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96화 (96/210)

096화. 마불진경

* * *

“흥! 앞으로 어디 같이 가자는 말 하기만 해봐라!”

진가린의 투덜거림을 애써 못 들은척하며 강한월은 마부석에 올랐다.

곽철과 제갈윤도 대놓고 삐진 척을 했지만 이들을 모두 데려갈 순 없었다.

결국 마차에 오른 건 소영영과 연소흔뿐.

힘차게 달린 마차는 다음 날 숭산 입구에 도착했다.

아, 이곳이 소림이구나!

천마신교와는 극단의 대척점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소영영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동은 강한월만큼은 아니었다.

불치의 병을 치료한 것이나 현재의 무공 수위에 오른 것 모두 일정 부분 소림의 덕.

인과 연의 촘촘한 그물을 생각하며 소림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헐레벌떡 뛰어오는 젊은 승려를 보고 지객당주 법원은 혀를 내찼다.

쯧쯧, 소림의 승려가 저리 경박스러워서야….

“각상! 경내에선 뛰지 말라고 내 분명 경고했을 텐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당주님. 큰일이 났다고요!”

“큰일? 무슨 큰일?”

“일주문(一柱門)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당분간 향객들은 받지 않는다니까! 좋은 말로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내면 될 것을!”

“아… 그건 저도 알지요. 그런데 손님들이 엄청난 미녀인데… 그러니까 이게 뭔가….”

미녀?

각상의 수행이 아직 미흡하다지만 미모에 홀려 횡설수설할 정도는 아닌데?

뭔가 이상함을 느낀 법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신법을 발휘해 바람처럼 달려 일주문에 도착해보니, 젊은 소림승 몇 명이 방문객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객당주님, 잘 오셨습니다. 여기 이 시주님들이….”

“됐다. 내가 상대할 테니 너희는 물러 있어라.”

무인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젊은 여자 둘.

방문객을 살피던 법원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급기야 험하게 일그러졌다.

“시주들은 뉘시오?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저는 강한월이라 하고 이쪽은 제 동료들입니다. 평소 흠모하던 소림을 찾아뵙고….”

강한월의 말은 정중했지만 법원은 모욕이라도 당한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객승이 되어 소림의 정문을 지킨 지 이십 년,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인 것이다. 마공과 색공으로 무장한 것들이 감히 소림을 찾아오다니.

“닥쳐라! 사악한 것들이 겁도 없이 소림에…!”

법원의 승포가 기파로 펄럭거렸고, 주먹을 움켜쥔 모습이 당장 소림권이라도 갈길 태세였다.

역시나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강한월은 쓴웃음을 지으며 얼른 황룡금패를 꺼내 들었다.

“진정하시지요. 이 패를 공륜 대사님께 보여주시면 저희 신분을 확인해 주실 겁니다.”

황룡금패가 두둥실 떠올라 천천히 날아갔고, 패를 받아 쥔 법원은 놀란 눈을 부릅떴다.

황태자의 신패임을 알아본 건 아니었다. 놀란 건 패를 감싸고 있는 은은한 기운 때문.

어찌 몰라볼 수 있을까?

소림의 사대 절학 중 하나인 금강부동신공을.

* * *

“강 소협. 좀 전의 무례는 용서하시게. 지객당주는 내 따끔히 야단을 쳤으니.”

“연락도 없이 찾아뵌 저희 잘못이지요. 게다가 제 동료들의 상태가 소림을 방문하기엔 부적절한 것도 사실이고요. 이렇게 경내로 맞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좀 전의 무례를 사과한다며 지객당주는 소영영과 연소흔을 안내해 소림사 구경을 나갔다. 그사이 강한월은 안면이 있는 나한전주 공륜 대사로부터 환담을 가장한 취조를 당했는데, 소림의 입장에선 이것저것 캐묻고 싶은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흠, 그러니까 연 소저의 색공을 치료하기 위해 삼황자를 만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사정이 딱해서요. 치료할 수만 있다면….”

“그 일은 황태자께서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시니 분명 허락을 해주실 거요. 그보다는 동행한 여인이 문제인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마공을 익힌 것 같던데? 그것도 꽤나 고위의 순수한 마공을.”

