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뱀과 원숭이 (1)
* * *
강한월과 대원들이 문무대에 복귀했다.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본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제갈윤이었다.
“대장. 일은 잘 보고 오신 거예요?”
“그럭저럭. 제갈 너는 언제 복귀한 거냐?”
“어제요. 며칠 더 있다 가라는 걸 뿌리치고 오느라고 혼났어요. 그보다….”
제갈윤이 손가락으로 소영영을 가리켰다.
제갈세가에 다녀온 썰을 풀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녀가 보고할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대장. 우리 예측이 맞았어요. 저 혼자 있는 틈을 놓치지 않더군요.”
“결국 혈승들이 탈출했구나. 위험한 상황은 없었고?”
“그런 건 없었지만 토끼 혈승은 죽었어요. 예상했던 대로 오물 배수구로 빠져나갔고요.”
“방향은?”
“말은 남쪽으로 가고 있고, 원숭이는 북동쪽이에요.”
청동거울이 방향을 읽어주는 건 십여 일이 한계. 그 후엔 부적의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효과가 사라진다. 그러니 혈승들이 도주한 대략의 방향을 아는 건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탈출을 유도한 건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인데, 정말 기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추후에 밝혀질 문제였다.
“좋아. 더 보고할 것 없으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각자 짐 정리도 하고 곽철은 부상 치료를….”
“대장! 보고할 게 없다니요? 그 고생을 하면서 제갈세가에 다녀왔더니만!”
제갈윤은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제갈세가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시간의 돌을 잘 간수해달라는 부탁만 전달하면 되는 거였잖아?”
“그랬죠.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끝나는 그 말을 전하러 그 먼 호북 제갈세가까지 달려갔던 건데….”
“호북이 멀진 않지.”
“저한테는 멀어요! 어쨌든… 문제가 있더라고요.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무슨 문제? 혹시 시간의 돌을 강탈당한 거냐?”
“다행히 그건 아닌데….”
본가에 간 제갈윤은 삼 일 동안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동안 연락 한번 없던 것에 대해 부친의 엄한 꾸지람을 들었고, 피골이 상접했다며 모친이 음식을 마구 먹이는 통에 배가 터질 뻔했던 것.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못지않게 눈치 주는 사람들도 많아서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어쨌든 삼 일이 지나서야 겨우 세가 태상가주인 조부님을 뵐 수 있었는데….
“반갑게 맞아주시던 조부님이 그 돌 이야기를 꺼내자 표정을 바꾸시더라고요. 어떤 말씀도 안 해주시려는 걸 겨우겨우 설득해서 이야기를 들었죠. 와룡신풍석, 그러니까 시간의 돌은 오 년쯤 전에 어떤 분에게 넘겨드렸데요.”
“시조인 제갈공명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보물을 외인에게 넘겼다고? 그게 말이 돼?”
“안 되죠. 저도 믿을 수가 없어서 계속 캐물었는데, 더 이상 알려주시지는 않았어요. 다만… 세상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겼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지켜낼 사람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가장 믿을 만한 사람?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보물을 지켜낼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고?
순간 강한월의 머릿속에 어떤 인물이 떠올라 흠칫 몸이 굳었다.
* * *
원숭이는 뱀과 직접 연락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대책 없이 황궁의 담을 넘을 정도로 간덩이가 붓지도 않았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황궁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중 식자재를 싣고 들어가는 마차들을 발견했다. 원숭이는 마차 가까이 다가가 혈령의 기운을 슬쩍 뿌렸다.
저 재료가 요리되어 뱀의 식탁에 올라가길 기원하면서.
번화한 객잔에 자리 잡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뱀이라면 자신이 고의로 풍기고 있는 혈령의 위치를 찾지 못할 리 없었고 과연 며칠이 지나자 반응이 왔다. 동창의 무사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오라에 묶여 거칠게 끌려가면서도 원숭이는 태연했다. 아니 실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이 기세등등한 동창 또한 조만간 자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될 테니까.
그렇게 하여 원숭이는 황궁 안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용연향이 은은히 풍기는 고급스러운 실내.
차와 다과를 내온 궁녀들의 아름다운 자태.
