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소림 혈투 (3)
* * *
두번째 판, 대결의 시작을 알린 건 계율원주의 백보신권.
원거리에서 상대방의 실력을 확인하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무공도 없었다.
쿠르르릉.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간 권기가 선두에 선 가마꾼을 강타했다.
강렬한 격타음과 함께 가슴에 선명한 주먹 자국을 남겼지만, 상대는 가벼운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적당히 간을 보기 위한 공격이었기는 해도 백보신권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허허, 방어력 하나는 엄청나군. 하지만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속도에는 문제가… 헉!”
계율원주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마꾼이 가공스러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우웅, 펑!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일장을 날려 가마꾼을 밀어낸 나한전주가 급히 외쳤다.
“사제들은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나한전주가 반야신장을 대력금강장으로 전환하며 연달아 장력을 퍼부었다.
전력을 다한 계율원주의 백보신권이 다시 대기를 갈랐고, 달마원주는 독수리처럼 뛰어오르며 응조수를 펼쳤다.
강한월의 상대는 시커먼 무쇠 곤봉을 움켜쥔 가마꾼이었다.
타앙!
날카롭게 내려치는 강한월의 검이 가마꾼의 곤봉에 막혔다.
파르르 떨리는 검날, 시큰거리는 손목.
비록 검강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절대 고수가 휘두른 검인데, 그걸 가볍게 막아내는 가마꾼의 공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면 황실 뇌옥에서 상대했던 남원대장군을 능가하는 고수가 분명했다.
강한월은 슬쩍 고개를 돌려봤다.
역근경의 정순한 공력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나한전주는 상대를 압도하고 있지만 나머지 둘은 그렇지 못했다. 계율원주는 백보신권을 연달아 날리며 팽팽한 대결을 펼치는 중이었고, 문제는 달마원주. 두꺼운 철판이라도 단번에 찢을 수 있는 응조수가 상대에게 통하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주춤주춤 밀리는 것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불안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마꾼들에게는 숨겨둔 비술이 있을 터. 싸움을 길게 끌수록 불리한 것은 소림이었다.
속전속결. 자신이라도 빨리 상대를 제압해 숫자의 우위를 가져야만 했다.
우우우웅~
강한월의 검에서 금빛 검강이 치솟았다.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 강기의 출현에 지켜보던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가마꾼은 강기의 무서움을 모르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샤아악.
눈부신 금빛 입자를 뿌리며 뻗어간 검이 곤봉을 갈랐다.
단숨에 잘릴 것을 의심치 않았지만 예상이 빗나갔고, 강한월은 곤봉의 반격을 피해 뒷걸음질 쳐야 했다. 놀랍게도 가마꾼은 사량발천근의 묘리에 류(流)의 기운을 섞어 검강을 튕겨내고 역공을 펼친 것이다.
이럴 수가!
요상한 비술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지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가마꾼이 어떻게 이런 지고한 검의 이치를?
비술에 걸리기 전 엄청난 고수였다는 건데… 도대체 누굴까?
그 궁금증은 이십여 합을 더 겨룬 후에 풀렸다.
“설마… 당신들은 태산사협(泰山四俠)?”
면면부절한 내공을 자랑하며 상대를 몰아붙이던 나한전주가 안타까움을 담아 외쳤다.
조금 전 강한월이 그랬던 것처럼 나한전주도 상대의 깊이 있는 무공에 거듭 감탄했는데, 그렇게 몇 십 수를 나누다 보니 상대 무공의 뿌리가 눈에 보인 것이다.
태산파(泰山派).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정파. 대대로 뛰어난 고수를 배출했고 당대에도 태산사협이라 불리는 걸출한 네 명의 고수가 문파의 이름을 드높였는데.
하지만 칠팔 년 전 그들은 갑자기 실종되었고 그 후 태산파도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곽 공공! 어째서 태산사협이 이런 모습이 된 것이오?”
“후후. 태산파의 무공을 애써 감췄는데도 용케 알아보는구나. 그들은 충성심이 높아 스스로 황실에 투신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림의 고승들은 분노했다.
