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침상 위의 경국지색 (1)
* * *
강한월이 북경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간단히 짐을 꾸리고 있을 때 유선이 찾아왔다.
“부탁할 게 있다.”
부탁?
자존심 강한 그녀의 입에선 좀처럼 나오기 힘든 단어.
“뭔데?”
“십만대산으로 돌아가겠어. 허락해 줘.”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한참 유선의 눈을 들여다보던 강한월이 물었다.
“충분히 생각한 거냐? 그곳에 가면 죽을 수도 있다. 천마께선….”
“알아. 용서받기 힘들 거란 걸. 하지만 가야 한다. 천마가 손을 썼더라도 신녀님을 완전히 회복시키진 못했을 거야. 내가 직접 해야 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마음을 정했나 보군.”
“뭐, 대충은. 혈승으로 살 생각은 없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남은 것은 천마신교의 유선으로 사는 건데… 신녀님께 그런 짓을 저지르고 어찌 살아갈 수 있겠어? 그러니 허락해 줘. 십만대산으로 돌아가서 신녀님을 치료하고 용서를 빌 수 있도록.”
유선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긍정적인 답을 들을 거란 기대가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강한월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라. 천마께 당할 형벌을 각오한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어.”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고맙다.”
“됐고. 광군영에게 지시해 놓을 테니 같이 출발하도록 해.”
“필요 없어. 혼자 갈 수 있다.”
“아니, 혼자서는 안 된다.”
“날 못 믿나? 다른 곳으로 도망갈까 걱정되면 차라리 내 몸에 금제를 가해.”
“그게 아니야. 네가 내공을 조금 얻었다지만 그 실력으론 신녀궁에 몸 성히 도착하기 힘들 거야. 앙심을 품은 마인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이 널 가만히 놔둘까?”
“훗, 이거 왜 이래? 나 유선이야.”
더 이상 자신을 미친개라 부르지 않는 그녀를 보고 강한월은 슬쩍 미소 지었다.
십만대산으로 가는 길은 분명 고난의 연속일 거였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새로운 생을 찾아가겠다면….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할 수 없군. 그럼 제갈에게 이야기해서 여비나 챙겨가도록 해. 아무리 대단한 유선이라도 밥은 먹어야 할 테니.”
“그건 사양하지 않겠다. 그런데… 끝까지 묻지 않는군?”
나머지 혈승들에 대해, 특히 자 혈승에 대해 왜 묻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글쎄… 왜 그럴까?
일단은 물어봐야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
유선이 전생의 삶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고 한들, 그게 과거 동료들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한월은 그녀를 취조함이 옳았다.
회귀자를 체포하고 처단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니까.
왜 유선을 다그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
어울리지 않게도 내게 측은지심이 생긴 건가?
“그들은 우리가 잡을 테니 넌 네 삶을 살아.”
* * *
지난밤, 눈물을 줄줄 흘리는 소영영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유선은 조용히 사라졌다.
오늘 아침엔 제갈윤이 입을 삐죽거리며 제갈세가로 출발했고.
이젠 강한월과 위청보의 차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는 대원들을 뒤로하고 길을 떠났다.
낙양 시내의 객잔에 도착하니 동창의 조철상이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강 소협, 기다리고 있었소. 아, 이분이 위청보 소협이군? 잘 오셨소이다.”
“저희는 준비되었으니 바로 출발하시죠.”
“그럽시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한시도 지체할 수 없지요.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드리겠소.”
마차는 북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초대한 입장에서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조철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 분은 아무것도 묻지를 않는군.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알아야 할 게 있으면 조 백호께서 어련히 말씀을 해주시려고요.”
“사람 태평하기는. 그곳에 도착하면 곧바로 활동을 시작해야 하니 지금 설명을 드리겠소.”
황실의 특급 비밀.
최고 권력층의 은밀한 사생활인 데다가 미녀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니 관심을 끌 만한 요소는 모두 갖춘 셈.
위청보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는 가운데 조철상이 설명을 시작했다.
