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혈복 (2)
* * *
“대장! 도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거예요?”
강한월이 숙소로 복귀했다.
위청보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걱정이 컸던 것이다.
“미안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인데요? 혹시 무슨 일 생겼을까 봐 얼마나 걱정을….”
“설명은 나중에. 우선 봉위선에게 가 봐야겠다.”
강한월은 위청보를 데리고 봉위선의 거처로 향했다.
박위는 적이 아님이 확인됐으니 이 장원에서 벌어지는 음모의 핵심은 봉위선임이 분명한 상황.
그가 또 다른 음모를 꾸미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 멈추시오! 여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헉.”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 무사의 제지를 받았지만, 강한월은 망설임 없이 지풍을 날려 무사의 수혈을 짚었다.
속전속결.
왜인지는 모르지만 강한월의 육감은 서둘러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벌컥.
역습에 대비하면서 거칠게 문을 열었다.
안으로 뛰어든 강한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던 것이다.
“이상하네요? 이 새벽 시간에 봉위선은 어딜 갔을까요?”
“글쎄. 여인의 전각에 있거나 아니면… 잠깐. 이 냄새는?”
콧속으로 스며드는 비릿한 향기.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기분 나쁜 냄새.
“피 냄새네요. 한두 방울이 아니에요. 이 정도 냄새면 꽤 많은 출혈이 있었나 본데요?”
하지만 방 안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고, 싸움의 흔적도 없었다.
핏방울이 튀지 않게 조심하면서 스스로 자해라도 했다는 말인가?
“방 상태를 보니 피 터지게 싸운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채혈을….”
채혈?
무엇을 위해 채혈을…?
강한월의 머릿속에 불현듯 지난 일이 떠올랐다.
진가린의 첫 번째 임무, 오성상단.
“청보. 큰일이다. 삼황자가 위험해!”
“갑자기 삼황자는 왜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난 삼황자에게 갈 테니 넌 박위 도사를 모시고 그곳으로 와라.”
* * *
전각 지붕을 날아 넘고 후원의 연못을 건너뛰었다.
일 초가 아쉬운 강한월은 삼황자의 숙소를 향해 직선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제지하는 경비 무사들의 수혈을 짚을 겨를도 없어서 쾌속의 경공으로 그대로 돌파했다.
눈앞에 보이는 삼황자의 방.
제발, 무사하기를.
강한월의 몸이 쏘아진 탄환처럼 벽을 뚫고 들어갔다.
콰앙!
“허허, 이것 참. 요란하게도 등장하는군.”
옷에 튄 벽돌 가루를 털어내며 봉위선이 비릿하게 웃었다.
누군가 찾아올 것을 짐작했다는 듯이, 그리고 누가 오던 두렵지 않다는 듯이.
“삼황자께 무슨 짓을 한 거요?”
강한월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깊은 잠에 빠진 듯 침상에 누워있는 삼황자를 본 것이다.
그 옆에 놓인 피가 묻은 커다란 자기 병과 긴 대롱도 함께.
“삼황자는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게. 오히려 더 건강해지실 거야.”
“설마… 피를 주입한 거요?”
봉위선이 뭐라 답하려는 순간 밖이 웅성거렸다.
동창 무인들을 이끌고 나타난 조철상이 뚫린 벽 뒤에서 급히 외쳤다.
“강 소협! 지금 제정신이오? 감히 삼황자 저하 처소에 난입을 하다니! 당장 밖으로 나오시오!”
“삼황자 저하는 무사하시니 자네들은 안심하게. 내 강 소협과 긴히 나눌 대화가 있으니 자네들은 물러가게나.”
“봉 도사님. 하지만….”
“어허! 감히 내 명에 토를 다는 게냐? 닥치고 썩 물러가지 못할까!”
조철상은 죽을 맛이었다.
삼황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
하지만 무조건 봉위선을 받들라는 곽 공공의 엄명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동창의 무사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파리떼가 끼는 바람에 흐름이 깨졌군. 무슨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더라?”
“삼황자께 피를 주입했냐고 물었소.”
“아, 그랬지. 맞네. 삼황자가 간절히 원하기에 연 소저의 피를 주입해드렸지.”
“그분이 연 소저의 피를 왜 원한다는 말이오?”
