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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95화 (95/210)

095화. 뱀과 원숭이 (2)

* * *

원숭이가 황궁 심처에서 호의호식한 지 벌써 한 달.

그간 몇 번을 청했지만 뱀은 만나주지 않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만남을 허락했다.

“대형,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얼굴 뵙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흥, 자주 봐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네가 저지르는 일 뒷수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뱀의 말은 사실이었다.

궁녀들이 사흘이 멀다고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귀빈이 아니었다면 벌써 크게 시끄러웠을 일.

원숭이가 왜 만나달라 했는지도 뱀은 짐작하고 있었다.

백팔살 비술의 일 단계는 순음지기를 간직한 처녀의 정혈로 충분하지만, 이 단계부터는 내공을 익힌 무림인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더 이상 궁녀로는 효과가 없으니 황궁의 경비 무사라도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황궁 무사들은 손대지 마라. 대신 내공을 익힌 죄수들을 공급해주지.”

“저야 뭐 누구라도 상관은 없지요. 그런데 이렇게 제 법력 회복에 신경 써주시는 걸 보니 삼황자를 잡아 올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역시 머리는 잘 돌아가는구나. 맞다. 보름 후엔 삼황자를 대면하게 될 테니 너도 법력 회복에 최선을 다해라.”

“보름이라… 삼황자가 있는 곳이 소림입니까?”

뱀의 눈이 커졌다.

원숭이가 잔머리를 잘 쓰는 건 알았지만, 곧바로 장소를 알아챌 줄이야.

“너… 어떻게 안 거지?”

“뻔하지 않습니까? 대형의 힘을 아는 황태자가 만만한 곳에 삼황자를 숨겼을 리는 없고, 강력한 힘을 갖춘 곳들 중 보름 안쪽 거리에 위치한 건 낙양 무림맹과 숭산 소림사밖에 없으니까요. 연맹체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무림맹보다는 소림사가 숨기에 적합하고요.”

“맞다. 그 소림에 황태자와 삼황자가 숨어있지.”

“소림이면 만만치 않은데… 대형께서 직접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정파 무림 전체와 싸우면 모를까, 고작 소림 한 곳을 치는데 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을까? 넌 홀로 활동해서 잘 모르나 본데 수하들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나 원숭이의 눈이 반짝였다.

십년 넘게 황궁을 장악했다더니 뱀은 꽤 많은 힘을 비축한 것 같았다.

“특수 군대를 조직하신 겁니까?”

“황실의 장점이 무엇이냐? 법 위에 군림한다는 것 아니냐? 죄수들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고 필요한 자가 있으면 죄를 뒤집어씌워 사용하면 되니 군대를 조직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황실의 힘에 대형의 비술 능력이 더해졌으니 분명 엄청나겠죠. 그렇더라도 소림의 늙은이들을 상대할 초고수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 부분에서는 뱀도 속이 쓰렸다.

애써 양성했던 혈의병과 귀장들이 얼마 전 황태자 패거리에 의해 동굴에 매장된 것. 만약 남원대장군, 비뢰도 등과 함께 장준검도 활용할 수 있었다면 이번 소림 공략이 훨씬 수월했을 거였다.

하지만 몹시 열 받을 뿐 크게 문제 되는 건 아니다.

폭파된 동굴 외에도 뱀이 군대를 육성 중인 비밀 장소는 몇 곳 더 있고, 비술을 통해 노예로 만든 초고수들도 꽤 남아 있었다.

게다가 황제의 이름을 팔아 불러올 수 있는 용병들도 있으니까.

“내가 가진 힘으로 소림을 박살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굳이 혼자서 다 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써먹기 좋은 놈들이 있으니 활용할 생각이다. 아, 물론 결정적인 한 수는 내가 준비하겠지만.”

* * *

강서성 용호산 흑사련 본부.

폐관 수련에 든 련주를 대신해 후계자인 정진악이 태사의에 앉았다.

한 손에는 은밀히 전달받은 서찰을 들고 있었는데,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것이 무척이나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허허, 재미있군. 황제의 이름을 팔아 이런 요청을 하다니.”