그 모든 것을 음미하며 한 시진쯤 기다렸을 때, 중간 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찾아왔나 했더니… 너였구나.”
“하하하. 대형, 안녕하셨습니까? 아, 이젠 대누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태연한 척 너스레를 떨었지만 뱀과 눈이 마주친 원숭이는 뇌가 쪼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회귀 전에도 최강자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이 분명했다.
하긴 황궁에 숨어 온갖 좋은 것을 처먹고 하고 싶은 수련도 마음껏 했을 테니….
“원숭이. 우리가 다시 모이기로 한 날은 아직 멀었지 않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대형과 상의드리려고 왔습니다. 분명 이미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원숭이가 식자재에 묻힌 혈령에는 토끼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술의 왕인 뱀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고.
“불미스러운 일이라… 토끼가 죽은 건 알겠는데 이제 보니 돼지 또한 네 몸속에 있구나. 감히 동료들을 잡아먹고 내 앞에 나타나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냐?”
귀빈의 눈동자가 빨갛게 빛났다.
순간 거대한 구렁이가 온몸을 죄어오는 듯한 압박이 원숭이를 덮쳤다.
“크윽. 마, 말씀드렸잖습니까. 불미스러운 일이었다고. 이,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합시다.”
“말을 잘해야 할 거다. 내가 요즘 심기가 불편하니까.”
압력이 사라졌다.
저릿저릿한 어깨를 주무르며 원숭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인 것이다.
뱀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줘야겠지만 모든 것을 알려줘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정보는 끝까지 자신이 쥐고 있어야 한다. 특히 강한월과 문무대에 대한 것은.
“저는 제천대살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백팔살 비술을 연마하기엔 살수만큼 적당한 직업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원숭이는 자신이 잡힌 일과 이후의 일을 설명했다. 돼지는 고문받다 죽은 것이라 말했고, 토끼도 부상이 심해 앓다가 죽었다고 했다. 뱀이 믿어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설사 진실을 말했더라도 뱀은 여전히 의심할 테니까.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던 네 몸에 돼지와 토끼의 혈령이 흡수된 거라고? 흥, 매우 운이 좋았구나. 아니면… 찢어 죽일 배신자이거나.”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십시오.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십니까?”
“뭐,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그건 그렇고, 널 잡아 가뒀던 자들은 도대체 누구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워낙 비밀스런 놈들이라 정체가 드러날 단서를 주지 않더군요. 다만 확실한 건 마교의 무공을 썼다는 건데….”
원숭이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가며 교묘히 말을 만들었다. 다행히 마교라는 단어는 뱀의 관심을 끈 것 같았다.
“마교? 천마신교가 어찌 알고 우리를 공격한 거지?”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마교에 정착했던 우리 동료가 발각되어 정보를 뺏겼거나, 혹은 혼자 세상을 차지할 욕심으로 천마와 손잡고 우릴 배신한 것이겠죠.”
너무 뻔한 추론이지만 그렇기에 더 그럴듯했다.
동료 중 누군가가 천마와 손을 잡았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 하지만 그 누군가가 자 혈승만 아니라면 겁낼 필요는 없었다.
“천마신교에 대해선 내 따로 알아보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나를 찾아온 목적에 대해선 아직 밝히지 않는구나?”
“밝히고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보시다시피 내공과 법력을 잃은 상태라 대형에게 몸을 의탁하고 싶어서죠.”
“흥, 내공도 없는 쓸모없는 놈을 내가 왜 받아줘야 하지?”
“토끼 형의 혈령이 저에게 있습니다. 혈노가 된 삼황자를 이용하시려면 제가 필요할 텐데요?”
원숭이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응도 이미 예상했던 대로였다.
“감히 나에게 흥정을 거는 거냐? 널 죽이고 토끼의 혈령을 흡수하는 게 더 손쉬운 일일 것 같은데?”
“설마 그 정도 대비도 없이 대형을 찾아왔겠습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저 살수였다고. 동귀어진의 수법에 대해선 제가 전문가입니다. 제가 죽는 순간 혈령도 모두 폭발하도록 술법을 걸어뒀다고요.”
