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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88화 (88/210)

088화. 다시 북경으로 (1)

* * *

납작 엎드린 곽 공공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귀빈 앞에서는 언제나 긴장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보통 때와는 또 달랐다.

“그래서요? 아직도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일반 무사들만 복귀하고 조철상은 아직… 아마도 강한월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흥, 언제부터 동창의 간부가 중간 보고 없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귀빈의 질책은 매서웠지만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일의 책임자는 동창이 아닌 봉위선인 것이다.

그녀 스스로가 불러들여서 전권을 준.

‘토끼 그놈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걸까? 안 좋은 사고가 터진 건 분명한데….’

귀빈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토끼를 끌어들여 일을 맡긴 것이 후회되었다.

아쉽게도 자신의 피는 황족 누구와도 상성이 맞지 않았고, 그렇기에 토끼를 이용한 것인데….

삼황자와 피가 맞는 것까진 좋았지만 결과가 이래 버리니.

“삼황자의 행방은 찾았나요?”

“확실하진 않지만 황태자가 데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보인다? 동창 수장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참 구차하네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삼황자의 신병을 확보하세요. 이번 일에 곽 공공의 목을 걸어야 할 겁니다.”

곽 공공은 무릎으로 뒷걸음쳐 귀빈의 방을 나왔다.

워낙 분위기가 살벌해서 장인검의 구명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휴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황태자의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라는 말인가?

* * *

연소흔이 빨랫감을 잔뜩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강한월이 소영영에게 물었다.

“연 소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굳이 집안일을 할 필요는….”

“아니오. 저렇게 일을 하는 게 좋아요. 잡생각도 잊게 해주고, 본인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자각도 생기죠.”

“그래? 그럼 다행이고.”

“것보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연 소저와 관계된.”

“이야기해봐.”

짧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 강한월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영영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찻잔을 들었다.

“연 소저요. 비술에 당하기 전의 기억이 없어요. 연소흔이 본명인지, 고향이 어딘지, 가족들은 살아있는지도 알지 못하죠.”

“그런가?”

“무슨 반응이 그래요? 불쌍하잖아요! 색공을 치료하는 건 치료하는 거고, 가능하면 기억도 찾아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 소저의 동의하에 섭혼술을 시도했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녀의 치료는 전적으로 소영영에게 맡겨 놓은 터라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성과는 있고?”

“아직요. 과거의 모든 것이 두꺼운 벽으로 가려져 있더군요. 대신… 다른 걸 봤어요.”

“무얼 봤지?”

“그녀의 몸에 색공을 심은 사람. 잊히지 않는 공포로 그녀의 뇌리에 각인된 모습.”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 찻잔을 든 손이 부르르 떨었다.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이었어요.”

* * *

공력이 소멸된 데다 섭혼술의 후유증까지 겹쳐 봉위선은 꼬박 이틀을 실신해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욱신거리는 오른팔의 아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형님. 토끼 형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봉위선은 왼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어디지? 나를 토끼라 부르는 자네는 누군가?”

뭐야? 설마 나를 알아볼 힘도 없는 거야?

원숭이는 순간 갈등에 휩싸였다.

토끼가 정말 모든 능력을 잃은 거라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는 게 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토끼의 말은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은 이 행동도.

“접니다, 형님. 원숭이요. 여긴 강한월 그 새끼가 만든 감옥이고요.”

원숭이!

순간 분노가 울컥 치솟았다.

원숭이가 배신자라는 강한월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은 믿었다. 원숭이는 원래 그런 놈이니까.

“원숭이 아우로군. 재회의 장소로는 좀 뭐하지만 어쨌든 반갑다. 넌 어쩐 일로 이곳에?”

“강한월 그 개자식의 함정에 빠져 이리되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런데… 여기엔 너하고 나밖에 없는 거냐?”

원숭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다른 건 몰라도 돼지가 여기서 죽었다는 건 알려줘선 안 된다. 그럼 자신이 혈령을 흡수한 걸 눈치챌 테니까. 아래층에 말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

“네. 형님하고 저밖에 없습니다. 저 혼자 외로웠는데 형님이 오셔서 다행입니다. 분명 여기를 탈출할 방법이 있으시죠?”

“하하하, 알면서 뭘 묻나?”

토끼는 여유 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로 원숭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약해 보이는 순간 등에 칼을 꽂을 놈이니까.

“원숭이 아우는 아무 걱정 말게. 이런 상황에 대비한 비술이 있으니.”

“교토삼굴(狡兎三窟)! 지혜로운 토끼는 굴을 세 개 준비한다더니 역시 형님이십니다. 도대체 어떤 비술을 준비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강한월 그 썩을 놈은 내 공력과 법력을 모두 소멸시켰다고 안심하겠지만, 실은 내 골수에서 피가 새로 만들어질 때 법력도 함께 생성되는 비술을 연마했다. 아마도 서너 달 정도면 이곳을 탈출하기 위한 법력을 모을 수 있을 테지.”

즉석에서 거짓말을 지어내느라 토끼는 머리에 쥐가 날 뻔했다.

다행히 원숭이는 자신의 말을 믿는 것 같았는데….

“대단하십니다, 형님. 이 아우는 형님만 믿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원숭이는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토끼의 말이 거짓이라는 감을 잡기는 했는데, 방향은 조금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서너 달이라고?

아니야, 분명 두세 달일 거야.

제길… 시간이 촉박하군.

