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탈옥
* * *
십여 기의 말이 힘차게 달려왔다.
앞장서서 달리던 위청보가 강한월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대장, 늦어서 미안해요. 저기… 굳이 직접 오시겠다고 하셔서요.”
황태자가 몸소 왕림하셨구나.
박위나 소림의 무승을 보낼 줄 알았는데 직접 말을 달려오다니, 강한월은 감격했다.
마침 황제의 어림군과 대치하는 상황이니 최상의 조력자가 생긴 셈.
반면 시위상직군 장군은 표정이 굳었다.
“신 왕수윤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왕 장군. 늦은 밤까지 수고가 많으시구려.”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데 밤낮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침 황실 조옥을 침탈한 무리가 있어 체포하려던 차입니다.”
“혹시 그 무리가 저기 저 친구들을 말하는 거요? 저들은 장준검 천호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수행 중인 내 수하들인데?”
황태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감히 시비를 가릴 입장은 아니었지만 왕 장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의 입장이 그러시다면 장 천호는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폭약을 써서 황실 조옥을 파괴한 자는 체포해야겠습니다. 이는 명백히 황법을 어긴 것으로써….”
“그건 왕 장군이 잘못 안 거요. 저 친구는 일반인이 아니며 폭약을 쓸 권한이 있소.”
황태자가 강한월에게 눈짓했다.
무슨 뜻인지 눈치챈 강한월은 황태자에게서 받은 패를 꺼냈다.
“저건 황룡금패? 오호도독부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패이니 폭약 사용 권한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왕 장군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떨렸다.
황태자가 이렇게 깊게 개입된 거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그렇지만 뭐요? 곽 공공이 화를 낼까 봐 걱정된다는 말이오? 그도 아니면 별궁의 귀빈이? 이보시오, 왕 장군! 장군의 충심은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소?”
얼굴이 시뻘게진 왕 장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당히 권위를 내세우는 황태자, 얼마나 강할지 도무지 짐작도 안 가는 고수들.
권력으로나 무력으로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무리였다.
“신 왕수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선 상세한 보고서를 쓸 수밖에 없음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시위상직군이 대오를 맞추어 떠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강한월이 황태자에게 감사를 전했다.
“전하. 이렇게 친림하실 줄은 몰랐는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내가 받았던 도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이거 생각보다 일이 커졌어.”
“송구합니다.”
“자네 잘못은 아니지. 언젠가는 터질 일이 조금 당겨지는 것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자리를 옮기세. 부상자들 치료도 해야겠고, 마침 장 천호도 구했으니 같이 이야기 좀 해보자고.”
* * *
원숭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혈살을 맞고 급사한 토끼의 혈령이 흡수되고 있었다.
동료를 죽인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힘을 얻은 것이 기쁠 뿐.
하지만 만족스레 올라간 입꼬리와는 반대로 속으로는 욕을 퍼붓는 중이었다.
‘쳇, 토끼 녀석이 뻥을 쳤구나. 법력을 회복 중이기는 개뿔….’
혈령과 함께 법력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무너졌다. 그래도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 기대치 않았던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바로 토끼의 혈령에 각인되어 있던 몇 개의 기억들.
그중 특히 관심을 끄는 건 삼황자에 관한 것이었다. 뜻밖에도 토끼는 삼황자를 혈노로 만들었고, 혈노를 지배하는 혈령의 힘은 자신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향후 삼황자가 황제로 등극한다면 자신이 이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는 이야기.
횡재도 보통 횡재가 아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뱀 혈승을 먼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찜찜했는데….
한 명에게 굽신거리는 대신 만인의 위에 설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원숭이가 쇠창살을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손끝에서 새빨갛고 투명한 무언가가 흘러나와 자물쇠 구멍으로 들어갔다.
철컥.
문이 열렸다.
기지개를 거하게 켠 후 원숭이는 수감실을 나와 지하 삼층으로 향했다.
* * *
갈가리 찢긴 채 널브러져 있는 궁녀의 시체를 보고 곽 공공은 마른침을 삼켰다.
