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침상 위의 경국지색 (3)
* * *
강한월 때문에 위청보는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다짜고짜 찬물로 목욕을 하게 하더니, 이어서 운기행공이라니….
“대장. 갑자기 운기행공은 왜 하라는…?”
강한월은 아무 설명 없이 정좌한 위청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번쩍.
강한월의 손에서 금빛이 퍼지며 위청보의 천령개를 통해 몸으로 파고들었다.
머릿속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화한 느낌.
대장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한 위청보는 얼른 대주천 운기를 시작했다.
상단전에서 중단전을 거쳐 하단전으로.
강한월의 금강부동신공의 내력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간 후에야 운기를 멈출 수 있었다.
“청보. 혹시 주박이나 섭혼의 공격을 막아주는 부적이 있나?”
“당연히 있지요. 적들과 대결하게 되면 쓰려고 잘 보관하고 있는데요.”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당장 부적을 써야 해.”
강한월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위청보는 감히 되물을 생각을 못 하고 부적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알 수 없는 문자 수천 개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부적.
“이게 효능이 삼 일이라. 미리 발동을 시키면 나중엔 쓸모가 없어질 수도….”
“당장.”
위청보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적을 심장 어귀에 붙이고 수결을 짚으며 발동어를 외웠다.
“됐어요. 이제 설명 좀 해주시죠.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그 여인 때문이다. 어제 네가 만나본 여인.”
“그 여인이 왜요?”
강한월은 위청보가 여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눈빛이나 목소리는 모두 정상.
파사의 능력을 가진 금강부동신공으로 기맥을 씻어내고 부적을 붙인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청보야. 경국지색이란 말을 알지?”
“당연히 알죠. 나라를 망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말이잖아요. 달기(妲己), 양귀비(楊貴妃), 서시(西施) 같은….”
“맞아. 그런데 정말로 그 여인들은 다른 미녀들보다 백배 천배 더 아름다웠을까? 그녀들에게 홀려서 나라를 망친 왕들 주변엔 다른 미녀들도 많았을 텐데, 왜 유독 그녀들에게만 집착했던 걸까?”
“그러게요?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얼굴이 아무리 예뻐 봐야 한계가 있을 텐데… 아!”
“너도 이제 알겠지? 난 경국지색이라 불린 여인들은 미염술(美艶術)이나 환락공(歡樂功) 같은 색공(色功)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혹시… 제가 어제 색공에 걸렸던 건가요?”
위청보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제 일을 생각해봤으나 머릿속이 멍해질 뿐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니 강한월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
미안(美顔)을 매개로 한 섭혼 계열의 비술에 걸렸던 것이 분명했다.
“잠들어 있는 얼굴 한번 보는 것으로 술법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그녀는 대단한 경지의 색공을 익힌 게 틀림없어. 삼황자에게 접근한 것도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었을 거야.”
“박위 도사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그녀를 치료할 필요가 있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매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황실을 걱정해준 말이었군요.”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아직은 박위를 믿어서는 안 되고.”
이곳에 오기 전 강한월은 생각했었다.
여인에게 비술을 걸어 아프게 만든 자는 황실에 숨어있는 혈승일 거라고.
하지만 여인이 색공을 익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인에게 색공을 익히게 해 삼황자에게 접근시킨 것이 혈승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인을 병들게 한 자는 또 누굴까?
혹시 삼황자와 경쟁하고 있는 황태자인가?
하지만 어째서…?
황태자 입장에서는 삼황자가 색공에 빠져 폐인이 된다면 자신에게 더 유리할 텐데.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대장. 앞으로 우린 어떡해야 하는 거죠?”
“조금 더 지켜보자고. 일단은 저들의 장단에 맞춰주면서.”
* * *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삼황자의 호출이 왔다.
세번째 술법사가 도착했으니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채비를 갖추고 숙소를 나서다 박위를 만났다.
그 역시 삼황자의 호출을 받았던 것.
