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소림 혈투 (1)
* * *
송목 대사의 거침없는 행동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마불진경이야 모두 외우고 있으니 다시 사본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송목이 그걸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놀랐나? 내가 미친 것 같지? 그럴 것 없네. 세상을 뒤집어 놓을 천고의 절학이 이렇게 묻혀버리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이건 자네가 이미 익혔으니 묻힌 것도 아니고. 그러니 마불진경은 잊어버리고 자네 이야기를 좀 해보세.”
“가르침을 주시면 세이공청하겠습니다.”
“가르침은 무슨. 심심해 죽겠는 늙은이와 말벗이나 해달라는 거지. 신주의협에게 금강부동신공을 넘겨준 게 나이니 이 정도 요청은 해도 괜찮겠지?”
“아, 사부님께 금강부동신공을 주신 것이 대사님이셨습니까?”
“신주의협 그 친구가 하도 절박하게 요청을 해서 말이지. 그냥 주면 방장이랑 장로들이 난리를 칠 것 같아 나한진의 허점을 보완한다는 핑계를 달아야 했지만 말이야.”
마불진경을 불태우더니 금강부동신공을 마치 남아도는 잡서라도 되는 양 편하게 이야기하는 송목 대사.
강한월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어. 얻은 게 있는 만큼 자네가 잃은 것도 있으니까”
“생명을 얻은 건 알겠는데… 잃은 게 있다니요?”
“신주의협은 처음부터 반야신공과 같은 대승계열의 심법을 원했다네. 가급적 발타 선사의 금강정경(金剛頂經) 원류에 가까운 무공을. 그러한 무공만이 천마신교의 마공과 진정한 상극을 이루어 자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지. 그렇기에 난 금강부동신공을 넘겨준 것이고.”
강한월 본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무학의 깊은 요체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한 사부의 노력이 느껴져 찌르르 가슴이 아려왔다.
“그런데 말이야… 그게 문제였던 거야. 대승계열의 금강부동신공을 고른 탓에 자네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힐 기회를 잃고 말았네.”
“천하제일의 무공이라니요?”
“자네 사부가 당대 천하제일 아닌가? 그러니 신주의협의 무공이 천하제일인 것이지.”
“저는 사부님의 무공도 익혔습니다만…?”
“그래? 그럼 심검(心劍)에 다가갈 단초는 찾았는가?”
심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두개골에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전신이 짜릿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평소 심검의 경지를 꿈꿨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제 사부님이 심검을 이루셨다고요? 제자인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만….”
“신주의협이 심검의 경지에 들었는지는 나 또한 확신하진 못하네. 그가 말한 적이 없고 나 또한 묻지 않았으니. 하지만 내 눈에는 분명 그 경지로 보였어. 마음이 일면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경지.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심검이지.”
“사부님께서 그런 지고한 경지에 오르셨다니 기쁩니다. 그렇지만 저 또한 같은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자신도 없고요.”
“좋은 자세야. 욕심을 낸다고 될 일도 아니고. 하지만 어쩐다… 왠지 자네가 사부의 경지를 넘어서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냥 입에 발린 소리치고는 노승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혹시 회귀자를 상대해야 하는 걸 알고 하는 소리일까?
당황한 강한월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송목 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늙은이의 감이야. 세상을 오래 살았더니 공부는 제자리인데 촉만 늘어서 말이지. 어쨌든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의 양극을 익히고 있는 자네는 심검을 익히기엔 부적절해. 둘 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한 것의 정점에 선 무공이라 그렇다네. 내밀한 마음의 수양인 심검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거든.”
“그렇다면 저와는 연이 없는 거겠지요. 전 혈액의 병 때문에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떤가? 한 삼 년만 나와 함께 수련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방장마저 고개를 숙이는 소림의 일인자가 삼 년이나 지도를 해주겠다니, 강호의 젊은이들이 들었다면 펄쩍 뛰며 만세를 부를 제안이었다.
천하의 절기를 배울 수 있음은 물론 공력이 급상승할 가능성도 있었고, 무엇보다 소림사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업게 되는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지 강한월에겐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 자네 나이에 삼 년이면 긴 시간도 아닌데 뭘 그리 빽빽하게 살아가누?”