“사랑 때문이지. 혈맥의 힘이 각성된 연 소저는 본의 아니게 모든 남자를 유혹하게 된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삼황자께서도 혈맥의 힘을 받아들여 연 소저의 유일한 짝으로 인식되는 것뿐. 혈맥의 배필을 찾은 연 소저는 더 이상 다른 남성을 유혹하지 않게 되니까.”
“그런 얄팍한 거짓말로 삼황자를 속였소?”
“거짓? 무슨 근거로 내 말이 거짓이라는 거냐?”
“자기 병에 남은 피에서 구린내가 나거든. 연 소저의 피가 아니라 봉위선 당신의 피란 뜻이지. 삼황자를 혈복으로 만들기 위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여유 있던 봉위선의 표정에 서리가 내렸다.
“혈복. 그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게냐? 위청보 그놈이 말해주더냐? 아니야… 아무리 모산파의 계승자라도 혈복 비술을 알아볼 수는 없어.”
말하는 사이 봉위선의 온몸이 붉게 변해갔다.
숨겨진 문신이 있던 것인지 몸 곳곳을 가득 채워가는 붉은 상형문자들.
“박위와 위청보의 법력을 흡수할 때까진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구나. 알면 안 되는 걸 알게 된 너 스스로를 원망해라.”
봉위선이 독특한 수결을 짚으며 팔을 내밀었다.
팔에 새겨진 문신 몇 개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스르륵 합쳐지며 인(刃) 자로 변했다.
순간 봉위선과 강한월 사이의 공간이 열리더니 핏빛 비수들이 나타나 유성처럼 쏟아졌다.
탕, 탕, 타타탕.
강한월은 급히 검을 휘둘러 비수들을 쳐냈지만,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왜? 놀랐느냐? 흐흐흐, 아직 놀라긴 이르지.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강한월이 놀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오랜 기간 꿈속에서 봤던 비술 공격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
비수 다음엔 뭐였더라? 불화살이었나…?
봉위선이 다시 한번 팔을 뻗었다.
문신들이 떠오르더니 이번엔 화(火)자를 그렸다.
어김없이 공간이 열리며 쏟아지는 불화살들.
이번엔 굳이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강한월은 금강부동신공의 호신강기를 폭발적으로 일으켰고, 날아들던 불꽃들은 금빛 강기막에 막혀 튕겨 나갔다.
“너… 너….”
봉위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기껏해야 절정에서 초절정 사이쯤이라 생각했던 상대가 절대급의 호신강기를 선보이다니.
게다가 이어지는 강한월의 말은 그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십이자혈문술(十二子血文術) 따위로는 날 어찌할 수 없을 거요. 하지만 꽤 대단하긴 하군. 보통은 열두 명의 혈교 술사들이 각각 한 글자씩 담당하던데, 당신 혼자서 열두 명 몫을 하다니. 역시 당신은… 혈승이었어.”
“어떻게 알았지?”
“원숭이 혈승이 당신을 죽여 달라 의뢰하면서 알려주더군. 백팔살 비술을 완성해 비술왕이 될 생각인데 당신의 존재가 걸리적거린다면서.”
“흥, 원숭이 녀석이 언젠가 뒤통수를 칠 줄 알았지. 하지만 그 배신자 놈이 비술왕을 꿈꾼다고? 회귀 이후 들은 말들 중 가장 웃긴 말이군.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만약 강한월이 혹시라도 절대경의 고수가 맞다면, 게다가 원숭이를 통해 자신의 비술을 학습했다면 정말 어려운 승부가 될 게 뻔했다.
일반적인 비술로는 안 된다.
다행히도 자신에겐 최근에 완성한 강력한 비술이 있었다. 원숭이도 모르는 비술.
하지만 문제는 발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누군가 잠시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지금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성스러운 피로 맺어진 혈주(血主)가 명한다. 혈복은 잠에서 깨어나 적을 죽여라!”
봉위선이 혀를 깨물어 피를 뿜으며 삼황자를 향해 명령했다.
붉게 충혈된 눈을 번쩍 뜨며 일어서는 삼황자.
혈복으로 변했어도 사고능력은 멀쩡한지 즉각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동창과 호위대는 어디 있느냐? 어서 와서 나를 지켜라!”
