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85화 (85/210)

085화. 혈복 (1)

* * *

봉위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빛은 멍했고, 피로감이 몰려온 듯 안색이 어두웠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낮은 한숨을 내쉬는 봉위선.

“휴우. 박 도사님과 위 소협 수고하셨어요. 연 소저를 괴롭히던 주술을 멸했으니 큰 공을 세우신 겁니다.”

“모두 봉 도사가 잘 이끈 덕분이지요. 그나저나 연 소저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혈맥의 힘은 봉쇄가 된 겁니까?”

“그것이… 거의 성공하려는 순간 공격을 받는 통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습니다.”

“허, 이런 안타까운 일이….”

“괜찮습니다. 내일 다시 시도하면 되니까요. 헌데 제가 법력 소모가 심해서요, 내일 비술을 펼칠 때 두 분의 도움을 한 번 더 받을 수 있을까요?”

“하하하, 물론이지요. 함께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도 함께 합시다.”

박위와 위청보가 인사를 건네고 숙소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봉위선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내일 다시 하면 된다.

하루 늦춰졌을 뿐, 결과는 바뀌지 않을 거야.

애써 마음을 달래며 봉위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방문 밖으로 나왔을 때, 삼황자의 호위무사가 급히 달려왔다.

“봉 도사님. 삼황자 저하께서 침입자의 소식을 듣고 걱정이 많으십니다. 연 소저의 치료는 어찌 되고 있는지 알아 오라고….”

흥, 일이 이 모양인데 지 연인 걱정만 하는 건가?

울화가 치밀었지만 봉위선은 애써 담담히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라. 내 잠시 기력을 회복하고 한 시진 후에 보고드리러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멀어지는 호위무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봉위선은 생각했다.

삼황자, 남은 한 시진을 즐기시오.

그대가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테니.

* * *

한편, 봉위선을 훼방 놨던 침입자들은 빠른 속도로 밤길을 달렸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안심했기 때문인지, 멀찍이서 은밀히 뒤따르는 강한월을 알아채지 못했다.

너무 멀리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해뜨기 전까지는 장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강한월은 살짝 애가 탔다.

일각만 더 추적해보고 여차하면 저 둘이라도 잡아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다행히도 침입자들이 달리기를 멈췄다.

이름 모를 야산의 자그마한 공터.

침입자들은 공손한 자세로 나무 뒤편 어둠을 향해 말했다.

“대공자님, 전주님. 저희 다녀왔습니다.”

“수고 많았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일은 잘 처리한 것 같구나?”

삿갓을 깊이 눌러쓴 노인이 말을 하며 걸어 나왔고, 비범한 인상의 귀공자와 검을 든 무사 두 명이 뒤따랐다.

“예, 전주님.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박 도사님의 요청대로 무사히 수행하고 오늘 길입니다.”

“잘했군. 그런데… 꼬리를 달고 왔구나.”

“네? 꼬리라니요…?”

노인의 말에 침입자들은 깜짝 놀랐지만, 강한월은 놀랄 틈도 없었다.

삿갓 노인이 강한월이 은신한 곳을 향해 비상한 속도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예까지 오셨으니 인사라도 나눕시다.”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 발톱처럼 강한월의 옷깃을 노리고 오는 손가락.

잡혀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도망칠 것도 아닌지라,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노인의 뒤로 돌아 나가며 대답했다.

“인사를 못 드릴 것도 없지요.”

강한월의 빠른 움직임에 당황한 노인은 인사를 드리겠다는 말의 뜻도 생각하지 못한 채 휙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내뻗었다.

쿠르르릉!

공기를 찢어발기고 공간을 건너뛰며 강한월의 가슴으로 쇄도하는 권경(拳勁).

인사를 하자더니 다짜고짜 백보신권(百步神拳)을 내질러?

쓴웃음을 지은 채 강한월은 급히 양손을 내밀어 주먹을 막았다.

콰아아앙!

대충돌의 충격파가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여파에 뒤로 젖혀진 삿갓 아래로 보이는 것은 계인이 찍힌 민머리, 그리고 경악으로 부릅뜬 눈.

“이건… 본문의 금강부동신공? 너는 도대체 누구냐?”

노인이 잔뜩 경계하며 공력을 일으켰다.

웅혼한 기세가 퍼져나가며 잔뜩 부풀어 오르는 옷소매.

침입자 두 명도 득달같이 달려와서 노인의 뒤편에서 자세를 잡았다.

아직은 복면을 쓰고 있지만, 그들 또한 머리를 밀었고 이마엔 계인이 찍혀 있으리라 강한월은 확신했다.

“진정하시지요, 대사님. 저는 적어도 소림의 적은 아닙니다.”

“흥, 본문의 진산 무공을 훔쳐 배운 자가 본문의 적이 아니다? 어디서 그런 말 같지 않은… 아니, 잠깐. 설마…?”

무언가 떠오른 듯 노인은 말을 멈췄다.

분명 있었다.

소림의 제자가 아니면서도 금강부동신공을 익히는 게 허락된 사람이.

강호 무림을 통틀어 단 한 명.

“시주의 이름, 아니 사부님의 성함을 물어봐도 되겠소?”

“저는 강한월이라 합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전 무림맹주 신주의협께서 제 사부님 되십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소림의 노승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겨우 신분을 알아냈을 뿐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멀찍이서 지켜보던 귀공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공륜 대사. 신주의협의 제자라면 적어도 악인은 아닐 테지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 마차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그리하시지요, 대공자님.”

* * *

마차는 크고 안락했다.

억지로 화려함을 감추고 있었지만 어디 한 군데 예사로운 곳이 없었고, 철판을 덧댄 벽과 지붕은 웬만한 공격은 다 막아줄 것 같았다.

