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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92화 (92/210)

092화. 비밀 감옥 (4)

* * *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면 정말로 답이 없었다.

강한월의 각오는 비장했다.

먼저 비뢰도를 향해 탄지신통 십여 줄기를 쏘았다. 이걸로 상대를 어쩔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저 비뢰도의 손을 한순간 묶을 수 있으면 성공.

뒤이어 강한월의 왼손에서 먹물 같은 진득한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불진경을 통해 익히긴 했지만 마기가 너무 강해 실제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장법, 마화만발(魔花滿發).

마기가 공중에서 소용돌이치며 대장군의 온몸을 감쌌다.

물리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흉포한 마기가 침투하며 정신을 잃게 만드는 수법.

과연 대장군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지금이다!

서늘한 금빛을 흩뿌리는 강한월의 검이 반월을 그리며 날았다.

막 대장군의 목을 베려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기의 충격으로 인해 잠시 정신이 돌아온 것인데, 회한을 담은 처량한 눈빛이 애처로웠다.

강한월은 차마 검을 내리치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망설임은 후회스러운 결과를 냈다.

멈칫하는 순간 마기의 공능이 약해졌고, 비술이 다시 대장군의 정신을 잡아먹은 것이다.

퍼억!

대장군의 쇠사슬에 복부를 강타당한 강한월이 서너 걸음 밀려났다.

호신강기가 몸을 보호해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지금 부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옆구리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곽철, 한쪽 팔이 너덜너덜한 조철상.

진가린 혼자 기를 쓰고 양강철창과 맞서고 있는데 오른팔이 마비된 것인지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내가 일을 망친 건가?

밀려드는 후회로 애가 바짝 타는데… 갈림길의 저쪽 편으로부터 애타게 기다리던 기척이 느껴졌다.

“광군영!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사정이 있었다고.”

얼마나 빠른 속도였는지, 짧게 질문하는 사이 시야에 나타난 광군영은 ‘있었다고’를 말하는 순간에는 벌써 양강혈창에게 장력을 날리고 있었다.

콰아앙!

이미 몇 번이나 본 적 있는 육합흑철마장이지만, 천마의 특별교육을 받은 후라 위력은 비교가 되질 않았다.

정신없이 뒤로 밀리는 양강혈창.

강한월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광군영. 빨리 그자를 처리하고 나와 함께….”

“대장! 지금 그럴 시간 없어. 빨리 도망쳐야 해!”

양강철창을 여유 있게 몰아붙이면서도 광군영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던 강한월은 갑자기 드는 싸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광군영이 달려온 길에서 무언가 몰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몰라. 혈제 영역 비슷한 것 같아. 괴물들이 오고 있다고!”

천마군림보로 양강혈창의 움직임을 묶으며 광군영이 답했다.

이제 보니 그의 옷은 살점과 핏물로 온통 더럽혀져 있었다. 마치 지옥이라도 뚫고 온 것처럼.

어떤 괴물인지 물으려는 순간 그것들이 모습을 보였다.

좁은 동굴 길을 꽉 채우고 밀려오는 수백 명의 죄수들.

핏물 속에서 막 건져낸 듯 붉게 젖은 모습이었는데, 군데군데 눈에 띄는 몇몇은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광군영, 설마 저들은…?”

“그래, 혈제 영역보다 더 지독해. 머리통을 날려도 죽질 않는다고!”

기괴하고 끔찍한 모습에 당황하는 사이, 붉은 죄수들이 몰려와 길을 막았다.

벌레처럼 집단으로 뭉쳐 다니며 붉은 눈을 번뜩이는 그들. 코와 입에서는 진득한 붉은 점액을 꾸역꾸역 뱉어내는데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크하하하, 이제 알겠느냐? 이 감옥 전체가 피 개미 군단의 영역이라는 것을. 저 혈의병(血蟻兵)들은 주인님이 살아계시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 불멸의 병사들이다!”

외팔이가 된 파계마승이 자랑스레 호통을 쳤다.

혈의병의 힘을 자신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 앞뒤로 강적에 둘러싸인 강한월 일행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광군영. 여기서 싸우면 끝이 안 나겠다. 빨리 뚫고 나가야겠어. 선두를 부탁할게.