* * *

요 며칠 강한월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토끼 혈승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음에도 두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청보는 법력을 빼앗을 요량이었다 치고, 자신은 왜 불려갔던 걸까?

그리고… 장준검은 왜 소식이 없을까?

의문을 풀 기회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원로원주 사마염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동창의 조철상이 또다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북경에서 있었던 일을 추궁하려는 걸까?

느낌이 좋진 않았지만 강한월은 조철상이 머물고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낙양 뒷골목의 허름한 객잔.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동창 간부가 머물 만한 곳은 아니었다.

조철상은 평범한 농부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불안하고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다.

“어서 오시오, 강 소협.”

“조 백호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일전의 일로 동창에서 추궁을 당한 겁니까?”

“허허, 추궁은 당하지 않았소. 왜냐하면… 동창으로 복귀하지 않았거든.”

“네? 아니 어째서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만나자 한 거요. 좀 심각한 이야기인데… 술 한잔하면서 말해도 되겠소?”

강한월은 조철상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조철상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강한월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동창 이형백호 조철상이 강한월 소협께 사죄드리오. 삼황자님의 건으로 초대했던 건 사실 당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음모였소.”

“조금 당황스럽네요. 하지만 조 백호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죠?”

“물론 사정은 있소. 상명하복의 조직인 동창에서 상부의 명을 거역하기 어려웠고… 그것보다는 장준검 천호의 목숨을 구해야만 했기 때문이오.”

역시 그런 거였나?

강한월은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 * *

문무대로 돌아오는 길.

강한월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고, 힘든 결정을 해야만 했다.

조금 전, 조철상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약 함정이라면… 적들은 단단히 준비를 갖췄을 테고, 삼황자의 건보다 더 위험할 것이 뻔했다.

어떡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문무대 문 앞.

강한월은 즉각 대원들을 소집했다.

“동창 조철상을 만나고 왔다.”

“그자가 또 왜요?”

위청보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 그런 일이 있었으니 동창에 치가 떨리는 것은 당연한 일.

“이번엔 장준검 천호 건이야. 그가 몹시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더군.”

“장 천호가? 그럼 구하러 가야지!”

당장에라도 출발할 것처럼 광군영이 벌떡 일어섰다가, 소영영의 싸늘한 눈빛을 받고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장,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요?”

“우리와 관련된 일로 장 천호가 동창 내에서 의심을 받았다는군. 최상부의 명으로 그를 감금했는데 오래 버티기는 힘든 상황인가 봐.”

조철상이 강한월을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미 사과를 받은 일이고, 지금 조철상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더해 줘서 좋을 건 없으니까.

하지만 애써 덮어줬음에도 동창과 조철상에 대한 대원들의 생각은 이미 최악이었다.

“저는 조철상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래. 함정일 수도 있지. 하지만 장 천호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해.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데다가, 토끼 혈승 사건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장 천호를 구하긴 구해야겠네요. 단, 동창의 음모를 조심하면서.”

다들 불편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소영영이 강한월의 생각에 부합하는 말을 했다.

역시 그녀는 세심한 면이 있었다.

대장이 어떤 결론을 내놓고 있는지 이미 눈치챘으니까.

“소영영의 말이 맞아. 장 천호는 꼭 구해야 해. 몇 안 되는 우리 우군이고 그만큼 능력도 있으니까. 조철상의 말에 따르면 그가 구금되어 있는 곳은 황실의 비밀 조옥(詔獄)이라고 한다. 동창에서 관리하는 곳인데 북경 인근에 있다는군.”

“황실 비밀 조옥이면 경비가 만만치 않겠네요?”

“황실에 위협이 되는 천하의 악인들을 가둔 곳이니 분명 범상치 않을 거야. 그곳을 지키는 무인들도 동창 무인들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동창이 관리하는데 경비 무사는 동창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가 지키는 걸까요?”

“글쎄. 조철상도 그건 모르더군.”

누가 경비를 서는지는 사실 걱정하지 않았다.

동창이 아니라면 금의위거나 북진무사 휘하의 옥졸들일 텐데, 싸워서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그곳이 황실 조옥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수감된 죄수를 빼내는 순간 역적으로 몰리게 되는.

“아직은 황실과 대놓고 척을 질 수는 없어.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침투해서 장 천호만 조용히 구해와야 해. 우리 신분은 들키면 안 되고.”

“무공이 높은… 특히 경공이 뛰어난 사람이 가야겠군요?”

“맞아. 광군영과 진가린이 나와 함께 가는 것으로….”

“그건 안 돼요!”

강한월이 인원을 지정하자 소영영이 즉각 반발했다.

“단순히 장 천호를 구출하는 임무면 소수가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맞겠죠. 하지만 이건 혈승의 함정일 수도 있잖아요? 구출조가 감옥에 침투할 때 뒤를 봐줄 인력도 필요해요. 최대한 많은 인원이 함께 가야만 한다고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결국 연소흔을 치료해야 하는 소영영이 혼자 남고, 나머지 전원이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소영영은 기분이 좋았다.

이 결정이 조만간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상상도 못 한 채.

* * *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게 짐을 꾸려놓고 강한월은 홀로 술잔을 들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다시 고민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혈승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은 후 개인의 감정은 억제하려 애써왔다.

문무대의 대장은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만 하니까.

하지만 이번 건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했다.

함정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자신과 대원들을 위험으로 내몰면 안 되는 것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장준검 만큼은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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