“그렇게 웃어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동창 수장의 직인까지 찍어 서신을 보냈지 않습니까? 말이 요청이지 실은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흑사련의 총군사 허숙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거절하자니 황실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웠고, 받아들이자니 그 여파를 감당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총군사는 뭐가 그리 걱정이요? 황실의 명이니 못이기는 척 따르면 그만 아니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자그마치 소림을 치는 일입니다. 아무리 동창과 협력한다 한들 이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기면 더 문제지요. 무림맹과 정파 무림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부분은 황실에서 책임진다지 않소?”

“동창을 어떻게 믿습니까? 신의 없기로는 우리 사파보다 더한 것이 그들입니다.”

당연히 정진악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제안에 마음이 기우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은 재밌을 것 같았다. 신주의협이 무림맹을 맡은 이후 강호에 분쟁이 없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을 까부수러 가자니 피가 끓어올랐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에 소림을 무대로 한 전투는 없다는 점. 분명 황실의 누군가가 역사를 뒤바꾸고 있는 것이다. 동창을 움직여서 이런 미친 제안을 건네 온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혈승일 확률이 높았다.

스멀스멀 풍겨오는 짙은 피 냄새.

피할 이유가 없었다.

“총군사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되오. 그렇다고 황실의 요청을 뭉갤 수도 없지 않소? 흑사련이 총출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고수 열 명 보내 달라는 것이니, 그렇게 합시다.”

“부련주님. 그러지 마시고 다시 생각을….”

총군사는 정진악을 말렸다.

그의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정옥수의 눈에는 딴지 걸기 좋아하는 방해꾼으로 비췄다.

“흑사련의 총군사라는 분이 뭔 겁이 그리 많아요? 소림 아니라 소림 할아비라도 칠 일이 있으면 쳐야죠!”

“하지만 대공녀. 이건 그리 단순한 문제가….”

“그만 하세요! 아버님이 이미 결정하셨잖아요. 출정도 하기 전에 사기를 떨어뜨리지 말라고요!”

손녀뻘밖에 안 되는 정옥수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드는 모습은 볼썽사나웠지만, 정진악이 점잖게 마무리할 기회를 제공한 것은 사실. 확실히 영악한 여인이었다.

“옥수야! 연로하신 총군사께 그 무슨 예의 없는 짓이냐? 당장 사과드리지 못할까!”

“죄송해요, 총군사님. 제가 흑사련에 대한 충정 때문에 잠시 흥분했네요.”

련주 손녀의 사과까지 받았으니 총군사도 더 이상 만류하기는 힘들었다.

정진악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우리 흑사련은 염왕장과 흑한쌍귀, 귀살검, 그리고 독수냉침을 보내 소림을 도모키로 하겠소. 총군사는 즉시 이들을 파견할 준비를 갖추시오.”

“명을 받듭니다. 그런데… 그들 다섯 명만 보내실 겁니까? 병필태감은 최소 열 명의 고수를 요청했습니다만….”

“나머지 다섯은 내 따로 준비할 테니 총군사는 신경 쓸 것 없소.”

총군사가 방을 나가자 정옥수가 부친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을 때 늘 그러듯이.

“아버지. 나머지 다섯은 누굴 보내실 건데요? 혹시 그들을…?”

“그래. 오방혈수(五方血手)를 보낼 거다. 기왕 돕기로 한 거 제대로 힘을 보태야지. 염왕장 정도로는 소림의 사대금강을 상대하기 어려울 테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제가 가서 오방혈수들이 제대로 활약하는지 지켜볼게요.”

“네가 소림에 가겠다고?”

“누군가는 인솔을 해야 하잖아요? 제가 가겠어요.”

“소림과의 싸움은 절대 만만한 게 아니야. 위험해.”

“보내주세요! 소림이 무너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요.”

소림사가 불타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 정옥수의 눈동자가 열망으로 이글거렸다.

