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혈복 (3)
* * *
봉위선이 내찌른 단검은 정확히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매우 빠른 속도였지만, 강한월의 눈에는 매우 느리게 보였다.
사부님.
왜일까? 이 순간 사부 신주의협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샤아악.
“으아악!”
봉위선이 오른팔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단검이 심장을 찌르기 직전, 강한월이 휘두른 검에 오른팔이 팔꿈치부터 잘려 나간 것이다.
“너… 너… 어떻게? 어떻게 역혈 영역 속에서 움직일 수 있던 거지?”
팔이 잘리는 순간 영역도 깨진 건지 봉위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내 피는 역류하지 않더군.”
“그럴 리 없다! 비술 영역 안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어째서 네 피만….”
“난 예전에 많이 아팠소. 피가 제 기능을 못 해 죽을 수밖에 없는 병. 생명력을 잃은 내 피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사부님이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하셨소. 극단적인 두 기운을 동시에 일으켜 피를 순환시키는 거였는데, 자석의 양극과 같은 원리였지.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극단의 기운 사이를 오고 간 내 피는 결국 생명력을 되찾았소. 모두 사부님 덕분이지.”
“말도 안 돼! 그 두 기운이 자석같이 작동해서 피의 역류를 막았다는 말이냐? 도대체 어떤 공력을 익혔기에…?”
“소림의 금강부동신공과 천마신교의 마공.”
그랬구나.
그 정도로 상극인 공력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면 역혈 영역이 밀릴 법도 하지.
그나저나 사부라는 자도 단단히 미쳤군. 어찌 제자에게 그런 위험한 시도를….
의문이 풀리니 고통이 밀려들었다.
영역을 펼치느라 법력을 소진한 데다 오른팔이 잘렸으니 더 이상의 싸움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까?
강한월은 자신을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팔이 잘린 부위를 지혈해주는 걸 보면.
비록 공력을 금제하는 혈도도 함께 짚였지만.
풀썩.
봉위선이 맥없이 쓰러졌다.
“대장! 괜찮은 거예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위청보가 달려오며 물었다.
“보다시피.”
“아까 그건 도대체 뭐였소? 도우려 했는데 무슨 투명한 장막 같은 것에 막혀서….”
박위는 꽤나 미안한 표정이었다.
“역혈 영역이라고 하더군요. 박 도사님이 삼황자를 맡아주신 덕분에 이길 수 있었던 거고요. 그나저나 삼황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피가 폭발하려던 증세는 멈췄소. 하지만 다른 문제는….”
박위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조철상이 몇몇 동창 무사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강한월 소협. 나도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삼황자 저하와 봉 도사를 헤친 혐의로 당신을 체포해야겠소.”
“꼭 그래야 하겠습니까?”
“무슨 비밀스러운 사정이 있다는 건 알겠소. 하지만 동창도 입장이 있으니 어쩔 수 없구려. 강 소협이 무력을 쓴다면 우리가 당해낼 수 없겠지만, 부디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순히 따라주기를 바라오.”
조철상의 입장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연행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봉위선을 문무대로 데려가 삼황자의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
“언젠가는 동창을 찾아뵙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면 차라리 우리 모두를 때려눕히고 가시오.”
“이걸로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강한월은 품에서 금빛 신패를 꺼냈다.
“그… 그건 황룡금패? 이 일이 황태자 전하의 제가 하에 벌어진 일이란 말이오? 휴우,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내가 감히 그분의 권위에 대항할 순 없으니….”
조철상은 뭔가 복잡한 눈빛을 보내더니 수하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쌤통이라는 표정으로 동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위가 말했다.
“이거 놀랍군요. 강 소협이 황태자 전하를 뵈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분이 신물까지 내리셨다니.”
“봉위선을 막고 삼황자를 구하라고 하시더군요. 관련하여… 삼황자님의 상태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던 차였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깁시다.”
* * *
한 시진 후.
삼황자를 마차에 태우고 박위가 장원을 떠났다.
혈복 비술로 연결된 봉위선과 삼황자를 가급적 멀리 떨어뜨릴 필요가 있어 급하게 출발한 것이다.