—뚫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우리 쪽에 부상자가 많으니 금방 따라잡힐 거야. 동굴 밖으로 나가도 마찬가지라고.

—쫓아오지 못하게 해야지. 내가 뒤를 막겠네.

—대장 혼자? 절대 안 돼! 이 만만치 않은 고수들과 저 죽지도 않는 개미 떼를 혼자 어떻게 막겠다고? 죽으려고 환장했어?

—마신환을 얻은 동굴에서 마 혈승이 썼던 방법 알지? 그 방법을 쓸 거야.

마신환을 얻은 동굴?

광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결국 강한월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어쩌면… 하지만 대장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인데.

—광군영. 망설일 시간 없어. 셋을 센 후 시작한다. 하나, 둘, 셋!

강한월이 탄의 묘리를 살려 검을 튕겼고, 주먹만 한 기탄(氣彈) 수십 개가 사방으로 날았다.

양강혈창 등이 기탄을 막느라 주춤한 사이, 광군영은 시커먼 마기를 줄기줄기 뿌리며 혈의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다들 광군영을 따라가!”

광군영이 전력을 다한 육합흑철마장을 갈기자 앞을 막던 혈의병 몇몇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장력을 갈기면서 가면 속도만 늦춰질 뿐. 이후엔 육탄 돌파였다.

천마에게 직접 전수받은 마신철갑(魔神鐵甲)의 호신강기를 몸에 두르고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살점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면서 길이 열렸고, 장준검을 업은 진가린과 곽철, 조철상이 죽을힘을 다해 뒤따랐다.

펑, 펑, 펑.

다시 한번 기탄 수십 개를 발사한 후 강한월도 몸을 날렸다.

막 조철상의 뒷덜미를 움켜쥐려는 혈의병의 팔을 벤 후 뒤를 지키는데, 서늘한 도강(刀剛)이 떨어져 내렸다. 뒤를 바짝 쫓아온 대장군이 쇠사슬을 휘두른 것이다.

콰아앙!

강한월도 급히 검강을 일으켜 맞받아쳤다.

마음먹고 제대로 한다면 어려운 상대가 아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비뢰도가 날린 쇠사슬 조각들과 양강혈창이 쏜 창기가 쉬지 않고 날아들었다.

탕, 콰앙, 샤아악.

동료들의 뒤를 보호해야 했기에 강한월은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혈의병들을 붙잡아 뒤로 던졌다.

날아오는 도강과 쇠사슬에 맞은 혈의병이 산산조각 나 휘날렸다.

조각난 혈의병은 앞쪽에도 널려 있었다.

발에 밟히는 뼛조각들, 잘린 채로 꿈틀거리는 신체들을 보니 광군영이 제대로 뚫고 가는 듯했다.

그래, 이렇게 조금만 더….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광군영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뒤따르던 곽철과 조철상이 달라붙는 혈의병을 떼어내지 못하자 걸음을 멈춘 것이다.

“나를 내려주시오. 이제 혼자서 갈 수 있소!”

장준검이 진가린의 등에서 내렸다.

겨우 조금 회복된 공력을 무리하게 끌어올리면 내상이 심해지겠지만,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진가린이 뒤돌아서 곽철과 조철상에게 붙어있는 혈의병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광군영은 다시 달릴 수 있었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눈처럼 휘날리는 광경을 연출하며 앞으로 돌진했다.

잠시 후, 동굴 입구가 보였다.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 있지만 마신철갑으로 뚫으면 그만.

“거의 다 왔다. 다들 힘내!”

“광 선배, 대장이 안 보여요!”

“뭐라고?”

광군영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제는 앞을 막는 혈의병은 거의 없었지만 뒤쪽에선 아직도 동굴을 빽빽이 막고 있었다.

대장을 두고 먼저 나가도 될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대장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는다는 말인가?

마신철갑에 공력을 집중시키며 광군영이 철문을 향해 뛰었다.

콰아앙!

그 순간 강한월은 혈의병에 둘러싸인 채 대장군 등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들을 붙들어 놓는 것이 동료들의 탈출에 유리할 듯하여 일부러 거리를 벌인 것이다.

갑자기 코끝에 상쾌한 바람이 느껴졌다.