이럴 때의 그녀는 말리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정진악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대장,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진가린과의 연습 대련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강한월을 소영영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데?”

“소흔이 치료 관련된 거예요. 색공을 없앨 방법을 찾았어요.”

“그래? 다행이군. 수고 많았다.”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에요. 실제로 치료하려면 대장의 도움이 필요해요.”

강한월은 소영영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연소흔을 치료한다면서 왜 본인이 저렇게 흥분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돕겠다.”

“호호호, 좋아요. 그럼 소흔이와 저를 소림사에 데려가 주세요.”

“소림사? 아니, 왜?”

“소흔이의 몸에 걸려있는 색공의 비술을 없애려고 몇 번을 시도했는데, 없어질 듯하면서 결국 다시 불씨가 살아나더군요. 소흔이와 색공으로 연결된 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즉, 그 사람을 만나서 연결을 끊어줘야 해요. 그 사람은 보나 마나 삼황자일 거고, 삼황자는 지금 소림사에 있잖아요?”

소영영이 왜 흥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천하공부출소림. 중원 무학의 근원이며 태산북두인 소림사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마인이 소림사를 방문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꿈을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적당한 핑계를 찾은 셈.

“흠. 네 뜻은 알겠다. 하지만 소림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람을 살리는 일이잖아요.”

강한월은 잠시 고민이 되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황태자의 손님으로 방문한다면 소림에서도 못이기는 척 받아줄 수밖에 없을 테니.

게다가 그 스스로도 소림을 방문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좋아. 장담할 순 없지만 시도는 해보자. 거리가 가까우니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야. 내일 당장….”

“나도 가겠네.”

“저도요. 소림사 탑림(塔林)을 구경하는 게 꿈이었다고요!”

“하하하, 다 같이 가자고. 간식거리도 준비하고 술도… 아, 술은 좀 그런가?”

“어머, 곽철 오라버니. 뭐가 걱정이에요? 몰래 숨겨가면 되죠.”

휴우, 갑자기 골치가 아파져 강한월은 관자놀이를 주물러야 했다.

* * *

숭산 소실봉의 허름한 암자.

어른 두 명이 발 뻗고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방에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고령의 승려가 차를 다리고 있었다.

“방장. 이 차 좀 드세요. 내가 꼬불쳐 두고 있던 건데 향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허허허.”

“송목 사숙조께서 직접 차를 다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게 뭐 힘든 일이라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늙은이지만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허허허.”

“무슨 그런 말씀을. 사숙조님은 저보다도 오래 사실 겁니다. 아미타불.”

소림 방장 공원 대사는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합장을 했다.

송목 대사의 입에서 죽을 날이 다 되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벌써 이십 년 전. 이제는 그저 농담처럼 들렸지만 방장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줘야만 했다.

상대는 본인보다 두 배분이나 높은 소림의 최고 어른이며, 외부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림 내부에선 살아있는 전설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손님들은 잘 지내시오?”

“황태자는 좀 무료해 보이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습니다. 장준검은 엄청난 속도로 공력을 회복하고 있고요. 볼수록 대단한 젊은이더군요.”

“그래요? 다행이군. 지들만 잘난 줄 아는 나한전 애들한테 좋은 귀감이 되겠어요. 장준검 그 친구는 내 조만간 함 만나볼까 합니다.”

“사숙조께서 굳이 직접….”

“연이 닿았으니 소중히 여겨야지요.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젊은이를 만나 기를 좀 나눠 받고 싶기도 하고. 허허허.”

방장은 속이 좀 쓰렸다.

소림의 어린 제자들에게는 별 관심을 안 두시면서 외인을 지도하려 하시니.

“방장. 요 며칠 무릎이 시큰거리는 걸 보니 손님들이 올 것 같아요. 객방 청소도 하고 손님들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요.”

무릎이 쑤시면 비가 올 징조 아닌가? 왜 갑자기 손님 타령을…?

“좋은 손님입니까? 아니면 나쁜…?”

“그게 무어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찾아오면 다 손님인 거지. 그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항상 함께 찾아오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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