아쉬워하는 송목 대사의 말이 가슴을 때렸다.
뭘 그리 쫓기듯 살고 있는 걸까? 회귀자의 짐을 왜 자신이 짊어지게 되었는지….
“뭐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이야기는 되었고…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세.”
“네? 어디를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반가운 손님과는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는 불청객을 맞으러 가야지.”
* * *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의 중앙에 걸렸다.
일주문 앞을 지키고 있던 각원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근래 들어 향배객들의 출입을 금하면서 지루한 하루가 반복되던 것이다.
쳇, 낮에 경비를 서던 각상은 엄청난 미녀들을 봤다던데.
지객당주께 부탁해서 낮 순번으로 바꿔달라 요청을 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저만치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늦은 시간에 도대체 누가?
게다가 발걸음 소리는 한두 명의 것이 아니었다. 수백 명이 동시에 몰려오는 것 같은 진동이 느껴졌는데….
옆에서 졸고 있는 각림을 급히 깨우자 드디어 불청객들이 시야에 잡혔다. 붉은색 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찬 수백의 무사들이 줄을 맞추어 다가오고 있었다.
“멈추시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소림은 향배객을 받지 않습니다!”
당황한 각원이 큰소리로 외치자, 붉은 옷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거대한 가마가 나타났다.
“향배객을 받지 않는다고? 상관없다. 우린 향배객이 아니니.”
“그럼 시주님들은 도대체…?”
싸늘한 미소를 흘린 곽 공공이 오른손을 높이 들자, 붉은 옷의 무사들이 지체없이 활을 꺼내 쏘았다.
쐐애액~
각원과 각림도 삼대 제자 중에선 제법 실력이 좋은 편이지만, 밤하늘을 가득 채운 화살 비를 피하기엔 역부족.
막 화살에 꿰뚫려 고슴도치가 되려는 순간, 등 뒤에서 거센 권풍이 몰아쳐 날아오는 화살들을 튕겨버렸다.
“감히 소림을 향해 화살을 쏘다니!”
방금 백보신권을 날려 제자들을 구한 나한전주 공륜 대사가 분노를 터트리며 빛살처럼 달려왔고, 이어서 방장 대사가 소림의 장로들과 십팔나한을 대동하고 날아들었다.
그 뒤로 긴 목봉을 든 백 팔 명의 나한승과 계도를 든 계율원과 달마원의 무승들까지 열을 맞춰 등장하니, 일주문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후후, 이러면 일부러 밤늦게 찾아온 보람이 없군. 이처럼 거하게 환대를 해주니.”
“곽 공공! 소림과 황실은 대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거늘, 어째서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지른다는 말이오!”
관복을 갖춰 입은 곽 공공을 알아본 공륜 대사가 분노를 담아 외쳤다.
“나한전주 당신이 황태자의 수족이 된 순간 소림과 황실의 관계는 이미 금이 간 것이다. 모든 것은 소림의 불충에서 비롯된 것이니 나를 탓하지 말라!”
“황태자를 돕는 게 어째서 불충이란 말이오?”
“후후, 서로 뻔히 아는 일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겠지. 소림을 불태우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피를 보기 싫다면 삼황자를 넘겨라!”
“가, 감히…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한 사찰에서…!”
나한전주와 곽 공공이 거친 언사를 주고받는 사이 양측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백팔나한은 방위에 맞추어 서며 나한진을 펼쳤고, 붉은 옷의 무사들도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절로 소름이 돋을 만큼 긴장감이 치솟는 상황.
하지만 이 상황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여유롭게 바라보는 자들도 있었으니, 높은 나무 위에 은신하고 있는 송목 대사와 강한월이었다.
“재밌군. 정말 재밌는 손님들이 왔어. 강한월 자네는 저들이 누구인지 알겠나?”
“방금 나한전주의 말을 들으니 동창의 병필태감 같습니다만….”
“관복을 입은 놈은 동창이 맞겠지. 하지만 붉은 옷을 입은 놈들이나 복장이 제각각인 놈들은… 특히 저 삿갓을 쓴 다섯 명.”