태산사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존경받아 마땅한 정파의 명숙이 이런 괴물이 되어 가마를 들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동요는 소림의 자충수. 분노로 인해 공력이 혼탁해지는 데다가 태산사협에게 독한 공격을 가하기도 꺼려져서 방어에 급급한 상황을 초래한 것.
【 강한월, 무얼 망설이는 겐가? 】
곤봉을 든 상대와 지루한 공방을 이어가던 강한월의 뇌리에 혜광심어가 파고들었다.
송목 대사의 질책이 맞았다. 강한월은 스스로도 불만스러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손발이 어지러워진 소림 고승들의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고, 사실 그보다는 공력의 한 축인 마공을 억지로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
【 젊은 놈이 뭔 그리 생각이 많아? 여기선 정파의 무공만 쓰고, 마공은 천마신교에서만 쓰겠다는 말이냐? 】
내가… 정과 마를 구분하고 있었던 건가?
짧은 순간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강한월은 무의식적으로 마공을 백안시하고 있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정파의 상징인 신주의협의 제자로서 마공을 익힌 것을 부끄럽다 생각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곳은 소림이고 자신은 소림을 대표해서 싸움에 나섰으니….
【 쯧쯧, 무공은 싸움의 기술일 뿐. 마음에만 마가 끼지 않으면 된 것을… 】
갑자기 광군영과 소영영에게 미안해졌다.
순수하기 그지없는 동료들. 마공을 익혔다고 그들이 인간적이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나는 지금껏 그들을 이용해왔던 것인가?
진정 마음에 마가 꼈던 건 바로 나였구나.
콰아아아!
강한월의 몸에서 암흑 같은 마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마기를 분출한 적이야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금강부동신공이나 사문의 금검기와 혼합하지 않고 순수한 마기만을 뿜어낸 것.
마치 자신이 마공을 익혔음을 세상에 자랑이라도 하듯이.
“허?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소림을 대표한다는 놈이 마공을…!”
놀람과 비웃음이 섞인 곽 공공의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강한월은 개의치 않고 검을 날렸다.
빛의 입자를 뿌리며 검강이 뻗었다.
한때 태산사협이었던 가마꾼은 다시 한번 무학의 극치를 선보이며 검강을 튕겼지만… 검강 속에서 뿜어져 나온 진득한 마기가 곤봉에 달라붙으며 사량발천근의 묘기를 무력화시켰다.
샤악~
수수깡이라도 베어지듯 속절없이 두 동강 나버린 무쇠 곤봉. 그것도 모자랐는지 마기는 스스로 춤을 추며 가마꾼의 심장 어귀로 침투했다.
“크아악.”
가마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강한월의 활약에 자극을 받았는지 나한전주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강력한 장력을 뿌려 상대하던 가마꾼을 물러서게 만든 후 곧바로 몸을 돌려 천수여래장을 날렸다. 목표는 달마원주가 상대하는 가마꾼.
퍼퍼펑펑펑.
수백 개의 손바닥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었고, 막 달마원주의 옆구리에 퇴법을 날리던 가마꾼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몸을 빼야 했다.
과연 나한전주는 대단하구나!
나한전주가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을 확인한 강한월은 계율원주를 도우러 나섰다. 공력 소모가 막대한 백보신권을 연달아 펼친 탓에 계율원주가 급격히 지쳐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
“대인.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저놈이 흉악한 마기를 쓰고 있습니다. 차라리 저희 오방혈수에게 기회를….”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판단한 정옥수가 의견을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질책.
“흥, 어린 것이 건방을 떠는구나! 설마 우리가 흑사련보다 못할까?”
“그런 뜻은 아니옵고….”
“닥치고 지켜보기나 하거라.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곽 공공의 말이 신호라도 된 걸까?
마기에 가격당해 쓰러져 있던 가마꾼이 벌떡 일어섰다.
한창 싸움에 몰두해 있던 강한월과 고승들은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 틈에 가마꾼은 달마원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달마원주가 신속히 대응했지만, 응조수에 어깨가 꿰뚫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가마꾼은 달마원주를 껴안았다.
“뭐, 뭐 하는 짓이냐? 어서 떨어지지 못할까!”