회귀자에 대한 것만 빼고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니 황태자 측에서도 나름의 대비를 할 터였다.
“이번 일은 마무리되었구나. 우리도 이제 떠나자.”
“대장, 떠나기는 뭘 떠난다고 그래요? 아직 해결 못 한 일이 있는데.”
“무슨 일?”
“그 여자. 연 소저는 어쩌려고요?”
그랬지. 그 일이 있었지.
강한월은 골치가 아팠다.
치명적인 색기를 뿜어내는 여인이 세상을 활보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으니.
“청보, 네 술법으로 치료할 수는 없는 거냐?”
“시도는 해볼 수 있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어요.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우리 모산파가 그쪽으로는 영 쑥맥이라….”
“어쩔 수 없구나. 일단 문무대로 데려가자. 소영영이 방법을 알지도 모르니.”
서둘러 여인의 전각으로 향했다.
그녀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을 거란 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여인은 외출복을 갖춰 입고 전각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검은 면사로 가린 채로.
“소녀를 구해주신 은인께 인사 올립니다.”
여인은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위청보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아… 이러지 마세요. 저는 절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어요. 부담스럽게….”
“가위눌린 듯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었지만 귀는 열려 있었습니다. 위 소협께서 저를 구해주신 사실을 모를 만큼 바보도 아니고요.”
“저 혼자 한 일이 아닌걸요. 저보다는 여기 저희 대장이 더 수고를….”
여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엔 강한월을 향해 절을 하려 했다.
강한월은 서둘러 내공을 일으켰고, 무형의 힘이 절을 못 하도록 몸을 막자 여인은 가벼운 목례로 절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왜 문 앞에 나와 있던 겁니까? 혹시 우리를 기다리느라…?”
“확신한 건 아니지만 혹시 한번 들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강한월의 눈길이 여인 옆에 놓여있는 보따리로 향했다.
“짐을 챙기셨네요. 길 떠날 채비를 하신 듯한데…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이곳에 머물 순 없으니 당연히 떠나야 하는데,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은인들을 따라가도 될는지요?”
창피함과 기대와 불안함이 뒤섞인 목소리.
면사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절박함이 충분히 전해졌다.
데려가지 않겠다면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
여인은 자신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리라.
“부담스러우시겠지만 저도 제 몫은 할 수 있습니다. 청소와 빨래라면 누구 못지않게….”
“갑시다.”
“네…?”
“마침 짐도 챙기셨으니 잘되었네요. 바로 출발합시다.”
* * *
위청보가 마차를 몰았다.
여인, 연소흔은 위청보와 함께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 안에 태웠더니 봉위선을 보고 부들부들 떨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겨준 거였다.
시원하게 달리는 마차.
세상 구경 처음 하는 사람처럼 연소흔은 주변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차를 모는 위청보는 바람에 섞여오는 여인의 향기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 문무대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무사히 복귀한 강한월과 위청보를 격하게 반겼고, 업혀 들어오는 외팔이 중년인을 보고 성과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오는 얼굴을 가린 여인은 누굴까?
관심이 동한 곽철이 말을 붙이려 했지만, 먼저 나선 소영영에 선수를 뺏겼다.
역시 천마신교의 신녀 후보.
보자마자 연소흔의 상태를 알아챘기에, 즉시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대장도 참. 어디서 저런 엄.청.난. 미녀를 데리고 온 거예요?”
일각쯤 후에 방에선 나온 소영영이 다짜고짜 강한월에게 물었다.
관심이 동한 광군영과 곽철이 눈을 빛냈고, 진가린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남자들의 관심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치료할 수 있겠나?”
“자세히 살펴봐야 알 것 같아요. 일단은 푹 쉬라고 했어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것 같더라고요.”
“잘했어. 급한 문제는 아니니까. 정작 급하고 중요한 일은….”
강한월이 봉위선을 가리켰다.
수혈을 짚여 잠들어 있는 외팔이 중년인.
“황실에 숨어있던 혈승을 잡는 데 성공한 건가요?”
“혈승인 건 맞는데, 우리가 생각하던 황실의 혈승 본인인지는 모르겠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강한월이 일의 경과를 설명했다.
