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98화 (98/210)

098화. 소림 혈투 (2)

* * *

열 명으로 축소된 십팔나한들은 소나한진을 발동했다.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삿된 것을 멸하겠다는 일심(一心)으로 하나가 되니, 자연스레 장엄한 불광과 강력한 기파가 퍼져 나왔다.

도저히 허점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진형.

“나한진, 역시 만만치 않군. 어떠냐? 흑사련이 첫판부터 실망을 주진 않겠지?”

곽 공공은 살짝 걱정이 되는 것 같았지만, 대답하는 정옥수는 확신에 차 있었다.

“호호, 십팔나한 따위는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둘째 판과 셋째 판까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좋다, 흑사련의 활약을 기대하겠다.”

쿠르르릉!

후끈한 열기를 뿌리는 염왕장이 나한진의 중심으로 쇄도하며 대결이 시작됐다.

뒤이어 흑한쌍귀 두 노인의 장력이 좌우에서 휘몰아쳤고, 귀살검의 소리 없는 검기와 독수냉침의 극독을 바른 암기가 사각을 노렸다.

흑사련을 대표하는 고수들답게 일격 일격에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있었고, 이 정도 공격이면 제아무리 나한진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센 공격들이 나한진의 기파 영역에 닿는 순간 염왕장 등은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는데, 천근의 힘을 담은 공격이 철벽에 막힌 듯 튕겨버린 것이다.

자칫하면 망신을 당하겠다는 생각에 염왕장 등은 십성 공력을 모조리 뽑아내며 연달아 공격을 가했다. 정면으로 공격해선 효과가 없을 것 같아 요리조리 방향을 바꿔가며 사방에서 찔러 들었다.

콰아앙, 휘리릭, 부우웅.

장력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고, 나한들의 목봉도 그에 맞춰 춤을 췄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위태로운 모습은 없었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나한진은 철벽 요새 같았고, 이렇게 가다가는 흑사련 고수들이 먼저 지쳐 쓰러질 것이 분명한 상황.

지켜보는 소림승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삿갓을 쓴 다섯 명은 왜 뒷짐 지고 있는 건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삐이익~

바로 그때, 정옥수가 호각을 불었다.

순간 붉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오방혈수 다섯 명이 빛살처럼 쇄도했다.

진기를 가득 담은 목봉이 톱니바퀴처럼 회전하는 곳으로 무모하게 뛰어드는 그들.

같은 편이 염왕장 등도 놀라서 말리려 했지만, 이미 나한들의 목봉이 오방혈수의 삿갓을 부수고 있었다.

퍼어억!

콰아앙!

“이런, 진짜 금강불괴는 소림이 아니라 혈사련에 있었구나!”

나무 위에서 느긋하게 관전하던 송목 대사가 꽤나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기막을 펼쳐 소리를 차단하지 않았으면 은신을 들킬 정도로 큰 목소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삿갓을 부수고 들어온 목봉에 머리를 강타당했음에도 오방혈수는 끄떡없었고 외려 핏빛으로 물든 주먹으로 나한승의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강력한 호신강기도 소용이 없었는지 나한승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서너 걸음 물러섰고, 지금껏 물 흐르듯 자연스레 돌아가던 나한진이 급격히 경색되었다.

퍼어억, 파앗.

연달아 터져 나오는 목봉 부러지는 소리.

오방혈수 다섯이 사방을 휘젓자 순식간에 나한승들의 긴 목봉이 짧은 몽둥이로 변했고, 나한진은 더 이상 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대사님. 싸움을 말려주십시오. 나한승들이 위험합니다.”

“강한월 자네 눈에는 그리 보이나? 하지만 나한진의 진짜 위력은 시작도 안 했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네… 마치 저 괴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강한월은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 오방혈수를 처음 본 것이다. 하지만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척혈단의 기억이 있었다.

성전이 선포되면 혈전사들의 자폭 공격이 휘몰아쳤고, 그 후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암살자들. 척혈단의 상위 고수들을 집중적으로 괴롭혔는데, 검으로도 벨 수 없는 강철 같은 몸과 요상한 피의 술법을 사용하는 골치 아픈 상대였다.

