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비술 대결 (2)
* * *
위청보가 연 소저의 전각에 도착했을 때 봉위선은 향을 피우며 비술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시(子時) 직전, 느긋한 걸음으로 박위가 나타났다.
“이제 다 모였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지요. 우선 두 분이 가져오신 비술 도구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영력이 강한 도구가 많을수록 성공 확률이 올라가니까요.”
봉위선이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구를 보여 달라는 것은 밑천을 까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경지에 오른 술법사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예의를 벗어난 일이긴 했다.
“우리 고려의 술법은 도구에 의존하지는 않아서… 내가 가진 건 이것뿐이외다.”
박위가 품속에서 꺼내 놓은 것은 이미 선보인 적 있는 대나무 조각과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벽조목(霹棗木) 단검.
어떤 내력이 있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겉보기엔 그리 대단한 보물은 아닌 것 같았다.
“저도 낙양에서 급하게 출발하느라 조금밖에 챙겨오지 못했어요. 이것들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위청보가 품에 안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풀었다.
십여 장의 부적, 고색 찬연한 청동 향로, 청옥으로 만든 도장, 그리고 구리로 만든 흉배였는데, 박위의 물건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봉위선이 이번에는 눈을 반짝이며 물건을 살폈다.
“청옥인(靑玉印)과 호심경(護心鏡). 모산파의 보물들이군요. 그런데 이것뿐입니까? 대단한 보물들이지만 이번 술법에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건데. 혹시 팔주신령이나 강신주, 하다못해 본산 십방부적이라도…?”
위청보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봉위선이 모산파의 보물들에 대해 꿰고 있는 거지?
중요한 보물들은 강한월에게 맡기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시치미를 뗐다.
“저 같은 어린 제자가 어찌 감히… 그것들은 모산파 본산에서도 특급으로 관리하는 보물들인데요.”
“그런가요? 흠… 뭐 어쩔 수 없죠.”
봉위선은 불신의 눈빛을 한 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술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
“그럼 두 분께 제가 설계한 비술에 대해 설명 드리지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연 소저가 아픈 것은 누군가의 주술 공격에 당해 혈맥의 힘이 폭주했기 때문입니다. 제 비술은 두 단계에 걸쳐 행해질 텐데, 우선 혈맥을 공격한 악한 주술을 연 소저의 피에서 분리하겠습니다. 그 후에 두 분께서 분리된 주술을 제압해주십시오. 그사이 저는 폭주했던 혈맥의 힘을 다시 봉인할 테니까요.”
“이해했소. 그런데 봉 도사 혼자 어려운 일을 맡는 것 같아 쑥스럽소이다.”
“그렇지 않아요. 두 분이 맡은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연 소저를 공격했던 주술이 혈맥의 힘과 동화된 후 강력하게 증폭되었을 거예요. 몹시 위험할 겁니다.”
“그렇게나 강한 주술이란 말이요?”
“네. 그러니 두 분은 제가 방 안에 쳐놓은 결계 안에서 법력을 합쳐 대응해야 합니다. 모든 법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할 거예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박위와 위청보가 지정된 자리에 앉자 봉위선이 주문을 외웠다.
고대 천축어가 방 안에 울려 퍼졌고, 그에 맞춰 향로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알 수 없는 문자를 그리며 공중에서 춤을 추더니 스르르 여인의 몸을 감쌌다.
* * *
그 시각.
박위의 부탁에 따라 강한월은 숙소 안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정신을 최대한 집중하여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거미가 집을 짓듯 한 올 한 올 내뻗은 기감이 그물처럼 장원을 덮어갔다.
그가 특히나 주목하는 곳은 장원 외곽이었다.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오늘 밤의 변수는 외부에서 나타날 테니까.
어디, 뭐가 걸리는지 보자.
* * *
봉위선은 연속적으로 수결을 짚어 여인의 몸에 법력을 쏘아 보냈다.
몸이 들썩거리며 땀을 비 오듯 흘리는 것이, 여인의 몸 안에서 격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봉위선의 손가락이 붉게 빛나며 공중에 글씨를 써 내려 갔다.
타압!
