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83화 (83/210)

083화. 비술 대결 (1)

* * *

한 시진 후.

술법사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다른 할 일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강한월도 함께했다.

“쉬면서 나름 분석을 해보셨겠지요?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봉위선의 눈길이 박위를 향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성과가 없어 부끄러웠는지, 박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연 소저가 당한 주술이 뭔지 밝혀내지 못했소. 아무래도 고려의 술법과는 결이 다른 것 같더이다.”

“그런가요? 박 도사께 기대가 컸는데 아쉽네요. 그럼 박 도사께서는 나중에 치료할 때 힘을 보태주시길 바라고… 이번엔 위 소협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만?”

봉위선이 위청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걸 어쩐다…?

실은 이곳으로 오기 전 강한월의 지시가 있었는데, 위청보 자신이 알아낸 것은 함구하고 봉위선의 의견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위가 먼저 선수를 치고 손을 들어버리자 위청보의 입장이 난처했다.

나까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면 너무 티가 나려나?

“저기… 그러니까… 특별히 말씀드릴 내용은 없는데….”

“없다고요? 아까 보니 모산파의 상급 부적을 써서 영조연을 피우는 것 같던데, 설마 그 영험한 연기를 쓰고도 알아낸 것이 없단 말입니까?”

이런… 봉위선이 모산파의 비술에 대해서도 해박하다니.

더욱 난처해진 위청보가 강한월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요 알아낸 게 없다기보다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라 말씀을 드리기가 뭐 해서요.”

“그래요? 그 앞뒤 안 맞는 내용이 뭔지 내가 한번 맞춰볼까요?”

봉위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위청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위 소협은 아마도 연 소저가 색공을 익혔다고 생각했을 거요. 상식을 뛰어넘는 미모, 자연스레 발산되는 엄청난 염기(艶氣). 보통의 미녀들과는 분명히 다르니까. 그리고 지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으니 저주와 발병의 주술에도 걸렸다고 봤겠지. 그러니 이 두 가지 술법의 흔적이 찾아져야 맞는데… 위 소협은 한 가지밖에 찾지 못했을 거요.”

위청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술법사가 아니라 수사관으로 직업을 바꿔도 되겠는걸?

주술보다는 결국 머리라는 박위의 충고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위 소협이 주저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스스로 헷갈리기도 하고, 삼황자의 여인이 색공을 익혔다는 말을 입에 담기도 어려웠겠죠. 하지만….”

봉위선은 박위와 위청보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며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색공에 대해선 더 이상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제가 파악한 내용을 말씀드리죠.”

시큰둥했던 박위마저 표정을 바꿨고, 강한월도 바짝 귀를 기울였다.

봉위선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긴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사실 박 도사나 위 소협이 밝혀내기는 어려운 문제였어요. 왜냐하면 천축의 전승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죠. 연 소저는 매우 특이한 체질을 타고났는데, 빠르바티의 혈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대로 빠르바티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은 남성을 환희로 이끄는 거부할 수 없는 염기를 발산한다고 알려져 있죠.”

“연 소저의 색기(色氣)가 색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체질이라는 겁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약 그 기운이 색공에 의한 것이라면 단전에서부터 뿜어져 나와야 하는데, 제가 살펴본 바로는 단전이 아니라 핏속에 잠재되어 있었어요.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타고난 혈맥의 힘이라는 뜻이죠.”

피, 혈맥.

강한월로서는 강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단어들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표정이 굳어졌고, 그 뜻을 다르게 이해한 봉위선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 압니다. 혈맥의 전승은 중원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니까요. 어쨌든 저는 확신합니다. 연 소저의 몸속에 빠르바티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모습 어디에도 천축인의 생김새는 없지요. 이건 혈맥의 힘이 매우 미미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마도 먼 조상 중 누군가가 천축인과 결혼한 적이 있을 뿐이고, 대를 내려오면서 혈맥의 힘은 끊임없이 희석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는 일반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었죠. 누군가의 주술에 당하기 전까지는….”

“술법에 공격당한 것은 맞다는 겁니까?”

“그래요. 아주 교묘한 공격에 당했죠. 몸을 병들게 하는 저주의 술법을 찾아봤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흉수가 펼친 술법은 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혈맥의 힘을 활성화시키는 주술이기 때문이죠. 갑자기 발현된 내부의 거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사경을 헤매게 된 겁니다.”

매우 신비롭고도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천축의 전승에 해박한 봉위선이 내린 결론이니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병의 원인은 그렇다 치고, 치료법은 무엇이오?”

봉위선의 실력에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일까, 박위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혈맥의 힘을 봉해버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울 겁니다. 유일한 방법은 혈맥을 활성화시킨 주술을 소멸시키는 거죠. 대략의 방법은 제가 구상해 놓았는데, 박 도사님과 위 소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돕겠소.”

“저도… 당연히….”

봉위선은 미소를 띄우며 감사를 표했다.

“술법은 음기(陰氣)가 충만해지는 오늘 밤 자시(子時)에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그사이 삼황자께 보고를 드릴 테니, 두 분은 휴식을 취하면서 법력을 보충해주세요. 아, 그리고 이따 오실 때 가지고 계신 술법 법기를 모두 가져와 주세요. 활용할 수 있는 보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 확률이 올라갈 테니까요.”

* * *

숙소로 돌아가는 길.

웬일로 박위가 말이 없었다.

머리가 복잡한 듯 먼 산을 보며 걷던 박위는 숙소에 거의 다 와서야 입을 열었다.

“강 소협과 위 소협의 생각은 어떻소? 오늘 밤 봉위선의 술법에 협조할 거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불려 온 이유가 그것이니.”