황제의 여덟 아들 중 가장 주목받는 삼황자가 사랑에 빠졌다.
고관대작의 여식이었으면 만인의 축복 속에 혼례를 치를 수 있었겠지만, 상대는 비파를 타는 예인(藝人).
대권 경쟁이라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삼황자 입장에선 여인 문제로 입방에 오를 수는 없었으니, 황궁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저택에 여인을 머물게 하고 남몰래 사랑을 나눴는데.
어느 날부터 여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껏 돈과 권력으로 해결 못 한 일이 없었으니 명의와 영약으로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황실의 어의까지 은밀히 나섰음에도 치료는커녕 병명조차 밝히지 못했고, 여인은 침상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까지 악화되었다.
“전에 뵈었을 때 이미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흠흠, 계속 들어보시오. 이제부터가 중요한 내용이니.”
상심한 삼황자는 어의를 다그쳤다.
겁먹은 어의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느데, 이건 일반적인 병증이 아니며 마치 주술이나 저주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제법 그럴듯한 말.
삼황자는 즉시 동창에게 명령했다.
천하에 이름 높은 술사와 법사를 찾아오라고.
그런 연유로 세 명의 고명한 술사들이 초청받게 된 것이다.
“세 명이라고요? 위청보 외에 두 명이 더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여인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니 삼황자께서는 애가 타실 밖에. 누가 치료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으니 복수의 전문가를 초빙하는 게 옳은 일이지. 거부할 수 없는 추천이 있기도 했고.”
“나머지 두 분은 어떤 분들입니까?”
“실은 그게 골치 아픈 문제인데….”
동창이 삼황자에게 추천한 인물은 실은 위청보 한 명뿐이었다.
모산파의 전승자이니 실력은 의심할 바 없는 데다가 마침 북경과 가까운 낙양에 거주하니 금상첨화였다.
그런데 어디서 추천을 받았는지 삼황자 스스로 술사 한 명을 모셔왔다.
이름은 봉위선.
동창이 방대한 정보망을 가동해 알아보았지만 어디서 무얼 하던 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삼황자가 직접 선택한 자이니 동창은 따를 수밖에.
그리고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아우가 용한 술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황태자가 사람 한 명을 보내온 것이다.
박위라는 고려 출신 술사였다.
삼황자는 당황했고, 한편으론 분노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병든 상황을 이용해 황태자가 자신의 약점을 잡으려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놓고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불똥은 동창에 떨어졌다.
위청보를 빨리 데려와라.
박위가 허튼 수작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비하라.
여인에게 주술을 건 흉수를 잡고 반드시 그 배경을 밝혀내라.
삼황자의 엄명은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휴우 어쩌다가 내가 이 일을 맡아가지고… 근래에는 소화도 잘 안 되고 잠도 편히 못 자고 있소.”
“차기 황권의 승계가 가장 유력하다는 삼황자이다 보니 더 신경이 쓰이겠군요.”
“어허 큰일 날 소리.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오!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의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건의 배후는 짐작이 가십니까? 동창의 수사력이라면 뭔가 찾아내셨을 것 같은데요?”
“그게 애매하오. 황태자를 비롯해서 삼황자를 적대시하는 세력이야 많지만, 그렇다고 여인을 죽일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삼황자가 여인의 치마폭에 쌓여 망가져 가는 게 더 좋을 테니까.”
“그렇다면 삼황자를 흠모하는 다른 여인이 질투심에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역시 강 소협은 예리하군. 하지만 우리 판단으로는 그건 아니오. 이 여인 이전에 삼황자는 다른 어떤 여인에게도 눈길을 준 적이 없소. 그러니 죽이고 싶을 만큼 질투심을 느낄 다른 여자는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강한월은 잠시 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육감은 분명 혈승의 그림자를 떠올리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개입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삼황자의 배후?
혹시 황태자와 한편을 이룬 건가?
그도 아니면…?