울화를 참지 못한 귀빈이 아무나 붙잡고 화풀이를 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곽 공공. 그 감옥에 내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모르지는 않겠죠?”
물론 알고 있었다. 그걸 위해 실제로 바쁘게 뛴 건 자신이니까.
“무려 십 년이에요! 초절정의 고수들을 체포하고 것도 모자라 남원대장군에게 역모죄를 씌우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불사의 혈의병들을 키우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비술의 힘을 쏟아부은 줄 아세요? 근데 그걸 하루 만에 물거품으로 만들어요?”
곽 공공은 억울했다.
남원대장군과 비뢰도 등에게 비술을 걸어놨으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거라고 자신했던 건 귀빈 자신이었다. 게다가 이 사태의 원인이 된 장준검의 감금을 지시한 것도 귀빈 아닌가?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가 개입하는 바람에….”
“흥, 황태자 그 아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분명 뒤에서 수작질을 벌이는 집단이 있는데 그게 누구냐는 말입니다!”
“소림이 뒤를 받치는 건 분명하고, 또 고려에서 온 술법가도….”
“뻔한 이야기는 그만 해요! 윤 장군의 보고를 곽 공공도 들었잖아요? 소림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번 일엔 분명 다른 배후가 있어요. 동창의 수장답게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오라고요!”
곽 공공은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실은 그 자신도 궁금하긴 했다. 봉위선의 건도 그렇고 이번 일도… 도대체 누굴까?
“한 달! 한 달의 시간을 주겠어요. 곽 공공은 모든 힘을 동원해서 황태자의 배후가 누구인지, 그리고 사라진 삼황자는 어디 있는지 밝히세요.”
“명을 받듭니다.”
“명심하세요.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걸. 황제 그 늙은이가 알아서 뒈질 때까지 천천히 즐길 생각이었지만, 황태자가 이리 나온다면 나도 계획을 바꿀 수밖에. 번천지계(翻天之計)를 시작할 겁니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각오했던 일이지만 막상 코앞에 닥치니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준검이 너는 이 아수라장에서 빠져나가서.
* * *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원숭이는 말과 마주 섰다.
“자네 성공했구나! 정말 수고 많았네. 큰일을 해냈어.”
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단순히 감격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걸 원숭이는 알았다. 말은 두려워서 떠는 것이다. 자신도 토끼처럼 잡아먹힐까 봐.
“흐흐, 자네가 혈령의 힘을 빌려준 덕이지.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 말라고.”
실은 원숭이는 말도 죽일 생각이었다. 그에게서 빌린 혈령의 힘은 돌려줘야 했지만, 돌려주고 난 후 죽여서 다시 흡수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토끼의 기억을 읽은 후 생각이 바꿨었다. 조만간 뱀을 만나야 하는데 자신이 너무 많은 혈령을 가지고 있는 건 위험했다. 뱀을 자극하는 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
원숭이가 쇠창살을 열고 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혈령이 서서히 흘러 들어오자 말의 표정도 조금씩 펴졌다.
“고맙네, 원숭이. 자 이제 어쩔 셈인가? 탈출할 방법도 생각해 놓았겠지?”
물론 계획은 있었다.
원래는 소영영을 잔인하게 난도질해 쌓인 원한을 풀고 당당하게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계획을 변경했다. 토끼에게서 법력을 흡수하고 말의 혈령도 다시 빼앗아 힘을 키운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었는데, 둘 다 허사가 되었으니 싸워 이길 자신도 없어졌다.
“소영영 그년은 마교의 요물이라 무공이 만만치 않을 거야. 비술도 꽤 하는 것 같고. 지금 우리 상황에선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설사 이긴다고 하더라도 혈령의 손실이 심할 거고. 좀 아쉽긴 하지만 싸우지 않고 탈출하는 게 최선이지.”
“동의하네. 복수야 나중에 해도 되니까. 하지만 소영영을 마주치지 않고 어떻게 탈출한다는 말인가? 문은 저 위쪽 하나밖에 없는데….”