“몇몇은 낯이 익습니다. 흑사련의 고수들이 섞여 있군요.”
“흑사련이라. 정말 재밌는 조합이군. 황실과 사파가 손을 잡았으니 우리 소림이 고생깨나 하겠는데? 자네 정말 재밌는 손님들을 몰고 왔어.”
“대, 대사님! 제가 저들을 몰고 오다니요?”
억울한 마음에 강한월은 펄쩍 뛰었지만, 속으로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공교로웠다. 어째서 저들과 이렇게 계속 엮이는지….
“농담이야 농담. 자 우리도 그만 떠들고 집중해서 보자고. 곧 한바탕 할 것 같으니.”
“여기서 구경만 하실 겁니까? 어째서 도와주지 않으시고…?”
“일단 좀 보자고. 꺼림직한 게 있어서 말이지.”
송목 대사가 손가락을 들어 곽 공공 뒤편을 가리켰다.
서늘한 달빛을 받아 음산하게 빛나는 관 두 개. 사실 강한월도 저 관의 존재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곽 공공이 들고 온 것으로 보아 뭔가 엄청난 비술 무기일 텐데….
한편 곽 공공과 나한전주의 입씨름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삼황자를 데려가겠다는 입장과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 확인되었으니 싸움은 불가피했다.
남은 것은 전면전이냐 아니면 대표자의 싸움이냐는 방식을 정하는 것인데.
“곽 공공. 어쩔 수 없다면 소림도 싸움을 피하지 않겠소. 하지만 굳이 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지. 양측의 대표가 대결하여 승부를 봅시다.”
방장 대사도 나름 속셈이 있을 테지만, 곽 공공의 입장에서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얼마 전 황실 뇌옥의 혈의병들이 몰살당한 탓에 전력이 크게 감소했고, 이번에 데려온 붉은 무사들은 가급적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귀빈의 명이 있었던 것이다.
“대표 대결이라? 나쁘지 않군. 나 역시 소림 전체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
“좋소. 그럼 내가 황실 최고수로 알려진 곽 공공을 상대해드리겠소.”
방장 대사가 승포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소림사 최고 수장으로서 단단한 결심을 하고 나선 것이었지만 곽 공공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방장과 내가 일대일로 붙자고? 그건 아니지. 여기 대결하고 싶어 안달이 난 선수들이 이렇게 많은데.”
곽 공공은 흑사련의 고수들을 가리켰고, 염왕장 등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림의 고수와 붙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명을 혼자 뒤집어쓸 생각도 없으니까.
“곽 공공. 그럼 대체 어떻게 싸우자는 거요?”
“수백 명이 먼 길을 왔는데 단판으로 끝낼 수는 없겠지. 삼판양승이 적당해. 첫판은 십 대 십, 둘째 판은 사 대 사, 마지막 판은 이 대 이.”
곽 공공이 제시한 방법은 방장 대사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었다.
첫판은 십팔나한 중 열 명이 나서면 될 것이고, 둘째 판과 셋째 판은 방장 자신을 포함한 장로급 고수들이 나서면 되니까.
“그렇게 합시다. 곽 공공께서도 결과에 승복하고 뒷말이 없으리라 믿겠소.”
이렇게 판이 깔렸다.
십팔나한 중 선발된 열 명이 앞으로 나섰다.
십팔나한 개개인은 수백 명의 이대 제자들 중 고르고 고른 대단한 고수인데다, 소나한진(小羅漢陳)으로 합격술을 펼칠 경우 가히 무적이라 할만했다.
곽 공공은 열여덟 명이 있어야만 소나한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옛날이야기. 신주의협이 약점을 보완해준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는데, 지금의 나한진은 인원수가 변하더라도 동일한 위력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소림이 첫판의 승리를 자신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강한월은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달빛에 선명히 보이는 정옥수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 의미심장한 미소. 전혀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천하제일의 명성을 가진 십팔나한을 상대하면서 어찌 저리 태평할 수 있을까?
그 자신감의 실체가 밝혀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