?
바라던 사건이 터졌다.
* * *
다음 날 오후.
원로원주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무림맹으로 향했던 강한월이 돌아왔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로.
“어? 대장. 표정이 왜 그래요? 뭔 일 터졌어요?”
이거 잘하면 본가에 안 가도 되겠는데?
제갈윤이 잔뜩 기대를 담고 물었다.
“그래, 급한 문제가 생겼어. 그래서 말인데… 어쩔 수 없이 제갈세가에 가는 것은….”
“취소인가요?”
“아니. 제갈 너 혼자 다녀와야겠다.”
“뭐… 뭐라고요?”
제갈윤이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강한월은 본 척도 안 하고 전 대원을 소집했다.
매우 중요한 문제를 상의해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시급하게.
“원로원주님을 뵈러 갔다가 동창에서 온 손님을 만났다.”
“동창이라면… 장준검 천호?”
“장 천호가 아니야. 그의 수하인 조철상이 왔더구나.”
원로원주의 말에 따르면 동창 이형백호 조철상이 보름째 매일 무림맹을 방문하여 강한월을 찾고 있다고 했다.
동창을 싫어하는 원로원주 입장에선 속이 불편했지만, 황제의 명을 가져왔다 하니 내칠 수도 없는 일.
장준검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한 강한월은 기쁜 마음에 조철상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장준검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삼황자(三皇子)의 비밀 특명을 전하러 온 것이었어.”
“삼황자라면 황태자와 더불어 다음번 황제로 등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잖아요?”
“그래. 재능이 뛰어나서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고, 동창도 은밀하게 그를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지.”
“그런 대단한 분이 대장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내가 아니었어. 동창은 위청보에게 용무가 있더군.”
“네에? 아니, 갑자기 청보는 왜…?”
조철상의 말에 따르면 상황은 이랬다.
황실의 규율이 엄해 공식적으로 드러낼 순 없지만 삼황자에겐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애지중지 아껴온 여인인데, 몇 달 전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름난 명의들과 온갖 영약을 동원해 치료하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정확한 병명조차 밝힐 수가 없었다.
의원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것은 일반적인 병이 아니라 마치 비술이나 저주에 걸린 것으로 의심된다는 것.
누가 감히!
삼황자는 분노했고, 치료의 방식을 달리하기로 했다.
의원이 고칠 수 없다면 고명한 법사나 주술사를 청해 여인을 치료키로 한 것이다.
천하에 이름 높은 고인들을 청하는 임무를 동창에서 맡게 되었다.
법술이라면 모산파가 빠질 수 없는 법.
이와 같은 연유로 조철상이 강한월을 찾아온 것이다.
“아니 그럼 모산파 본산으로 가야지, 어째서 대장을 찾아온 거죠?”
“장준검 천호가 나를 찾아가 보라 했다더군. 문무대 대원 중에 모산파의 전승자가 있다고.”
“설마 장 천호가 우리에 관한 정보를…?”
“그래, 믿기 힘든 이야기지. 한 가지 더 이상한 것은, 청보만이 아니라 나도 꼭 함께 와야 한다는구나.”
“어째서요?”
“여인에게 비술을 건 흉수를 찾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야. 역시나 장준검 천호가 나를 추천했다고 하고.”
“설마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죠?”
“믿지 않아. 분명 어떤 음모가 있을 거야. 그러니 더더욱 가볼 수밖에 없지.”
황궁에도 회귀한 혈승이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
그러니 삼황자와 관련된 음모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게 문무대의 임무인 것이다.
게다가 장준검의 이름이 이리 쉽게 거론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가 어떤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닐지….
“청보. 네 생각은 어때?”
“대장이 가는데 저도 당연히 가야죠. 신룡대회에서는 아무 역할도 못 했지만, 이번엔 저도 한몫하도록 할게요.”
* * *
동창의 일인자 병필태감 곽공공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이 여인 앞에선 좀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곽공공. 지금 내 수면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걸 잊은 거예요? 보고할 게 있으면 빨리 하도록 해요.”
“아, 송구합니다. 무림맹을 방문 중인 조철상에게서 전서구가 왔습니다. 강한월을 만났고,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모산파의 전승자라는 아이는?”
“위청보 역시 강한월과 함께 올 것입니다. 저 그런데… 위청보는 어떤 연유로 부르신 건지 여쭈어도 될런지요? 속하가 마마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서….”
곽공공이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귀빈의 눈 밖에 난 장준검을 구하기 위해 강한월을 희생양으로 삼을 계획이었던 것인데, 뜬금없이 무림맹에 있는 모산파의 전승자를 함께 불러오라는 명을 받은 것이었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호호, 궁금할 테지만 곽공공은 굳이 알 필요 없어요. 이 건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마마께서 직접 궁 밖으로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이런 작은 일에 내가 몸소 움직일 필요는 없겠죠. 내 대신 일을 처리할 자가 준비하고 있답니다.”
여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곽공공을 응시했다.
내 수하가 너 하나뿐인 줄 아느냐고 비웃는 것 같았고, 너무 많은 것을 알려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같았다.
“마마. 저 그런데….”
“걱정하지 마요, 곽공공. 그대의 말처럼 근래 장 천호의 잇따른 실패가 강한월에게서 기인한 게 맞다면, 대신 장 천호에겐 살길을 열어줄 테니.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