“너….”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세요. 다른 욕심 안 낼 테니 호의호식만 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아, 물론 내공과 법력의 회복도 조금 도와주시고요. 대형에겐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 아닙니까?”
* * *
뜨거운 수증기가 자욱한 화려한 욕실.
원숭이는 향기로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궁녀들이 가져다준 값비싼 술을 즐겼는데, 마치 황제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시간.
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겉보기엔 화려해도 이곳은 뱀의 소굴인 것이다.
혈령이 폭파되는 비술을 걸었다는 건 거짓이었다.
언젠가는 들통이 날 테고 그러면 자신은 죽은 목숨.
그날이 되기 전에 기운을 회복해서 진짜로 비술을 걸어 놓아야만 했다.
뱀이 영약을 보내준다고 했으니 내공은 걱정할 필요 없겠고, 문제는 비술의 근원이 되는 법력.
법력을 빠르게 회복하는 방법은 역시나 익숙한 백팔살 수행법이었다. 하지만 그 수행을 위해선 각 단계마다 열두 명의 희생양이 필요한 데….
원숭이의 눈에 궁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열심히 욕조에 더운물을 붓고 있는 열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궁녀. 순음의 기운이 충만해 보였고 일 단계 제물로는 딱이었다.
황궁 안에서 궁녀를 해친다는 게 좀 꺼림직하긴 했지만….
뭐, 이 정도는 뱀이 뒷수습을 해주겠지.
“아이야, 넌 이름이 뭐냐?”
“전 도아라고 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대인?”
“도아라… 예쁜 이름이구나. 이리 가까이 와봐라. 네가 해줄 일이 있으니. 흐흐흐.”
* * *
같은 비술 계열에 속한 동료이긴 하지만 뱀은 원숭이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럼에도 별궁에 방을 내어준 건 제까짓 게 힘을 회복한들 나한테는 안 된다는 자신감, 그리고 삼황자를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만약 삼황자를 찾아와 혈노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원숭이를 적당히 대우해줄 생각인데, 그렇다고 영원히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니다.
혈령이 폭파되는 비술이 걸린 게 사실인지 확인할 때까지, 만약 사실이라면 그 비술을 해체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원숭이의 역겨운 낯짝을 참아주면 되는 것이다.
당장 급선무는 황태자가 데려간 삼황자의 위치를 찾는 것.
그 임무를 맡은 책임자는 지금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자였다.
“곽 공공. 설마 오늘도 변명만 늘어놓지는 않겠지요? 내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겁니다.”
“귀빈 마마. 다행히 결정적인 정보 몇 가지를 찾았습니다. 동창과 금의위의 정보원들이 황태자 주변 인물들의 동향과 전서구의 방향을 분석했고, 이후 의심 지역의 동향을 파악하여….”
“결론만 이야기해요. 그래서 거기가 어딥니까?”
“하남 숭산(嵩山)입니다.”
“숭산 소림사? 이 땡중들이 진짜…!”
소림이 황태자를 몰래 지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소림에 숨어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림이 황태자를 경내에 들였다는 건 이제부턴 대놓고 지원하겠다는 것이었고, 뱀에게는 선전포고로 들렸다.
“귀빈 마마. 삼황자의 위치는 찾았지만 그곳이 소림인 이상 동창과 금의위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실력을 짐작하기 어려운 고수가 득실거리는 용담호혈인지라….”
“흥, 그러니 거기로 피신한 거겠죠.”
“일단 좀 지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평생 소림에 숨어 살 수는 없을 테니 언젠가는 밖으로 나올 것이고….”
곽 공공의 의견은 매우 타당했다.
봉위선이 사라진 이상 당장 삼황자를 활용할 수도 없으니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과 벌써부터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원숭이가 토끼의 혈령을 가지고 찾아온 걸 모르기에 하는 소리였다.
“난 기다릴 생각이 없어요. 소림이라고 해서 봐줄 생각도 없고요. 차라리 잘되었네요. 언젠가는 밟고 가야 할 놈들이니 이참에….”
“하지만 소림의 저력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황태자가 있는 이상 황군을 투입할 수도 없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곽 공공은 걱정하지 마요. 확실한 건 소림에 피바람이 불게 될 거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