떼어내려는 달마원주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마꾼.
응조수가 휘둘러질 때마다 살점이 날리고 피가 튀는 것이 가마꾼이 손해를 보는 것 같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반전되었다.
가마꾼의 정수리를 노리던 달마원주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힘없이 축 처졌다.
“달마원주, 무슨 일이오?”
이상한 낌새를 챈 나한전주가 급히 도우려 했지만, 몸을 던져 길을 막는 다른 가마꾼을 우선 상대해야 했다.
마음이 급한 나한전주의 천수여래장이 가마꾼의 전신에 떨어져 내렸는데….
“헉.”
가마꾼의 몸을 강타하다가 다급한 신음을 흘렸다.
몸에 손이 닿는 순간 자신의 기가 빨려 나가는 느낌.
급히 손을 떼려 했지만 강력한 아교풀로 붙여 놓기라도 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하십시오! 이들은 혈질(血蛭)입니다!”
다급히 경고를 외치면서도 강한월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미래 무림맹이 보내준 정보에 의하면 혈질 즉 피의 거머리는 혈교의 여러 괴인 중에서 가장 급이 낮은 전투병. 삼류 초보 교인들에게 비술을 걸어 만드는 잡병이었다.
몸이 닿으면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흡착력과 피를 빨아드리는 흡혈술을 갖췄지만, 척혈단의 고수들에게는 그저 귀찮은 모기나 거머리 취급을 당했던 것.
그렇기에 자폭하는 혈전사나 강력한 무공의 귀장과 달리 강한월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태산사협이 워낙 고수여서 그런 건가? 아니면 비술이 개량된 것인가?
몸을 접촉하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가마꾼을 피하며 강한월은 주변을 살폈다.
상황은 긴박했다.
달마원주와 계율원주는 이미 혈질의 먹이가 되고 있었다. 문어의 빨판이라도 되는 듯 가마꾼의 두 손이 노승들의 몸에 찰싹 붙어 피와 공력을 빨아들였다.
다행히 나한전주는 압도적인 공력으로 가마꾼을 튕겨냈는데, 곧 문제가 발생했다.
공력을 주입해 도움을 주려고 달마원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나한전주까지 한 묶음으로 비술에 걸린 것이다. 역근경의 내공을 폭발시켜 억지로 떼어내려면 뗄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가운데 낀 달마원주가 죽게 될 터였다.
강한월은 마음이 급했다.
소림 고수 세 명이 진기를 빨리고 있는 데다가 나한전주의 상대였던 가마꾼마저 자신에게 쇄도한 탓에 일 대 이의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쐐애액, 퍼엉~
마기를 담은 검강을 전력으로 뿌렸지만, 혈질 각성 후 더욱 강력해진 가마꾼 둘이 힘을 합치는 방어를 쉽사리 뚫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태산사협의 노련미를 간직하고 있는 가마꾼들은 요리조리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상황이 발생했으니 계율원주에게 붙어있던 가마꾼이 손을 떼어내고 강한월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다.
피와 진기를 얼마나 빨린 건지 핼쑥해진 모습으로 풀썩 쓰러지는 계율원주. 반대로 가마꾼은 얼굴이 붉게 빛나고 눈빛이 형형한 것이 더욱 강력해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일 대 삼의 싸움. 나한전주와 달마원주는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고….
혈질조차 이기지 못하면서 혈승들을 잡겠다고 설쳤던 건가? 강한월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아니, 난 지지 않는다.
강한월은 쥐고 있던 검을 던져버렸다.
신법을 발휘해 쉬지 않고 움직이던 발도 멈춰 세웠다.
“내 피를 먹고 싶으냐? 와라!”
잠시 멈칫했던 가마꾼 셋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각각 가슴, 등과 복부를 노리고 날아드는 손.
강한월은 피하지 않았다.
“하하하. 뭐지 저놈은?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곽 공공의 비웃음이 귓가에 꽂혔고, 강한월은 피와 내공을 빨리기 시작했다.
세 명이 동시에 흡입하는 탓에 매우 빠른 속도로 피가 빠져나갔고, 강한월의 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