박위는 발걸음을 멈추고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되었으니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섣부른 감이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 묻지 않을 수 없군. 전에 내가 했던 말, 우리가 같은 편이 될 수 있겠냐는… 그 답을 지금 들을 수 있겠소?”

“황태자의 편에 설지 삼황자의 편에 설지 물으시는 거라면, 전 어떤 답도 드릴 수 없습니다.”

“선과 악 중에 고르라면?”

“봉위선이 악이라는 말씀입니까? 어떤 근거로…?”

“휴우. 그냥 답답해서 해 본 말이오. 강 소협이 아직 나를 믿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 꼭 부탁드릴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오늘 밤 강 소협은 숙소 안에 머물렀으면 하오. 술법은 우리에게 맡기고 방 안에 가만히 계시오.”

* * *

봉위선의 보고를 받는 삼황자의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여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 흉수에 대한 분노, 봉위선의 활약에 대한 기대가 번갈아 나타났는데, 무엇보다 격하게 표출된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내 명색이 황자이면서 지금껏 연 매의 고통을 넋 놓고 보고만 있었다니.”

“병의 원인을 밝혔고 치료할 자신도 있으니 이제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감사하오. 봉 도사가 없었으면 평생의 한이 될 뻔했소. 내 이 은혜는 결코….”

“은혜라니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그보다도… 삼황자님과 연 소저의 앞날을 위해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위해? 어서 말씀해보시오. 내 경청하리다.”

자연스레 여인과의 행복한 미래가 떠올라 삼황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번 사건은 제가 술법을 써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어떤 문제입니까?”

“오늘 밤 제가 억눌러 놓겠습니다만, 한번 활성화된 빠르바티의 혈맥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혈맥의 힘이 남아 있다면 향후 연 소저를 본 모든 남자들이 연정을 느끼게 될 텐데… 허허, 연 소저께 욕정을 느끼는 남자들이 늘어나면 삼황자께서도 마음이 편치는 않으실 것 같아….”

“어느 놈이 감히 연 매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말이오! 감히 나의 연인에게…!”

예상대로 삼황자는 폭발했다.

찻잔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 같았다.

“진정하시지요. 연 소저의 잘못도 아니고 사내들의 잘못도 아닙니다. 다만 혈맥을 타고났기 때문일 뿐.”

“하지만….”

“삼황자님. 설마 제가 해결책도 없이 이런 말씀을 드렸겠습니까?”

해결책.

마법 같은 단어였다.

삼황자는 즉시 흥분을 멈추고 봉위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은 무리한 방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두 분의 앞날을 위한 완벽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봉위선은 차분한 목소리로 방법을 설명했다.

문제의 원인, 해결책, 그 후의 효과.

처음엔 약간 눈살을 찌푸리던 삼황자도 마지막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놀랍구려. 그런 방법이 있다니. 게다가 얻게 될 장점이 그토록 뛰어날 줄은….”

“네. 화를 돌이켜 복으로 만드는 방법이지요. 다만 실행 방법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라도 삼황자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제가 다른 해결책을 모색해….”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난 이 해결책이 아주 마음에 드오. 무엇보다 나와 연 매가 진정으로 한 몸으로 거듭나게 될 텐데 마다할 이유가 없소이다.”

“삼황자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그럼 오늘 밤은 연 소저의 치료에 집중하도록 하고, 내일 밤 이 해결책을 시행하도록 하지요.”

“좋소. 내일이 기대되는군. 하하하.”

수개월 만에 처음으로 삼황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군의 행복이 곧 그의 행복인 듯, 봉위선도 함께 웃었다.

* * *

어스름했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위청보는 주섬주섬 물건을 늘어놓고 고민에 빠졌다.

“대장, 정말 이것들을 전부 가져가야 할까요?”

“비술 도구에 대해선 내가 아는 게 없으니 뭐라 말을 못 하겠구나. 필요할지 아닐지 모르겠다면 일단 가져가 보는 게 어때?”

“그렇기는 한데… 이 중 몇몇은 정말 귀한 물건이거든요.”

위청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건들을 바라봤다.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부적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산파의 보물들.

믿기는 힘들지만 팔주원령(八柱怨靈)은 삼황오제 시대의 물건이라 하고, 청동거울 조화경(造化鏡)은 모산파의 개파조사께서 구천 팔귀를 굴복시키는 데 사용했다던 물건.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으니 위청보가 남 앞에 꺼내 놓기 꺼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물건들을 건네주며 부들부들 떨던 큰 사부의 모습도 떠올랐고.

“청보야. 보물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필요할 때 쓸 수 없으면 소용이 없는 거야.”

“저도 알아요. 그래도 다 가져가긴 싫고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갈 생각인데, 뭐가 필요한지를 모르겠으니….”

“봉위선이 펼칠 술법이 어떤 건지 모르니까 고민인 거지?”

“그렇죠. 술법의 방향을 대충이라도 알면 그에 맞는 도구를….”

“고민할 필요 없어. 두 종류의 것만 챙겨가라. 너 자신을 보호할 도구, 그리고 적을 공격할 도구.”

“뭐라고요?”

위청보는 깜짝 놀랐다.

여인을 치료하는 법술을 펼칠 건데 뜬금없이 방어와 공격의 도구라니?

“내 말을 믿고 그렇게 챙겨 가. 미리 활성화시켜야 하는 부적이 있으면 지금 당장 그것부터 하고.”

대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느낌이 왔다.

위청보는 울상을 지었다.

그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오늘 밤 펼쳐질 일은 치료가 아니라 비술 대결이 될 테니까.

* * *

자시를 조금 남겨둔 시간.

단단히 각오를 다진 위청보가 여인의 전각을 향해 떠났다.

숙소에 홀로 남은 강한월은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날.

야행을 하기에는 적당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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