백여덟 자의 글씨가 완성되자 봉위선은 짧은 기합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빛의 글자들이 빠르게 날아가 여인의 몸에 박혔다.
“쿠웨에엑!”
고운 입술에서 짐승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등이 활처럼 휘며 공중으로 한 자나 떠오르는 여인의 몸.
“준비하세요. 지금입니다!”
봉위선이 외치는 순간 여인의 모공에서 검붉은 피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저것인가?
위청보는 즉시 부적 네 장을 허공에 뿌렸는데, 부적들은 공중에서 춤을 추며 피 안개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 곳으로 몰았다.
박위는 손에 쥔 대나무 조각을 쭉 뻗어 올가미 같은 법력을 쐈다.
됐다!
박위의 법력에 묶여 피 안개가 몸부림치자 위청보는 안도했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안심.
파르르 떨리는 피 안개의 붉은 색이 점점 선명해지더니, 퍼엉 소리와 함께 부피가 몇 배로 커졌다.
크윽….
박위가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폭발하는 듯한 피 안개의 변이에 대나무 법술이 깨지며 타격을 입은 것이다.
“법력을 합쳐서 대항하세요! 혼자서는 무립니다!”
봉위선이 다급히 외쳤다.
위청보는 지체없이 청옥 도장을 공중에 띄우며 박위를 돌아봤다.
힘을 빌려 달라는 뜻임을 간파한 박위가 손을 뻗어 위청보의 목 뒤 대추혈에 얹었다.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박위의 법력.
용기백배한 위청보가 청옥 도장을 전면으로 쏘았다.
콰아앙!
청옥 도장과 피 안개 덩어리가 충돌했다.
한 치씩 밀고 들어가는 청옥 도장.
박위와 위청보의 법력이 합쳐진 것을 확인한 봉위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제 연 소저의 혈맥을 봉인하겠습니다.”
* * *
강한월이 쳐놓은 기의 그물에 무언가 감지되었다.
빠르고 은밀한 움직임.
대단한데?
강한월은 내심 감탄했다.
전문 살수들이 펼치는 은신술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깊고 두터운 내공으로 기척을 차단하며 이동하고 있었는데, 미리 기감을 펼쳐 놓지 않았으면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쩐다?
강한월은 잠시 고민했다.
저들이 향하는 방향은 분명 여인의 침소.
지금 전속력으로 달리면 중간에 막을 수 있을 테지만, 그 경우 저들이 침투한 의도를 밝히긴 어려워질 터.
일단은 뒤에서 지켜보는 게 맞겠지.
검을 집어 든 강한월이 숙소의 담을 뛰어넘었다.
* * *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당황한 위청보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청옥 도장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피 안개가 다시 한번 폭발하며 상황이 역전됐다.
커다란 구체(球體)로 변해서 이젠 안개라 부를 수도 없는 모양새.
선명한 붉은 색으로 번들거렸고, 역한 피 냄새마저 풍겼다.
붉은 구체는 엄청난 흡인력으로 청옥 도장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박위와 위청보의 법력이 청옥 도장을 통해 구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내공을 빨아들이는 흡성대법은 들어봤어도, 법력을 흡입하는 구체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법력을 끊을 수도 없었는데, 멈추는 순간 구체가 밀어닥치며 그들을 집어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위 소협. 당황하지 말게. 어떻게든 힘의 수평을 유지해봐.
귓가로 박위의 전음이 들려왔지만 답답한 소리였다.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시간 벌이일 뿐 해결책은 될 수 없는데….
—하지만 오래 버틸 수 없을 거예요.
—오래 걸리지 않아. 잠시만… 잠시만 버티면 되네.
잠시만 버티면 된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만 다른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박위와 위청보는 힘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음산한 미소를 띠는 봉위선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 * *
강한월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침입자들을 뒤따랐다.
침입자는 단 두 명.
하지만 둘 다 대단한 고수였다.
빠르게 이동하던 침입자들은 여인의 전각 앞에 도착하는 순간 은신을 풀었다.
거침없이 발산되는 기파.
깜짝 놀란 경비 무사들이 정원 곳곳에서 뛰쳐나왔다.