갈수록 태산이군.
강한월은 실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봉위선을 몰아붙이지 않고 시간을 끈 것은 위청보와 박위가 도착하기를 기다린 것이었고, 그들을 통해 삼황자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던 건데….
오히려 삼황자가 혈복으로 각성하는 기회를 주고만 셈이 되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강한월은 삼황자에게 지풍을 날렸다.
그가 날뛰는 한은 봉위선을 상대할 수 없으니 수혈을 짚어 잠재울 수밖에.
쓰러지는 삼황자를 얼른 낚아채 침상에 누이고 봉위선에게 돌아서는데….
“폭(爆)”
봉위선이 비릿하게 웃으며 짧게 외쳤다.
순식간에 울룩불룩 부풀어오르는 삼황자의 혈관.
이대로 두면 곧 몸이 터질 것 같았다.
봉위선이 나를 시험하는 건가?
강한월은 골치가 아팠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봉위선이 시간을 끄는 걸 텐데… 그렇다고 삼황자가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
휴우, 한숨을 내쉬며 삼황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진기가 몸 안으로 퍼지며 잔뜩 부푼 혈관의 압력을 끌어내렸다.
흐흐흐, 계획대로 되는구나.
봉위선은 매우 흡족했다.
삼황자의 몸 속에서 폭혈의 기운이 날뛰는 한 강한월은 손을 떼지 못할 거고, 최강의 비술을 발동하기 위한 진언은 이제 조금만 더 외우면 완성된다.
자신의 승리가 분명한 상황.
그때, 조철상의 외침이 들려왔다.
“삼황자님! 괜찮으십니까?”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 그리고 그보다 더 빠르게 접근하는 누군가.
“대장, 저 왔어요!”
동창 무사들의 머리를 타 넘고 위청보와 박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빨리 여기로! 삼황자가 위험합니다.”
위청보는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머뭇거렸지만 노련한 박위는 즉시 강한월 곁으로 다가갔다.
“혈압이 문제로군. 나에게 맡기시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대나무 조각을 삼황자의 이마에 얹는 것을 확인하고 강한월은 몸을 일으켰다.
“청보. 무사들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라.”
“넵”
위청보는 품속에서 부적 다발을 꺼내며 다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로소 강한월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일대일의 대결.
구석에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봉위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흐흐흐. 박위와 위청보가 오니 네가 유리해진 것 같지?”
봉위선이 몸을 일으키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상황이 불리한 게 분명한데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
불길할 느낌이 들었지만 강한월은 묵묵히 검을 뽑았다.
“이미 늦었어. 역혈(逆血) 영역이 완성됐거든.”
봉위선의 쩍 벌린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먹물이 번지듯 순식간에 사방 십 장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공간에서 빛이 사라졌다.
“박 도사님, 청보. 어서 영역 밖으로!”
이게 강한월이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봉위선이 만들어낸 영역에선 소리의 파장마저 힘을 잃었다.
박위는 삼황자를 안고 몸을 날렸고, 위청보는 조철상과 다른 무사 한 명을 양팔에 끼고 영역 밖으로 뛰었다.
눈치 빠른 무사 몇몇은 위청보를 따라 영역 밖으로 몸을 던졌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영역 안에서 머뭇거리던 무사들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일그러진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 많이 고통스러울 거야. 몸 안의 피가 역류하고 있거든 】
메아리가 울리듯 봉위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비술의 주체인 그는 영역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 피가 거꾸로 도는 것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강한월 너도 마찬가지. 이 영역 안에서는 내가 곧 천하제일이며 신이다. 하하하 】
온몸의 피를 쏟아낸 듯, 쓰러진 무사들 주변으로 피가 강같이 흘렀다.
생명의 원천인 피가 오히려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
거꾸로 된 세상.
역천(逆天).
피가 거꾸로 돌고 있다고?
강한월은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혼란스럽나? 많이 고통스럽지? 내공의 힘으로 버티려고 애쓸 필요 없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 피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인 거야 】
봉위선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역혈 비술이 성공한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법력 소모가 크기에 길게 시간을 끌 순 없었다.
【 잘 가라 】
멍한 표정의 강한월에게 싱긋 웃어준 후.
봉위선은 힘차게 단검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