역시나 소림사 나한전주는 한눈에 소영영의 실체를 꿰뚫어 봤다.

아직은 회귀자에 대해서 밝힐 단계가 아니니 정마 연합의 문무대에 대해서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한 몇 가지 핑계를 둘러대려고 했으나….

“아, 지금 나한테 이야기할 필요는 없소. 잠시만 기다리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분이 이리로 오실 테니.”

소림 나한전주가 기다리라면 기다릴 수밖에.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지 한 식경.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예상했던 대로 소림사 당대 방장인 공원 대사였다.

“무림말학 강소월이 대 소림사의 장문 방장께 인사 올립니다.”

“아미타불. 선재로다 선재야. 내 얼마 전 공륜에게서 강 소협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쁘던지. 직접 만나고 싶었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아마도 강 소협과 소림의 연이 꽤나 깊은가 보오.”

“소림이 금강부동신공을 주신 덕에 목숨을 구했는데 이제야 인사를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소림도 강 소협의 사부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니 피차 고맙기는 마찬가지. 어쨌든 병이 완치된 것 같아 안심이 되는구려.”

방장의 눈빛은 따뜻하고 자애로웠다.

불치의 병을 앓던 소년이 소림의 무공을 익혀 훌륭히 성장했으니 이 또한 덕을 쌓은 것.

하지만 반갑고 기쁜 마음 이면에는 의혹도 피어올랐는데, 방장의 눈에는 강한월 몸속에 거친 마기가 생생히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행한 여인 또한 마공의 기세를 풍긴다고 했으니….

마의 발호를 막을 책무가 있는 소림 방장의 입장에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겠소?”

“방장 대사께서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당연히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실은 저도 대사님께 용무가 있고요.”

“같이 온 소저를 치료하는 일 말고도 다른 용무가 있는 거요? 그럼 어디 그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소림 방문을 결정한 또 다른 이유가 이것이었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마불진경의 전달.

이것을 통해 마공에 관한 것은 적당히 넘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강한월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냈다.

“소림의 것이니 소림에 전해드립니다. 과거 신승이라 불리셨던 원법 대사께서 남기신 진경입니다.”

노승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천년 소림의 역사에 이름난 고승은 수도 없이 많으나 원법 대사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

“이, 이것이 정녕 원법 선조의 유품이란 말이오?”

방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종이는 최근 것이었으나 쓰인 내용에선 소림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기가 물씬 풍겼다.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

“이건 제가 암기하고 있는 것을 필사한 것입니다. 원본은 파손되었는데, 어떻게 된 사정인가 하면….”

“잠깐. 너무 엄청난 내용이라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렵구려. 강 소협, 나랑 어딜 좀 갑시다.”

“네? 제가 먼 곳에 갈 시간은….”

“아니, 멀지 않소. 한 시진이면 충분하오.”

* * *

숭산 소실봉이 바라다보이는 어두운 계곡으로 십여 명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나는 새처럼 빠르게 전진한 그들이 멈춰 선 곳엔 화려하기 그지없는 가마가 있었다.

“흑사련의 정옥수가 동창의 병필태감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곽 공공이 가마에서 내려서자 정옥수는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흑사련주에게 꽃같이 아름답고 용맹한 손녀가 있다더니 그게 너였구나. 네가 이들을 인솔해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대인. 조부께선 폐관 수련 중이라 직접 오지 못하였으니 부디 용서를….”

“흑사련주가 오길 기대하진 않았다. 허나 능히 소림을 상대할 수 있는 고수들을 보낸 거라야 할 텐데?”

곽 공공이 서늘한 눈길로 정옥수 뒤에 선 자들을 살폈다.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답게 염왕장, 흑한쌍귀 등은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삿갓을 깊이 눌러쓴 다섯 명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방혈수라 불리는 비밀병기이온데, 각각이 소림의 사대금강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사대금강을? 그것참 대단하군.”

