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침상 위의 경국지색 (2)
* * *
북경은 날씨가 어떻네, 음식은 입에 안 맞네….
개구쟁이처럼 눈알을 굴리며 수다를 떠는 박위의 모습은 마실 나온 동네 아저씨의 모습 딱 그것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직접 파견한 인물이 그렇게 실없는 사람일 수는 없는 법.
“박 도사님. 다른 하실 말씀은 없으신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강한월의 질문에 박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사람 참 직선적이기는. 첫 만남에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겠소? 그냥 어떤 사람들인가 궁금해서 와 본 거지.”
“보시니 어떻습니까?”
“강 소협이 엄청난 고수인 건 알겠고 위 소협이 대단한 술사라는 것도 느낌이 오는데, 딱 그뿐이지 뭐. 난 사람을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 같은 건 없거든. 같은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소.”
같은 편.
듣기에 따라서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저도 궁금한 것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곳에 오신 지 보름이 지났다고 하셨는데,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만나보셨겠지요?”
“엥? 벌써 일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요? 사람 참 급하기는. 십 일 전쯤 삼황자가 이곳에 들리셨을 때 여인을 만나보기는 했소. 아주 잠깐이었지만.”
“치료법은 찾으셨습니까?”
“잠깐 얼굴만 본 건데 치료법은 무슨. 그리고 중요한 것은 치료법이 아니기도 하고….”
“중요하지 않다니요?”
박위가 다시 개구쟁이처럼 눈을 굴렸다.
“여기 위 소협도 있고 삼황자가 직접 초빙한 전문가도 온다고 하고, 치료법이야 누가 찾던 결국엔 찾지 않겠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여인을 치료할 필요가 있느냐는 건데….”
삼황자가 들었으면 당장 목이 날아갈 말.
강한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치료할 필요가 있는지를 저희가 판단해야 한다고요? 어째서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한단 말입니까?”
“하하, 표정 푸시오. 나중에 강 소협 스스로 알게 될 테니. 아까 말했지 않소? 우리가 같은 편이 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다고. 첫 만남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조만간 또 봅시다.”
박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 미소의 의미를 곰곰이 곱씹던 강한월이 위청보에게 물었다.
“저 박위라는 사람, 어떤 것 같아?”
“헤헤, 제가 뭐 본다고 아나요?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을 보니 음흉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대단한 술사인 것은 틀림없어요.”
“어째서?”
“고려에서 왔다잖아요. 모산파의 큰 사부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고려, 거긴 신선의 땅이라고.”
“그게 다야?”
평가의 근거치고는 황당한 것이어서 강한월은 피식 웃었다.
위청보도 따라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헤헤, 그것만은 아니고… 이거 보세요.”
그건 술법을 펼칠 때 쓰는 작은 청동 방울이었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이번 임무는 제 역할이 중요할 것 같아 저도 이것저것 좀 챙겨왔어요. 이 팔주원령(八柱怨靈)은 저희 모산파의 보물인데, 영성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에 신기(神氣)가 강한 자가 나타나면 스스로 소리를 울리죠. 물론 제 귀에만 들리는 특수한 소리지만.”
“박위가 왔을 때 이 방울이 울린 거구나?”
“아뇨.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더라고요.”
도대체가… 설마 농담을 하는 건가?
강한월은 마시던 찻잔을 입에 댄 채로 위청보를 노려봤다.
“대장. 이 팔주원령이 원래 무슨 색인지 아세요? 검붉은색이에요. 근데 지금은 푸르죽죽한 색으로 변했잖아요. 방울에 깃든 영성이 박위의 기세에 눌려 퍼렇게 질린 거라고요. 스스로 울지도 못할 정도로요.”
위청보의 표정은 진지했다.
무공은 한참 떨어지지만, 위청보는 술법에 대해서만큼은 이미 경지에 오른 자.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하니 강한월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 박위가 말했죠. 같은 편이 될 수 있을지 보자고. 전 그와 같은 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워야 한다면… 골치 꽤나 아플 거예요.”
* * *
그날 밤.
삼황자가 장원에 왔다.
강한월과 위청보는 조철상의 안내를 받아 삼황자를 알현하러 갔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과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만, 그래도 말과 행동에 각별히 유의해 주시오.”
삼황자는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평범한 장포를 걸치고 달빛 아래 서 있는 남자.
나이는 강한월과 비슷해 보였는데, 대권을 꿈꾸는 자답지 않게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동창 이형백호 조철상이 삼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조 백호는 예를 거두게. 황자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님을 알지 않나?”
손을 들어 무릎을 꿇는 조철상을 제지한 삼황자가 강한월과 위청보에게 눈길을 보냈다.
“무림맹 무사 강한월과 위청보가 삼황자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연매를 치료하러 온 술법사와 무사가 그대들이로군. 내 솔직히 동창은 믿지를 못해. 실력은 좋지만 방법이 과할 때가 많고, 충심은 있으나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헷갈려서 말이지. 하지만 자네들은 장준검이 추천했다고 하니… 기대가 크네. 잘 오셨네.”
장준검을 언급할 때 삼황자의 눈빛이 따뜻하게 변하는 걸 강한월은 놓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가지고는 부족해. 성과가 있어야 할 거야. 시간이 많지 않네.”
담담히 내뱉은 말이었지만 황자의 말은 역시 무게가 달랐다.