“강 소협과 위 소협도 이제 아시겠죠? 이건 경쟁이요. 여인을 치료하는 쪽이 승리하는 승부라는 말입니다. 엄청난 포상이 있을 거고, 그보다 더 큰 혜택은 향후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삼황자의 절대적 지지를 얻게 될 거요.”
“그 반대일 수도 있지요. 자칫하다간 황태자의 눈 밖에 나게 될 테니까요.”
“인정하오. 그렇기에 두 분께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소. 하지만 어쩌겠소? 황실의 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걸. 줄 한 번 잘못 서면 모가지가 날아가는 게 황궁의 삶이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듯 조철상이 낄낄댔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서.
순간 강한월은 장준검을 떠올렸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중대한 사건에 어째서 최고의 인재를 투입하지 않은 걸까?
* * *
마차가 북경에 들어섰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고관대작들의 저택을 지나 외곽으로 한참을 더 달리자, 매우 아름다운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착했소. 지금부터는 각별히 언행에 주의해 주시오.”
조철상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돌았다.
동창에서 잔뼈가 굵은 그조차도 삼황자가 주는 압박감은 견디기 힘든 듯했다.
마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는 동안 강한월은 기감을 퍼뜨려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곳곳에 은신해 있는 자들이 느껴졌다.
인원은 많지 않으나 제법 실력 있는 고수들 같았다.
“조 백호. 주변에 있는 무사들은…?”
“절반은 우리 동창이고 나머지는 삼황자 저하의 직속 호위대요.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편할 거요.”
동창이 맡은 임무에 호위대가 함께 투입되었다?
삼황자는 동창을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
“자, 여기가 강 소협과 위 소협이 머물 전각이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시비를 부르시고.”
“감사합니다. 그보다…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만.”
“오늘 밤 삼황자께서 오실 테니 그분께 인사를 올린 후 일 이야기를 합시다. 일단 짐을 풀고 쉬고 계시오.”
조철상은 전각을 떠났다.
강한월과 위청보는 먼 길을 오느라 구겨진 옷을 벗고 새 장포를 꺼내 입었다.
시비가 가져다준 차향이 그윽하니 잠시 여유로운 시간.
“대장. 출발할 땐 별생각 없었지만 지금은 좀 으스스한데요? 이거 조금만 잘못해도 역적으로 몰려서 목이 댕강 날아가는 건 아닐지….”
강한월은 피식 웃었다.
위청보의 말이 황당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오히려 위청보를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
물론 어떤 경우에도 이들에게 곱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청보 네 역할만 충실히 하면 돼.”
“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대장이 있는데 제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어쨌거나 잘 온 것 같아요. 좀 흥분되기도 하고. 다른 술법사들의 실력은 어떨지 궁금하거든요. 게다가 고려에서 온 분도 있다니. 동방의 술법이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예전에 사부님이 입이 마르게 칭찬을….”
“그렇게 궁금하니?”
“당연하죠. 무림 고수들이 새외의 무공에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그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지.”
“네?”
강한월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전각 담장 밖을 향해 말했다.
“저희는 한가히 차를 마시던 중이니 들어오셔서 함께 하시지요.”
“하하하,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방해를 할 수야 없지요.”
담장 밖에서 누군가가 대답했다.
웃긴 것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당당히 문 안으로 걸어 들어와 다탁 앞에 앉았다는 것.
싱글싱글 웃는 중년의 사내였다.
장포의 모양이 중원의 것과는 다른 것이 아마도 이 자가….
“반갑소이다. 난 박위라고 합니다.”
“우리 말을 잘하시는군요. 저는 강한월이라 하고 여기는 제 동료인 위청보입니다.”
“내 역마살이 있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보니 자연스레 말도 배웠지요. 여튼 잘 오셨소. 나 혼자 여기서 달포째 지내다 보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혼났소이다. 여기 무사들은 다들 벙어리인지 입을 열지 않으니. 허 참.”
황태자가 직접 보낸 고려의 술사 박위.
다른 건 몰라도 넉살과 붙임성은 좋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