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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91화 (91/210)

091화. 비밀 감옥 (3)

* * *

앞서 달리는 진가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뭔가 일이 잘 풀리려는 건지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적과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이거 잘하면 검 한번 휘두르지 않고 임무를….

—잠깐!

뒤따라오던 강한월의 급한 전음에 달리기를 멈췄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느낌이 안 좋아. 이 앞이 특상 죄수들의 수감실이었지?

—맞아요. 요 모퉁이만 돌면 사파 괴물들의 방이에요.

—속도를 늦추고 조심히 가야겠다. 앞쪽 수감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좋은 것 아닌가?

진가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심조심 전진했다.

드디어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대장, 이게 도대체 무슨…?

좌우 수감실의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단체로 시간 맞춰 탈옥을 했단 말인가? 아니면 누가 고의로 열어준 건가?

모두 도망친 거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의도된 거라면… 도대체 왜?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텅 빈 수감실들을 지나 양 갈래 길로 나뉘는 지점에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조심!”

쐐애액.

탕!

강한월의 경고와 무언가 날아드는 소리, 그리고 진가린이 검으로 쳐내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백학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손목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날아든 것은 쇠사슬 조각, 그걸 날린 사람은….

“어린 것이 제법이구나. 나 비뢰도의 암기를 막다니.”

앞쪽 어둠 속에서 장발의 괴인들이 나타났다.

비뢰도 나백송, 양강혈창 주태민, 파계마승 공심, 그리고 남원대장군 홍원승까지 있었다.

붉게 빛나는 눈빛, 머리카락이 출렁일 정도로 강렬히 발산되는 내력.

수감실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폐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천하를 굽어보는 절대자의 위압감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클클, 쥐새끼를 잡으라 하길래 누군가 했더니, 장 천호 네놈이었군.”

양강혈창의 웃음에는 진득한 적의가 담겨있었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원대장군을 제외한 세 명의 사파 괴물들은 모두 장준검의 손에 체포되어 이곳에 갇힌 것이니까.

“강 소협, 조심하시오. 저들은 체포되기 전 절대경에 근접한 고수들이었소. 지금은 아마도 모종의 비술을 통해 더 강해졌을 거요….”

등 뒤에서 장준검의 우려가 들려왔다.

절대경의 고수가 이 감옥에 네 명이 있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눈앞의 고수들이 뿜어내는 기도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강한월의 고민이 깊어졌다. 혼자라면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을 테지만, 장준검과 진가린을 보호하면서는….

—대장, 제가 기회를 만들 테니 장 천호를 데리고 빠져나가요.

—무슨 소리야? 네 실력으론 턱도 없으니 나서지 말고… 가린!

강한월의 전음은 들을 생각도 않고 진가린이 몸을 날렸다.

무모했지만 생각 없이 한 행동은 아니다.

장백산을 다녀온 후 자신이 겪고 있는 변화에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려웠던 몸속 기운이 사부님의 영선기라는 걸 안 후 적극적으로 그 기운을 받아들였는데, 이십 년 가까이 스스로 힘을 키웠던 영선기는 본격적으로 그녀와 동화되는 중이었다.

샤아악.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뻗어간 백학에선 반짝이는 별빛이 쏟아졌다.

흠칫 놀란 비뢰도가 피하는 사이 자연스레 궤적을 바꾼 백학이 양강혈창을 노렸다.

“어림없다!”

양강철창은 진기가 주입된 쇠사슬을 창처럼 꼿꼿이 세워 휘둘렀다.

서른두 가지 변화를 내포한 창술이었지만 그녀의 육감에는 훤히 읽혔다.

빠른 발로 창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검을 찔러 넣는 그녀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지켜보던 강한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가린이 초고수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인정한다. 심안을 타고났고, 신선의 무공이라는 영선기를 지녔고, 소요자와 천마의 도움으로 공력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모른다. 절대경의 벽을 넘은 자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타아앙!

그녀가 투로(鬪路)를 읽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 양강철창의 쇠사슬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들어 백학을 가격했다.

힘을 감당치 못하고 정신없이 밀려나는 진가린.

그 순간 파계마승의 솥뚜껑만 한 주먹은 이미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타앙!