“아니. 나갈 길은 문 말고도 있어.”
원숭이가 한쪽 구석의 오물 배수구를 가리켰다.
“저… 저기로 나가자고?”
“왜? 몸에 똥 냄새가 밸까 봐 꺼려지나?”
“그건 아니야. 목숨이 걸린 일인데 냄새가 문제겠나. 하지만 저 구멍은 너무 작지 않아?”
“하하하, 자넨 내가 유명한 살수라는 걸 모르는 건가? 살수에게 있어 몸집을 작게 만드는 축골공(縮骨功)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내가 도와주면 자네도 충분히 할 수 있네.”
한 시진 후.
문무대 건물에서 멀찍이 떨어진 개천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떠올랐다.
똥오줌으로 범벅이 된 원숭이와 말이었다.
“아!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공기라는 말인가!”
똥 냄새에 마비된 코가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을 리 없지만 원숭이는 제법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해방이군. 하지만 강한월 이 새끼는 정말 지독한 놈이야. 배수구 곳곳에도 쇠창살을 박아놓다니. 원숭이 자네가 없었으면 똥물에 질식해서 죽을 뻔했어.”
“하하하, 토끼 덕분이라고 해두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제 어디로 갈 건가?”
말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저 믿을 수 없는 원숭이 놈이 혹시라도 따라오겠다고 할까 봐 걱정된 것이다.
“그, 글쎄. 일단은 내가 모아 놓은 재산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네만….”
“그래? 그럼 아쉽지만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나는 어디 가볼 데가 있어서.”
“아! 정말 아쉽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그동안 고마웠네.”
“고마우면 돈이나 왕창 벌어 놓으라고. 하하하.”
원숭이는 떠났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물속에서 몸을 씻은 말은, 똥 냄새가 어느 정도 가시자 비로소 길을 떠났다.
원숭이가 간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 * *
사방이 부적으로 도배가 된 문무대의 비밀방.
소영영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온 연소흔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분명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영영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소흔이는 걱정할 것 없어. 이 방은 청보와 내가 특별히 비술 방어 결계를 쳐놓은 곳이라 안전해. 비술을 안 쓰고 맨몸으로 붙을 경우 제갈이 설치한 기관 장치를 이용해서….”
“무슨 비술을 방어한다는 말인데요? 설마… 지하실의 그놈들이 탈출한 거예요?”
“헤헤, 소흔이는 참 눈치도 빨라요. 맞아. 그들이 탈출했어. 하지만 이곳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은 매우 낮으니 걱정 마. 어디 보자….”
소영영이 쟁반만 한 청동거울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주문의 파장과 공명한 거울이 파르르 떨리더니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이 떠올랐다.
“이 불빛 보이지? 이게 그들의 위치야. 이 거울은 모산파의 보물인데, 부적을 붙인 자들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나타내주거든.”
“그놈들한테 미리 부적을 붙여 놓은 거네요?”
“비슷한 거야. 부적을 몰래 붙이긴 힘들어서 가루로 만들었지. 몇 달 전부터 그들이 먹은 음식에 조금씩 섞었는데, 부적의 기운이 몸 안에 축적되어서….”
“어? 잠깐만요. 몇 달 전부터요? 그럼 그놈들이 탈출할 걸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확신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본 거지. 원숭이 혈승이 전에도 한번 사고를 친 적이 있거든.”
“미리 예측을 했으면서 왜 도망치게 놔둔 거예요? 쇠사슬로 꽁꽁 묶어 놓거나 아니면 다리라도 분질러 놓지….”
연소흔이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그녀가 왜 이렇게 열을 내는지 소영영은 이해가 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데다가 아직까지도 면사를 벗지 못하고 있으니 혈승에 대한 원망이 오죽했을까?
순간 탈출을 방관한 진짜 의도를 말해줄까 하다가 소영영은 입을 닫았다.
그래도 명색이 비밀 작전이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언젠가는 다시 잡아 올 테니. 자, 이제 그만 나가보자고. 그들은 이미 멀리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