“이거 꽤나 기대되는군. 새로 온 술법사는 어떤 사람일까?”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박위가 화제를 꺼냈다.
“짐작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전혀. 내가 황태자 쪽 사람이라 그런지 아무 정보도 안 줍디다. 그저 추측하자면 위 소협은 중원을 대표하는 모산파 출신이고, 난 동쪽 고려에서 왔으니… 아마도 새로 온 사람은 서쪽의 술법사가 아닐까 싶은데?”
“서쪽이라면…?”
“천축이나 서장. 그쪽 비술도 나름 유명하니까.”
강한월의 착각이었을까?
천축과 서장을 말할 때 박위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뭔가를 암시하는 걸 수도 있었기에 조금 더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러는 사이 이미 삼황자의 전각에 도착했다.
“들어갑시다. 직접 보면 궁금증이 풀리겠지.”
앞장서는 박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삼황자는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은 연약해 보이는 온화한 인상의 사내였는데, 전형적인 중원인의 얼굴에 흔한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서쪽에서 온 술법사일 거라는 박위의 추측이 틀린 건가?
하지만 위청보의 생각은 달랐다.
주술의 도구로 보이는 팔찌와 목걸이는 천축 베다의 양식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서들 오시게. 이 분은 전에도 본 황자를 도와준 적이 있으신 봉위선 도사이시네. 인사들 나누시게.”
삼황자는 강한월과 박위에겐 하대하면서도 봉위선에겐 반 공대를 하고 있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박위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봉 도사시군요. 난 박위라고 합니다. 함께 잘해봅시다.”
“반갑습니다.”
봉위선은 웃으며 답했고 강한월, 위청보와도 목례로 인사를 마쳤다.
“시간이 없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본 황자가 황실을 비울 수 있는 시간은 단 삼 일뿐이네. 그러니 앞으로 삼 일 안에 연 매의 치료가 끝나야 한다. 가능하겠는가?”
누구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삼황자의 표정에 노기가 깃들려 하자 봉위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황자님. 저희 모두 최선을 다할 것이니 연 소저는 분명 완쾌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며칠이 걸릴지 알려면 우선 병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는 소저의 병을 분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지요.”
“휴우, 알겠소. 봉 도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내 믿어 보겠소.”
“맡겨 주십시오.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봉위선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삼황자가 이번엔 강한월을 향해 말했다.
“강한월, 자네의 역할은 알고 있겠지? 동창 조 백호와 협력하여 연 매를 아프게 한 흉수를 밝혀내라.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줄 테니.”
마지막 말을 할 때 삼황자의 눈길이 박위를 향했다.
제법 싸늘한 눈빛이었기에 박위는 쓴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두 차례 더 당부의 말을 남기고 삼황자가 자리를 떴다.
이제는 전문가들의 시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봉위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 도사님, 위 소협. 제가 삼황자님과 친분이 좀 있다고 해서 혼자 일을 주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두 분도 기탄없이 의견을 주세요. 각자의 주특기가 있을 테니까요.”
“염려 마시오. 밥만 축내고 있진 않을 테니. 어서 연 소저를 살펴보러 갑시다. 전에는 잠깐 얼굴만 본 거라 아무런 확인도 하지 못했으니.”
박위, 봉위선, 위청보는 여인을 진찰하러 갔다.
대청에 남은 것은 강한월과 조철상 둘뿐.
“휴우, 이것 참 답답하군. 흉수를 잡으라고 삼황자께서 명하셨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강 소협의 생각은 어떻소?”
“동창에서도 단서를 못 잡았는데 저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방법을 찾아야만 하오. 만약 술법사들이 연 소저의 병을 치료하고 나면, 이후엔 삼황자의 관심이 범인 색출에 쏠릴 거고 당연히 불똥이 우리에게 튈 거요.”
“기다려 보시죠. 적들이 연 소저의 치유를 원치 않는다면 분명 뭔가 행동을 취할 것이고, 그때 기회가 생길 겁니다.”