범상치 않은 마차와 너무나 자연스레 어울리는 귀공자가 먼저 말문을 꺼냈다.

“강 소협. 이분 대사님이 소림사의 나한전주라는 건 이미 아실 테고, 내가 누군지도 짐작이 가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좀처럼 바깥일에 관여하지 않는 소림의 고승을 수하처럼 부리며, 삼황자의 은밀한 일에 관여하는 사람.

박위를 보내 이 일에 개입시키기도 한….

“불민한 백성이 대명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하하, 역시 알아보는군. 그럼 이제부터는 편하게 이야기하겠네. 강한월 자네는 무슨 연유로 소림승의 뒤를 밟은 건가?”

상대는 황태자.

강한월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소림의 지원을 받는 걸 보니 약간 안심은 되었지만, 황태자가 혈승과 연관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저와 제 동료는 무림맹에 적을 두고 있는데, 동창의 요청을 받고 모 여인을 치료하러 왔다가 침입자를 발견하고 뒤를 추적한 것입니다.”

“동창이라… 평소 동창과 친분이 깊었나?”

황태자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뒤이은 강한월의 말에 그 불편함은 즉시 사라졌다.

“동창과는 친분이 없습니다. 다만, 동창의 장준검 천호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습니다. 이번에 저를 부른 것도 장 천호의 추천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장 천호? 그럼 이야기가 또 달라지지. 난 동창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하지만 장 천호는 예외야. 어디 자세히 좀 이야기해보게. 그 여인의 장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혈승과 문무대의 임무에 대한 것만 숨기고, 강한월은 장원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박위를 만난 일, 여인의 상태, 그리고 좀 전에 있었던 비술 치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황태자가 물었다.

“자네는 이 일의 실제 사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나?”

“처음엔 삼황자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그 여인을 병들게 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고, 실은 그 여인 자체가 삼황자를 몰락시키기 위한 도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 여인을 키워서 삼황자에게 보냈을까요? 외람되지만 삼황자와 황권 경쟁 중인 황태자 전하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나를 의심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박 도사와 소림의 행동을 보니 삼황자를 저격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당연한 거지. 남들은 나와 삼황자 그 아이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네. 내가 내 아우를 공격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혼란스럽군요. 감히 황실의 황자를 노리는 암중 세력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봉위선이란 술법사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건지….”

황태자는 말없이 강한월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눈빛을 빛내던 황태자가 소림의 공륜 대사를 향해 물었다.

“대사가 보시기엔 어떻소? 강한월 이 친구 믿을 만한 사람 같습니까?”

“소림의 보물인 금강부동신공이 삿된 자에게 전해졌을 리는 없을 겁니다. 이토록 엄중한 시점에서 강 소협을 만나신 것도 특별한 인연이 아닐까 싶군요. 아미타불.”

황태자는 공륜 대사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자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인지라, 믿을 만한 우군을 만난다는 건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일이었다.

“강한월 자네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데 들어보겠는가?”

“경청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순 없겠고,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네.”

생명의 위협.

그 정도로 황실이 어지럽다는 말인가?

혈승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 알고 있었지만, 황태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꽤나 충격적이었다.

“놀랐나? 그랬겠지.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세. 부황 폐하는 물론 내 아우들까지. 황실 전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야.”

“믿기 어려운 말씀이군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닐세. 그냥 오랫동안 어떤 상황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거지.”

“천하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신 분들 아닙니까? 누가 감히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알고 봤더니 황족은 아무 힘이 없더군. 대장군과 금의위, 특히 동창이 등을 돌리는 순간에는.”

황태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금의위와 동창입니까?”

“대장군, 삼공, 좌우도독, 그리고 귀빈까지. 수상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다들 누군가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 같은데, 수괴가 누군지는 아직 말하기 이르네.”

황태자의 입을 통해 혈승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했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어쨌거나 황태자와 대화를 튼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이런 상황인지라 황실 안의 누구도 믿을 수 없다네. 그래서 난 은밀히 소림사에 도움을 청했고, 고려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박위 도사를 소개받았지. 소림의 나한전주 공륜대사와 사대금강 중 두 명, 박위 도사, 오랫동안 날 보필해온 수신호위 두 명. 현재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게 다일세.”

“구분하기가 어려울 뿐, 황태자 전하를 따르는 충신은 많을 겁니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황실 외부에서 조력자를 찾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해. 그래서 말인데… 강한월 자네가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도와달라고?

만인지상인 황태자 입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말.

강한월은 연민을 느꼈다.

“능력이 되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첫 번째 부탁을 해볼까 하는데… 장원으로 돌아가서 박위 도사를 도와 봉위선이라는 술법사의 음모를 밝혀주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아우 삼황자의 안전을 지켜주게.”

“명심하겠습니다.”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휙 던졌다.

강한월의 손으로 날아든 그것은 정교하게 용이 새겨진 황금패(黃金牌)였다.

“대명의 황태자를 상징하는 패일세.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쓸모가 있을 거야.”

“전하. 굳이 이런 것은….”

“빨리 가보게. 몹시 피곤하군. 나는 좀 쉬어야겠네.”

황태자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 누우며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이 황금패를 품속에 넣고 강한월은 마차에서 내렸다.

강한월의 기척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자, 묵묵히 곁을 지키던 수신호위가 황태자에게 물었다.

“전하. 굳이 황룡금패까지 주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그 패는 오호도독부의 병력까지 차출할 수 있는 전하의 신물인데….”

“그가 나의 행운의 패가 되길 바라니, 나도 내가 가진 패 하나는 주는 게 맞겠지.”

황태자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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