심한 중압감을 이기기 힘들어 위청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지금 당장 연매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게. 그리고 내일부터 치료를 시작하도록. 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른 술법사들이 함께 할 것이야. 내일 내가 초빙한 자가 도착할 거고,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는 자도 있다네.”
* * *
삼황자가 연매라 부르는 여인.
그녀가 머무는 전각은 장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익숙한 걸음으로 길을 안내한 조철상이 전각 앞 십여 장 거리에서 멈췄다.
“강 소협과 나는 이 이상 접근할 수 없소. 치료를 담당할 위 소협만 들어갈 수 있소이다.”
“황실의 법도인가요?”
“그렇다기보다는… 삼황자께서 다른 남자가 출입하는 걸 원치 않으시오. 의원과 술법사만 예외인 거요.”
조철상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전각 안에서 시녀 한 명이 달려왔다.
미리 언질이 있었던 듯, 시녀는 곧바로 위청보를 향해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대장과 떨어져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규정이 그렇다니….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떼는 위청보의 귀에 강한월의 당부가 들려왔다.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 없다. 인사만 드리고 온다고 생각해.”
그게 말처럼 쉽냐고요?
삼황자가 아까 그렇게 부담을 줬는데….
속으로 투덜대며 시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방문 앞.
코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향기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늦은 밤 여인의 침소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두근대는 심장.
스르륵 시녀가 문을 열었고, 위청보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가 은은한 빛을 뿌리는 방 안.
넓은 침상에 여인이 누워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병 때문인지, 여인은 누군가 들어온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자석에 이끌리듯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선 위청보.
침상 위의 여인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 위청보가 방에 들어간 사이 강한월은 기감을 넓게 퍼뜨려 주변을 살폈다.
전각의 경비 태세를 확인하려는 것인데….
정원 주변에 은신한 무사들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정작 전각 내부와 지붕에서는 아무런 경계가 포착되지 않았다.
“조 백호님. 이곳을 지키는 무사가 이것뿐입니까?”
“역시 알아채셨군. 강 소협이 보기에도 좀 허술하지요? 어쩔 수 없다오. 삼황자께서 남자 무사들의 근접 경호를 허락지 않으시니까. 동창에 환관 고수들이 있으니 그들을 투입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그 역시 거부하셨소.”
강한월은 조철상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이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유추해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혈승의 그림자가 어디로 드리워졌는지.
삼황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위청보가 돌아왔다.
복잡한 표정을 지을 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놀라고 당황한 듯했고 얼핏 상기된 것도 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는 조철상.
“자 이제 돌아갑시다. 오늘 밤은 푹 쉬시오.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
* * *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위청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자 참지 못한 강한월이 물었다.
“청보. 왜 그렇게 말이 없어? 여인은 잘 만나본 거야?”
“대장. 이번 일 반드시 성공해야겠어요.”
뜬금없는 대답.
강한월의 미간이 깊어졌다.
“무슨 뜻이야?”
“그 여인 너무 불쌍해요. 이렇게 병들어 누워있을 여인이 아닌데… 잠에서 깨지도 못하고 누워서 신음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더라고요.”
위청보가 선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측은지심 또한 남보다 크겠지.
하지만… 말도 나눠보지 못한 여인을 이렇게까지 생각한다고?
“그 여인… 미인이더냐?”
“미인이냐고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네, 미인이더군요. 대단한 미인이었어요. 완연한 병색조차도 가리지 못하는 아름다움. 하아, 왜 삼황자가 그녀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요.”
그녀의 모습을 되새기기라도 하는 듯 멍해지는 위청보의 눈빛.
그 정도로 미인이라고?
아까 따라 들어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지는 강한월이었다.
* * *
상사병이라도 앓듯 홀로 얼굴을 붉히다가 위청보가 잠이 들자, 강한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증을 풀지 못하면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연매라는 여인,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강한월은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경비 무사들의 위치는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 그의 실력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여인을 보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인 후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삼황자가 여인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발길이 향한 곳은 바로 옆 숙소.
방 앞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강 소협 어서 오시오. 안 그래도 혼자 적적했는데.”
“박 도사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올 걸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그럴 리가요. 내가 뭐 점쟁이도 아니고. 다만 강 소협이 잠을 못 이룰 수도 있겠다 생각한 것뿐이라오. 오늘 그 여인을 봤다면 말이오.”
박위는 여전히 능청스러웠지만 그 눈빛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겁니다.”
“하하하, 야밤에 나누기엔 여인 이야기만 한 것이 없지요. 특히 그 여인이 미녀라면 더더욱.”
“저희 부대에는 여성 대원이 몇 명 있습니다.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까지는 말 못 하겠습니다만, 한 명 한 명이 보기 드문 미녀인 것은 사실입니다. 위청보는 그런 미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요.”
“오호, 이제 보니 위 소협은 복 받은 청춘이군. 계속해 보시오.”
“아까 여인을 보고 온 후 위청보의 상태가 이상했습니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본 것처럼.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영, 가린, 심지어 유선까지… 대단한 미녀들 틈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럴까? 그녀는 다른 미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말인가? 정말로 전설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도 된다는 걸까…?”
“직접 본 내 의견을 묻고 싶은 거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것일까?
박위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그렇습니다. 박 도사님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경국지색이 맞습니까?”
“맞소.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역시 그랬구나.
예상은 했지만, 박위가 다시 확인을 해주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몹쓸 병에 걸린 불쌍한 여인.
그 여인은 … 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