강한월의 표정은 심각했고, 송목 대사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믿기 힘들지만 강한월이 허튼소리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안전을 지키는 게 정답.

내키지는 않았지만 혜광심어를 사용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방장 대사에게 전음을 날렸다.

방장 대사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송목 사조의 말이지만, 이번만큼은 따를 수가 없었다.

패배를 선언하라니? 나한진의 숨겨진 힘이 어떤 것인지 까먹으셨다는 말인가?

그러는 사이 대결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나한들은 격체전공을 사용해 내공을 하나로 합쳤다. 오래 지속할 순 없지만 잠깐 동안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 힘은 날카로운 검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신주의협이 나한진의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접목시킨 금검(金劍)의 묘리였다.

샤아악.

사악한 것은 모조리 베겠다는 듯 검광(劍光)이 뻗었다.

오방혈수의 활약으로 기세가 올랐던 염왕장은 기함을 토하며 뒤로 펄쩍 뛰었다.

맞받아치던 귀살검의 검은 반 토막이 났고, 흑한쌍귀 중 흑룡 노인은 허벅지 살이 한 움큼이나 베어졌다.

방장 대사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고, 반대로 곽 공공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반면 정옥수의 표정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는데, 그 이유는 즉시 밝혀졌다.

퍼퍼펑!

사방으로 난무하는 금빛 검광 속에서도 오방혈수 다섯은 물러서지 않았다.

금광의 예리함은 상상을 초월해서, 강철보다 단단한 오방혈수의 피부도 쩍쩍 갈라져 피가 솟구쳤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피가 뿜어졌다는 것.

나한진은 순식간에 피 안개로 뒤덮였고, 이어서 작은 피 알갱이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열기가 쏟아졌다. 폭발하는 피에는 특이한 독기마저 내포되어 있어 나한들의 격체전공 연계가 무너져 내렸다.

푸욱.

크어억.

격체전공이 풀려 내공이 약해진 나한의 가슴으로 오방혈수의 손이 파고들었다. 다시 몸 밖으로 빠져나온 손에는 펄떡거리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이, 이런. 멈추시오! 소림이 졌소!”

놀란 방장 대사가 급하게 외쳤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법.

이미 열 명의 나한 중 셋의 숨이 끊어졌고, 둘은 회복하기 힘든 부상을 입었다.

제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소림의 장로들은 기함을 했고, 방장 대사는 들끓는 후회와 자책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내가… 내가 잘못 판단해서… 나 때문에 제자들이….”

【 갈(喝)! 정신 차리게 방장!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

【 제 잘못입니다. 사조님이 이미 알려주셨는데도 제가 믿고 따르질 않아서… 】

송목 대사의 혜광심어가 뇌리에 파고들자 방장 대사는 겨우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충격에서 벗어났을 뿐 슬픔을 이겨낸 것은 아니었기에 답변하는 방장 대사의 목소리는 깊은 한탄에 젖어 있었다.

【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야. 제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다면 다음 판을 이기는 데만 집중하게 】

【 제가 나한전주, 달마원주, 계율원주와 함께 나서겠습니다 】

【 아니, 그것보다는 이렇게 하세. 두 번째 판은… 】

송목 대사의 설명을 들으며 방장 대사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이길 수 있을까?

믿기 어려웠지만 이번엔 송목 대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망설인 탓에 제자들을 죽음에 빠뜨렸으니….

“시간이 없으니 빨리 다음 판을 시작하지. 아니면 소림은 이대로 포기하는 건가? 그것도 나쁘진 않고.”

기세가 오른 곽 공공이 둘째 판을 재촉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세 번째 판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데려온 수하들을 한 명도 잃지 않고 승리할 듯하니 기쁘기 그지없는 상황.

“곽 공공은 말을 삼가시오! 소림은 불의를 보고 물러서는 법이 없소!”

방장 대사가 손짓하자 나한전주, 달마원주, 계율원주가 앞으로 나섰다.