짧은 삼 일간의 이야기지만 황자와 미녀와 술법사가 등장하는 매우 흥미진진한 내용.
“와, 대단했네요. 황태자와 소림까지 나타나다니. 어쨌건 아직 불분명한 게 많다는 거죠? 빨리 봉위선을 조사해봐야겠네요. 뭐부터 할까요? 잔혼반? 섭혼술?”
“섭혼술 먼저. 잔혼반은 큰 의미 없어. 이미 자기 입으로 혈승인 것을 인정했으니까.”
봉위선의 수혈을 풀고 섭혼술이 시행되었다.
이미 수차례 경험이 있었기에 소영영은 능숙하게 비술을 펼쳤다.
하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봉위선은 비술의 대가.
소영영이 수차례 기억의 문을 두드렸지만, 단단히 잠겨진 빗장은 열릴 줄을 몰랐다.
“이자는 토끼, 묘(卯) 혈승이에요. 그런데 최근의 일부 기억밖에 보이질 않네요. 정작 중요한 기억들은 철저히 봉인되어 있어요.”
“최근의 기억에선 특별한 게 없나?”
“그것도 어렴풋한 파편들이라. 잠시만요… 음, 청보를 부른 이유는 알겠어요. 토끼 이자가 비술의 다음 경지를 돌파하려 했는데 법력이 모자랐데요. 모산파 계승자인 청보의 법력을 흡수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거예요. 정말 나쁜 놈이네요.”
“동창을 통해 나를 부른 이유는?”
“그건 기억에 없네요.”
위청보에 대한 것은 있고 정작 자신에 대한 건 없다고?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섭혼술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강한월은 제일 중요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혈복으로 변한 삼황자를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해. 혹시 봉위선 이자가 죽으면 자동으로 혈복 비술이 풀리는 건가?”
소영영은 남은 기력을 짜내 봉위선의 조각난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혈복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대장. 더 이상은 무리예요.”
창백해진 얼굴의 소영영이 섭혼술을 풀었다.
“수고했다. 그 정도면 됐어. 나머지는 차차 밝혀내도록 하자.”
그래,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혈승 한 명을 더 체포한 것은 큰 성과니까.
강한월은 손가락에 공력을 모아 봉쇄해 놨던 봉위선의 공력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여섯 번째 혈승 체포 완료.
* * *
덜컹.
지하실의 철문이 열렸다.
흐흐흐, 이번엔 누가 잡혀 온 걸까?
원숭이 혈승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진가린, 오랜만이네. 그 외팔이는 누구냐? 강한월이 또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 모양이구나?”
“흥, 됐어요. 당신하곤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둘러업고 온 봉위선을 원숭이 건너편 철창에 넣으며 진가린이 답했다.
“쌀쌀맞기는. 나만큼 네 생각을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건 그렇고… 신입이 들어왔으니 이번에도 술을 주겠지?”
“꿈 깨요. 이 사람 팔 잘린 거 안 보여요? 당분간 술 마시면 안 된다고요.”
“그건 그 사람 사정이고, 난 멀쩡한데….”
“닥쳐요! 그리고 분명히 경고하겠는데, 한 번만 더 이상한 짓 하면 정말 죽을 줄 알아요!”
콰앙!
진가린은 거칠게 철문을 닫고 지하실을 나갔다.
쯧쯧. 성격이 저래서 시집이나 갈 수 있을는지.
그나저나 누굴까, 저 외팔이는?
원숭이는 정신을 집중해서 건너편 수감실을 살폈다.
혈승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혈령의 힘을 몰래 간직하고 있는 원숭이는 어렵지 않게 상대의 기척을 감지했다.
잠깐. 이거 혹시…?
여유만만하던 원숭이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제길. 하필이면 저 녀석이라니.
다른 혈승이라면 몰라도 저자는 정말 위험했다.
기회가 되면 죽음을 선사하고 혈령의 힘을 빼앗으려는 생각이었는데, 상대가 토끼라면….
【 이봐, 말 혈승. 내 말 들리나? 】
【 원숭이. 왜 그렇게 호들갑이지? 위층이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 있나? 】
【 비상이야! 우리 다 죽게 생겼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