외부의 공기가 들어온다는 것은 동료들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후읍.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강한월은 동굴 입구 쪽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금검문의 금광분천(金光分天).

일체의 변화 없이 무식하게 직진만 하는 검식이라 실전에선 거의 쓸모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딱이었다.

콰콰콰콰아~

동굴 천장과 바닥을 긁으며 직선으로 뻗어가는 금빛 검기. 가로막는 혈의병의 몸도 둘로 나뉘며 대나무 쪼개지듯 길이 열렸다.

강한월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검기가 열어준 얇은 틈으로 쇄도했다.

등 뒤로 도강과 쇠사슬이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드디어 동굴 입구가 보였다.

두세 호흡이면 돌파할 수 있는 거리.

하지만 그때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지를 상실한 것 같던 혈의병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붉은 진액을 사정없이 뿜어 댔는데 강력한 독 성분인 것 같았다.

그 틈에 바로 뒤까지 따라온 대장군과 비뢰도.

몸 안으로 금빛 검기를 순환시켜 독기를 태우며 강한월은 있는 힘껏 앞으로 몸을 던졌다.

동굴 입구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

그 너머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발을 구르고 있는 동료들.

그들을 눈에 담으며 강한월은 품속에서 주먹만 한 쇠구슬을 꺼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천뢰.

암기라 생각한 건지 비뢰도가 쇠사슬을 날려 천뢰를 맞췄다.

콰아아아앙!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섬광과 함께 터져 나오는 압력과 열기.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장!”

시야를 가렸던 먼지와 연기가 가라앉은 후, 완전히 무너진 동굴 앞에 강한월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과 눈썹은 열기에 그을리고 옷은 완전히 넝마 조각이 되었지만,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한월의 표정은 밝지 못했는데, 먼저 탈출한 대원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명의 군병들 때문이었다.

“장 천호님. 저들은 누굽니까?”

“황실의 시위상직군(侍衛上直軍)이오. 숙영지가 바로 이 숲 건너인데, 아까 기관이 발동될 때 저들에게도 신호가 간 것 같소.”

장준검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시위상직군이라면 황제 직속의 어림군(御臨軍). 개개인의 무위야 별것 아니지만, 저들과 대적하는 순간 그야말로 역적이 되는 것이다.

“장준검 천호, 조철상 백호. 어서 그 역도들을 데리고 투항하지 못하겠소!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아 해명의 기회는 줄 터이니 즉시 무릎을 꿇고 포박을 받으시오!”

시위상직군 수장의 호통을 듣고 강한월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여차하면 경공을 발휘해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저들이 장준검과 조철상을 알아봤으니 그것도 마땅치 않게 되었다. 여기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장준검과 조철상이 역적으로 몰리는 걸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장군. 어째서 저희를 역적이라 하십니까? 저희는 위기에 처한 동창의 장 천호를 구한 것뿐입니다만.”

“닥쳐라! 저곳은 황실의 특별 감옥이다. 장 천호가 왜 저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라도 저곳의 수감자를 빼내면 그것이 곧 황실을 거역하는 것이다!”

“저 동굴은 괴물들의 소굴이었을 뿐입니다.”

“괴물? 허허. 역적놈이 궁지에 몰리니 별 헛소리를….”

강한월은 말없이 손을 뻗어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바윗덩이에 짓눌린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돌무더기를 밀쳐내고 일어서려 애쓰는 그것은 머리 위가 통째로 사라진 혈의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하나 더. 하반신이 사라져 긴 내장을 쏟은 채로 바닥을 기고 있는 모습.

“어, 어찌 이런 일이…?”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모습에 장군은 할 말을 잃었고, 일부 병사들은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지휘봉을 번쩍 들어 웅성대는 병사들을 진정시킨 장군이 다시 외쳤다.

“요망한 일이로군. 좋다. 저 괴물들에 대해선 별도로 조사하겠다. 하지만! 너희가 역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엄격히 사용이 금지된 화약을 쓴 사실을 부정하진 못하겠지?”

천뢰를 사용한 것은 잡아뗄 여지가 없었다.

이곳의 모두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니까.

말 혈승은 소지한 것만으로도 장준검에게 체포될 뻔했으니, 직접 천뢰를 사용한 자신이야 오죽하겠는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질 때, 숲을 가로지르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도움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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