가장 앞에 서서 무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조철상.
“침입자다! 연 소저를 보호해!”
어두운 그림자에 몸을 숨긴 강한월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벌써 기세를 드러낸 거지?
목적이 암살이라면 이럴 이유가 없는데…?
쿠르릉.
달려드는 동창의 고수들과 삼황자의 호위들을 향해 침입자들이 장력을 날렸다.
“크억.”
동시에 두 명의 호위무사가 무릎을 꿇었고, 빠른 걸음으로 회피한 조철상 또한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명백히 드러나는 힘의 차이.
어떻게 단 두 명이서 겁도 없이 쳐들어온 건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적은 고수다! 검진을 짜서 상대해. 절대로 전각 안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
조철상의 부르짖음에 맞춰 무사들이 대열을 갖췄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스무 명이 넘는 무사들 사이를 거침없이 휘젓는 침입자들.
늑대 무리를 질타하는 호랑이 같았다.
‘저들이 어째서 여기에…?’
침입자들의 무공을 유심히 관찰하던 강한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공의 특성을 감추고 초식을 숨기고 있지만… 저건 분명 그곳의 무공.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한월은 알아볼 수 있었다.
* * *
피이익~
콰아앙!
급박한 호각 소리, 장력의 거친 폭음.
문밖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소란에 위청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박위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뒤를 돌아보려 했는데….
—위 소협! 집중하게. 지금이 고비야!
다급한 박위의 전음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칫 위험할 뻔한 순간이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법력이 구체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차리자, 위청보.
스스로를 다독이며 평정심을 되찾자 다시 힘의 균형이 맞춰졌다.
이런 제길!
갑작스러운 소란에 가장 당황하고 분노한 것은 봉위선이었다.
거의 마무리가 되고 있었는데 의외의 변수가 생긴 것이다.
단숨에 벽을 넘고 비술의 최고위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대로 물거품을 만들 수는 없었다.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만 직접 손을 쓸 수밖에.
봉위선의 눈빛이 독하게 변했다.
소매 안에 감춘 두 손에서 붉은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막 박위와 위청보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퍼엉!
방문이 박살 나며 침입자 중 한 명이 뛰어들었다.
방 안을 휙 둘러본 침입자는 다짜고짜 침상 위의 여인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이 새끼가 진짜!
찰나의 순간, 봉위선은 갈등했다.
신경 쓰지 말고 박위와 위청보를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여인을 보호할 것인가?
하지만 고민은 한순간.
봉위선은 지체없이 여인에게 날아드는 장력을 맞받아쳤다.
콰아앙!
장력과 장력이 부딪치며 방 안의 물건들이 출렁거렸다.
충격을 해소하느라 서너 걸음 뒷걸음질 친 침입자.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느꼈는지 눈빛이 진중하게 변하더니,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웅혼한 장력을 봉위선을 향해 뿜어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봉위선도 더 강력하게 맞받아쳤지만, 상대방의 장력에 자신과 상극인 기운이 담겨있어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일순간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리는 봉위선.
그와 동시에 선명하던 붉은 빛이 사그라지는 구체.
“지금이다!”
박위가 다급하게 외치며 옆에 놓여있던 벽조목 단검을 집어 들었다.
법력이 주입된 단검에서 석 자 길이의 푸른 빛이 쭉 뻗어 나왔고, 박위는 위청보의 머리를 건너뛰며 구체를 향해 단검을 내리그었다.
샤아악.
벽조목이 뿜어낸 파사(破邪)의 뇌기(雷氣)를 이기지 못하고 파사삭 부서지는 구체.
이어서 위청보가 내던진 부적들이 날아들어 구체의 잔해를 불태웠다.
화르르르.
구체는 역한 피 냄새만 남기고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준비하던 봉위선은 망연자실했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그러는 사이, 봉위선에게 장력을 날렸던 침입자는 밖에서 무사들을 막고 있던 동료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긴박했던 순간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하하하, 성공했습니다. 봉 도사가 침입자를 막아주신 덕분에 악한 주술을 소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봉 도사가 아니었음 위험할 뻔했어요. 감사합니다.”
봉위선의 속을 긁는 박위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