다시 한번 울리는 타격음.

재빨리 개입한 강한월은 아슬아슬하게 파계마승의 주먹을 튕겨낸 후, 진가린의 뒷덜미를 붙잡아 뒤로 물러났다.

“가린! 넌 도대체가…!”

“아예 헛짓한 건 아니라고요!”

진가린이 가리키는 곳을 본 강한월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와 일 합을 주고받았던 양강철창이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것이다. 피부가 조금 갈라진 얕은 자상일 뿐이지만, 절대경 고수에게 상처를 입힌 건 분명한 사실.

백학의 힘, 아니 그보다는 영선기의 특별함일 텐데….

“네 실력이 아니야! 더 이상 나서지 말고 뒤로….”

강한월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양강철창, 파계마승, 비뢰도가 일제히 쇄도한 것이다.

타앙, 챙, 쿠아앙.

순식간에 십여 초를 주고받은 후 각자 서너 걸음 물러섰는데, 강한월의 표정이 창백했다.

업고 있는 장준검에게 피해가 갈까 봐 충격을 튕겨내지 못하고 몸으로 흡수했는데 그게 무리가 됐다.

“클클, 네놈도 괴물이었구나. 하지만 네 약점을 알았으니 승부는 이걸로 끝이다!”

양강철창이 쏜 붉은 강기가 장준검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강한월이 급히 검을 휘둘러 강기를 튕겨냈다.

연이어 날아오는 강기, 권기, 쇠사슬 조각. 모두가 장준검만을 노렸다.

비겁한 짓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들은 사파의 악인인데다 지금은 비술에 걸려 더 잔인해졌으니까.

쐐애액, 타앙, 쐐애액.

회수를 거듭할수록 삼 인의 손발이 척척 맞아갔고, 강한월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겨났다.

보다 못한 진가린이 다시 뛰어들려고 했지만 워낙 빠른 공방이 계속되는 탓에 틈을 찾기 어려웠다.

“강 소협! 나를 내려놓으시오.”

“안 됩니다!”

“공력이 회복되고 있소. 잠깐은 버틸 수 있소이다.”

장준검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하지만 안 될 말이었다.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진가린! 부탁한다.”

강한월은 장준검을 뒤로 던졌고 진가린이 재빨리 받아서 업었다.

무영보를 익힌 진가린의 빠른 발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인데, 그래도 오래 버틸 순 없을 거였다. 그 전에 자신이 저들을 없애야만 했다.

족쇄를 풀어버린 강한월의 몸에서 찬연한 금빛 광채와 시커먼 마기가 줄기줄기 뿜어졌다. 동굴 벽이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공력을 뿜으며 강한월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저년은 내가 맡겠소.”

비뢰도와 파계마승이 강한월과 충돌하는 사이 양강혈창은 진가린에게로 몸을 날렸다.

동굴 한쪽에선 폭음과 광풍이 휘몰아치는 대결이 펼쳐졌고, 다른 한쪽에선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천마에게 하사받은 무영보가 대단한 절기라지만 진가린이 반의반 각은 버틸 수 있을까?

강한월은 마음이 급했다.

구성에 달한 마불진경의 공력이 검날에 맺혔고, 파사(破邪)의 범음청량 파장까지 덧입혔다.

그야말로 최선에 최선을 더한 검.

샤아악.

“크아악.”

파계마승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주먹을 감싸고 있던 강기가 부서지며 허연 뼈가 드러났다.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던 강한월의 검은 제비처럼 날래게 방향을 꺾었고, 비뢰도의 왼쪽 어깨에서도 피 분수가 터졌다.

됐다!

이렇게 두세 번만 더 공격하면….

“대장군! 계속 뒤로 숨을 거요? 한 줌 핏물로 변하고 싶냐는 말이오!”

주먹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파계마승이 한편에서 넋 놓고 있던 대장군을 향해 외쳤다.

심하게 아픈 듯 한편에서 떨고 있기에 강한월도 별 신경을 안 쓴 것인데, 실은 남원대장군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살인 욕구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침입자를 척살해야 한다는 각인된 명령과 비술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자의식의 싸움.

하지만 강철 같은 의지로 버티기엔 걸려있는 비술의 힘이 너무나 강했다.