“적들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건 여기에 그들의 첩자가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상식적으로… 그게 맞지 않겠습니까?”
* * *
은은한 향기가 퍼지는 방 안.
세 명의 술법사들이 여인이 잠들어 있는 침상을 둘러싸고 섰다.
이 여인이구나.
지금에서야 위청보는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인 것은 분명하지만, 부적의 도움을 받아서인지 어제처럼 묘한 감정이 일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봉위선이 여러 개의 팔찌 중 하나를 풀더니 여인의 이마에 얹었다.
아마도 술법이나 저주를 파악하는 효능이 있는 보물인 듯했다.
“봉 도사께서 나서셨으니 그럼 나도….”
박위가 품속에서 대나무 조각을 꺼내어 손에 쥐더니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거 나도 뭐라도 해야겠는걸.
눈치를 살피던 위청보가 누런 부적을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화르륵 불길이 일며 뽀얀 연기로 변하더니 여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여인의 코에서 연기가 빠져나오더니 위청보에게로 날아와 머리 주변을 몇 바퀴 휘돌더니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어서 봉위선이 여인의 머리에 얹었던 팔찌를 회수했고, 박위도 대나무 조각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박 도사님과 위 소협은 성과가 있었습니까?”
“뭔가 감이 잡히긴 했는데 아직은 말하기 조심스럽군.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하겠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선 각자 숙소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한 시진 후에 다시 만나 상의하도록 하지요. 여기서 연 소저의 안정을 방해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 * *
위청보와 박위의 숙소는 같은 방향이라 봉위선과 헤어진 후 잠시 같이 걸었다.
“박 도사님. 존경합니다. 아까의 모습 대단하시더라고요.”
“어? 뭐가?”
“연 소저의 상태를 확인한 방법이요. 제 연기나 봉 도사의 팔찌는 연 소저의 신체에 접촉했어야만 했는데, 박 도사님은 접촉 없이 주문을 외우시는 것만으로….”
“하하하, 난 또 뭐라고. 감탄할 필요 없네. 난 아까 연 소저의 상태를 확인한 게 아니거든. 그러니 신체에 기물을 접촉시킬 필요도 없었지.”
“네에? 그럼 뭐 하셨던 건데요? 분명 박 도사님 주변으로 상당한 영력이 솟아나던데…?”
“방어를 한 거다. 혹시라도 우리가 술법에 집중하는 사이 뜻밖의 공격이 있을지도 몰라서 말이야. 위 소협 자네도 내가 함께 보호했다네. 뭐 고마워할 필요까진 없고.”
도대체 누구로부터 지켜줬다는 말일까?
그 방에는 여인과 술법사 셋 밖에는 없었는데….
“그나저나 자네 뭐 좀 알아낸 게 있나?”
“약간요. 근데 아직 애매해요. 전 여인의 몸에 최소한 두 개의 주술이 걸려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찾지 못했어요. 제가 쓴 모산파의 영조연(靈取煙)은 웬만한 건 다 찾아내는데….”
“그래? 그럼 하나가 맞나 보지. 한가지 조언을 하자면 너무 술법에 의존하려고 하지 말게.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힘은 술법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나오는 거니까.”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박위가 말했다.
* * *
“대장, 저 다녀왔어요.”
“수고했다. 박위와 봉위선은 어떻든?”
“여인에게 걸린 주술을 파악하러 간 건데, 엉뚱한 걸 물어보시네요?”
“주술엔 별 관심 없다. 오히려 사람이 문제인 거지.”
“흠. 좀 전에 박위 도사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위청보는 여인을 보러 갔던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오는 길에 박위와 나눈 대화까지.
“제가 보기엔 봉위선은 좋은 사람 같아요. 말도 부드럽게 하고. 박위 도사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요. 대장이 보기엔 어때요? 봉위선과 박위, 누가 더 의심스럽나요?”
“난 둘 다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