곽 공공이 감탄하며 오방혈수를 살피는 사이, 정옥수는 반대로 곽 공공 뒤편의 무사들을 살폈다. 수백 명의 무사들이 숲을 꽉 채우며 정렬해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에 초점 없는 눈동자가 마치 죽은 시체들 같았다.

황실의 고수들이나 갑옷을 입은 군병을 예상했던 그녀로서는 몹시 의외인 상황.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가마 옆에 놓은 두 개의 관이었는데, 가마꾼들이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나?”

“아, 아닙니다, 대인.”

“흑사련이 그렇듯 황실에도 비밀병기가 있지. 그건 소림의 최고 괴물을 상대할 무기이다.”

“소림사 방장 말씀이십니까?”

“허허허, 고작 정파 십대고수에나 이름을 올린 방장 따위가 무슨. 소림에는 늙은 요물이 있다. 나이가 아마 백이십은 되었을 거야.”

“그렇게 나이가 많으면 아무리 내공이 깊어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텐데요?”

“글쎄, 과연 그럴까?”

두고 보면 안다는 듯 곽 공공은 말을 흐렸고, 정옥수는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황실의 대리인 앞에서 인상을 쓸 수는 없는 일.

“소녀가 무지하니 많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네가 이번 일에 공을 세우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간단히 작전을 설명하겠다. 우리 목표는 사람 하나를 빼내 오는 거다. 소림이 순순히 내줄 리 없으니 싸움은 불가피한 일. 내 병사들이 백팔나한진을 상대할 테니 너희 흑사련은 십팔나한을 맡아라.”

“그럼 사대금강 등 최고수들은 누가…?”

“흐흐, 그들은 내 가마꾼들이 상대할 거다.”

* * *

방장 대사를 따라간 강한월은 송목 대사를 만났다.

흥분한 방장이 마불진경에 대해 설명했지만, 송목은 듣는 둥 마는 둥 강한월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사숙조님. 이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우리 소림에 큰 자비를 내리신 겁니다. 제가 살짝 훑어봤는데 역근경이나 세수경에 비견될 만한 엄청난….”

“끌끌, 방장 자네는 그깟 책 한 권에 뭘 그리 흥분하고 난리인가?”

“사숙조님! 그깟 책이라니요? 이건 놀라운 선조의 유산입니다! 소림 무공의 기틀을, 아니 나아가 중원 무학의 정의를 새롭게 할….”

“호들갑 떨지 말고 자네는 이만 가보게. 난 여기 강 소협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

“물론 강 소협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겠지요. 저도 소림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방장!”

방장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암자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된 송목 대사는 그제야 마불진경을 훑어보았는데, 대충대충 책장을 넘기는 것이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쯧쯧. 이미 보유한 일흔두 개의 무공만 하더라도 골치가 아픈데 새로운 걸 추가해서 어쩌자는 건지. 이런 쓸데없는 걸 남기다니 원법 대사께서 말년에 노욕이 과하셨던 게야.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원법 대사께서 놀라운 심득(心得)을 얻었으니 후인에게 전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왜? 뭐 하러? 더 놀라운 무공을 익혀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라고? 아니면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그런 게 다 욕심이란 말일세.”

“대사님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이미 이 무공을 익혀 덕을 본 제 입장에선….”

“그렇기에 인연이란 참 무섭단 말이야. 원법 선조께선 쓸데없는 일을 하셨지만, 그 연이 자네에게 이어졌으니… 그 덕에 마불진경이 쓸모 있는 것이 되었어. 선재로다, 선재야. 아미타불.”

불호를 외우며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송목 대사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

극강의 삼매진화에 노출된 마불진경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대사님! 어찌 그 귀한 진경을…!”

깜짝 놀란 강한월이 만류하려 했지만 책은 이미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말했잖나. 소림에는 쓸모없는 책이라고. 다행히 자네에게 전해졌으니 원법 선조께서도 아쉽지는 않으실 거야.”

“하지만….”

“됐네. 방장이 난리를 치겠지만 내가 한 백 일 곡기를 끊고 면벽하면 지가 어쩔 건데? 자넨 연이 닿았고 소림은 연이 없으니 이걸로 된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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