크르르릉.

고개를 든 대장군의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손목 수갑에 달려 있는 쇠사슬이 꼿꼿이 일어서며 반 장 길이의 장군도(將軍刀)로 변했다.

상대해야 할 적의 수가 늘어나는 상황.

강한월은 방향을 바꿔 대장군을 향해 검을 날렸다. 완전한 비술의 노예로 각성하기 전에 먼저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타아앙!

선명한 강기를 뿜어내는 쇠사슬이 검을 맞받아쳤다.

손목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강한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범음청량의 파장으로도 대장군의 강기를 가를 수 없었던 탓이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파계마승이나 비뢰도보다 훨씬 강한 적이 등장했으니….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진가린의 상황도 급박했다.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며 요리조리 피하곤 있지만 이미 몸 곳곳에 혈선이 그려졌고, 등에 업은 장준검의 어깨에도 핏물이 번졌다.

출혈은 속도를 느리게 만들 터. 진가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작전을 변경해 그녀를 구하러 몸을 날리려는 찰나….

“늙다리 괴물아! 감히 내 동생에게!”

갑자기 나타난 곽철이 양강혈창에게 검을 던졌다.

대수롭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흐름을 끊는 효과는 있었다.

당황한 양강혈창이 주춤하는 사이, 득달같이 달려온 조철상이 장준검을 받아 업었다.

“천호님은 내가 챙길 테니 진 여협은 적을 상대하시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곽철과 조철상의 실력으로 양강철창을 상대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진가린과 손발을 맞추면 약간의 시간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 시간 안에 세 적을 무찌르지 못하면 동료들이 죽는다.

세 수 안에 끝내야 한다.

강한월은 이를 악물었다.

“하아압!”

평소와 다르게 기합성까지 내지르며 파계마승을 향해 돌진했다.

찬연한 금빛으로 빛나는 검이 쭉 뻗어오자 겁먹은 파계마승은 몸을 움츠렸고, 비뢰도가 날린 쇠사슬 두 개가 빛살처럼 파고들었다.

검을 회수해 쇠사슬을 막아야 했지만 강한월은 몸을 조금 비틀며 그대로 전진했다.

허리와 허벅지를 스쳐 가며 가볍지 않은 상처를 내는 쇠사슬. 하지만 멈추지 않은 덕분에 파계마승의 왼팔을 자를 수 있었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는 마승의 목을 끊으려는 순간, 벼락같이 떨어지는 대장군의 강기를 피하기 위해 뒤로 몸을 굴려야 했다.

강한월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파계마승의 왼팔을 잘랐지만 자신도 상처를 입었으니 이건 절반의 성공도 못 되는 것.

역시 대장군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 건가?

뒤에서 들려오는 곽철의 비명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 * *

문무대 지하실.

철창 건너편의 원숭이가 신경 쓰여 토끼는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법력이 회복될 거라고 뻥을 쳐 놨으니 뭔가 시늉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기랄. 원숭이 녀석만 아니면 대자로 뻗어서 편하게 잘 텐데….

의미도 없는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며 토끼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토끼 형님. 오늘따라 표정이 심각하신 걸 보니 성과가 좀 있으신가 봅니다?”

“그래. 생각보다 법력의 회복이 빠르구나. 여기 지하실이 터가 좋은가 보다.”

그렇다는 말이지?

어두운 그늘에 가려진 원숭이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말에게 빌린 혈령의 유효기간은 단 하루.

토끼가 법력 회복에 집중하며 두 눈을 감은 이때를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을 테니….

토끼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원숭이는 오른손 검지를 깨물었다.

기분 좋은 통증과 함께 서서히 배어 나오는 피.

온 신경을 집중해 천천히 글자를 썼다.

혈살(血殺).

미약한 피 냄새가 풍겼지만 다행히 토끼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중얼중얼 입속으로 혈언(血言) 주술을 외우자 바닥의 피 글자가 두둥실 떠올랐다.

천천히 토끼 앞으로 날아가는 혈살.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이 지나고 피 글자가 철창살을 넘어 토끼 앞에 도착했을 때, 원숭이가 나직이 말했다.

“토끼 형님. 나중에 지옥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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