“어째서 세 명이지? 둘째 판은 사대 사의 대결이라고 말했을 텐데?”

곽 공공이 의아해하며 질문했고, 그 답은 멀찍이 떨어진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나머지 한 자리는 여기 내 제자가 채울 테니 걱정 마시게.”

송목 대사의 음성과 함께 강한월이 나무 위에서 뛰어올라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한 마리 학처럼 우아하게 착지하는 강한월과 나무 위를 번갈아 바라보던 곽 공공이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소림의 노괴가 어째 안 보이나 했더니 거기 숨어있던 거군. 뭐 좋아. 송목 노괴의 제자라면 대결에 참여할 자격은 충분하지.”

곽 공공은 자연스레 받아들였지만 정작 놀란 것은 소림의 인물들이었다.

송목 사조가 언제 속가 제자를 키웠다는 말인가? 근 오십 년간 소림사를 벗어난 적이 없으신데…?

그런데 소림의 승려들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정옥수.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원수가 제 발로 나타났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대인. 이번 판도 저희 흑사련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흑사련의 실력은 잘 봤으니 이번 판은 구경이나 하도록 해라.”

“하지만 대인. 저희는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둘째 판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마지막 판을 대인께서….”

“흥, 세 판 중 두 판을 이기면 끝인데 마지막 판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네가 공에 눈이 멀어 정신이 흐려졌구나!”

곽 공공이 정옥수를 따끔히 야단치는 사이, 방장 대사와 강한월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강 소협. 송목 사조의 말씀이라 내 따르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불안하구려. 이번 판에 소림과 황실의 안위가 걸려있는 터라….”

방장 대사는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강한월이 고수라는 것은 나한전주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소림의 일대제자들을 능가할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게다가 강한월은 엄연한 외인. 서로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으니 합격술이나 진법의 상승작용을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무공 실력은 아직 부족합니다. 송목 대사님이 저를 지목하신 이유는 제가 사악한 비술을 상대해본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다섯 괴인을 상대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오?”

“직접 상대해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둘째 판에 다시 출전할 것 같지도 않고요.”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강한월은 슬쩍 손가락을 뻗어 뒤편을 가리켰다.

곽 공공이 타고 온 가마를 맸던 사내들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마꾼?”

자존심이 상한 달마원주 공수 대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곽 공공이 소림을 우롱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한 판 한 판이 중요한 승부인데….

“설마 저 가마꾼들이 좀 전의 다섯 괴인들보다 더 강하다는 거요?”

“글쎄요. 감히 소림의 존장들을 상대하러 나오는 것을 보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 분명하겠죠.”

“결국은 붙어봐야 안다는 말이군.”

나한전주 등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결장으로 나섰다.

마지막 셋째 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방장 대사와 함께 송목 사조가 나서준다면 곽 공공이 어떤 괴물을 들이밀더라도 승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셋째 판까지 승부를 끌고 가려면 무조건 이번 판을 이겨야 했다. 소림의 전주와 원주들이 출전하면서 승패를 걱정해야 하다니. 도대체 어쩌다가 강호에 이런 괴물들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미타불.

황당하고 답답하여 저절로 불호가 흘러나왔다.

“소림은 준비가 되었소. 둘째 판을 시작합시다.”

“좋다. 소림의 이름이 허명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지. 가라! 사신장(四神將)!”

곽 공공이 힘껏 외쳤다.

사신장이라는 단어가 각성의 신호라도 되는 듯, 느릿느릿 걷던 가마꾼들이 즉각 반응했다.

파파파팟!

본래에도 돌덩이 같던 가마꾼들의 근육이 불끈불끈 튀어나왔고, 키도 순식간에 한 자는 더 자랐다.

커지는 덩치에 맞추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세.

“크아아아!”

사람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 기합까지 더해지자, 지켜보던 소림의 어린 제자들은 오금이 저려왔다.

도대체 저들은 누굴까?

강한월은 잠재되어 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수많은 혈교의 괴인들. 물론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괴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림의 초고수들을 상대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

회귀 후에 새로 개발된 비술인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