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00화 (189/210)

100화. 소림 혈투 (4)

* * *

눈처럼 하얗게 변해가는 강한월의 얼굴.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 있는 나한전주와 달마원주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고,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송목 대사는 직접 손을 써야 하는지 갈등에 휩싸였다.

그리고 정옥수는 기뻐하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쳇, 이대로 끝인가? 저 녀석은 꼭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데….

위기에 처한 강한월을 보고 각기 다른 반응이 나왔지만, 정작 본인은 내부의 변화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만큼의 피와 진기가 빠져나갔는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터였다. 모자라면 성과가 없을 테고 많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까.

지금이다!

빈혈 증세가 몰려오는 것을 참으며 강한월은 전력을 다해 공력을 역류시켰다.

금강부동신공과 마공이 양극과 음극으로 작용하며 피의 생명력을 순환시키던 것에서 양극과 음극을 바꿔버린 것이다.

순간 체내의 기운이 뒤틀리며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울컥 올라온 핏물이 입가로 주르륵 흘렀지만 강한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마꾼들을 살폈다.

과연…?

성과가 있었다.

그들의 몸으로 흡수되던 피와 진기도 역류했고, 몸속에서 분탕질을 시작했다.

생명력을 응결하기는커녕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피. 혈교의 비술을 갉아먹는 거꾸로 흐르는 공력.

강한월이나 가마꾼들이나 처한 상황은 같았지만, 오랜 시간 이런 병에 시달려 익숙해진 강한월과는 달리 가마꾼들은 잠시도 버틸 수 없었다.

“흐윽. 크어억.”

시커멓게 죽은 피를 게워내며 바닥을 구르는 가마꾼들.

다시 제 발로 일어설 가능성은 없었다.

확실한 승리. 그렇지만 아직 마지막 가마꾼이 남았다.

혈관과 기맥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강한월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최후의 가마꾼마저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나한전주와 달마원주도 강한월의 승리를 보고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뺏기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우우우웅.

나한전주의 역근기공과 달마원주의 반야신공이 가마꾼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둘 다 소림의 공력이긴 했지만 성질은 확연히 달랐다. 역근경은 선종 계열이고 반야신경은 대승 계열.

밀려든 소림 내공이 가마꾼의 내공 총량을 초과하는 순간 역근기공와 반야신공이 서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경련을 일으키는 가마꾼.

그것으로 두 번째 대결도 끝이 났다.

“휴우. 강한월 자네 덕분에 이길 수 있었네. 그런데… 저들 태산사협은 어떻게 될까?”

안색이 창백해진 나한전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상으로 돌아오기도 힘들 테지요.”

“아미타불. 그건 그렇고 자네의 상태는? 꽤 심각해 보이는데…?”

“저도 죽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보다는 계율원주께서….”

피골이 상접한 채로 바닥을 구르던 계율원주는 방장 대사가 돌보고 있었다. 방장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니 매우 위태로운 상태 같았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자비를 바랄 수밖에. 지금은 남은 싸움에 집중하세나.”

나한전주가 매서운 눈빛으로 곽 공공을 노려봤다.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 눈빛을 받아넘겼지만 곽 공공도 속이 편하지 않았다.

필승을 자신했던 판에서 보기 좋게 진 데다 귀한 자원인 태산사협이 저 꼴이 되었으니 귀빈에게 질책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승부를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세 번째 판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자신이 있으니까.

“흥, 소림의 이름도 다 헛것이었군. 마공에 온갖 변칙까지 써가며 비겁하게 승리하다니.”

“닥치시오, 곽 공공! 태산사협을 이리 만들어 놓고 무슨 염치로!”

“됐고. 빨리 마지막 판이나 시작하지. 슬슬 지루해지려고 하니.”

“바라던 바요. 내가 직접 곽 공공 당신을 상대해 드리겠소!”

방장 대사가 안고 있던 계율원주를 나한전주에게 넘기고 앞으로 나섰다.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불교의 고승이지만, 지금은 곽 공공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빨리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방장 대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판에 출전할 황궁 측의 주자는 따로 있었다.

“후후, 황실의 고위 관료인 내가 너희와 맞상대를 할 수는 없지. 방장 당신의 상대는 바로 여기 있다!”

곽 공공이 음산하게 웃으며 자신의 뒤편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펑, 펑.

가마 옆에 놓여있던 두 개의 관 뚜껑이 돌개바람에 휩쓸린 듯 하늘로 날아갔다.

순간 비릿한 냄새와 함께 훅 퍼져 나오는 핏빛 안개.

관 속에 누워있던 일남 일녀가 번쩍 눈을 떴다.

* * *

같은 시각, 황궁.

화려한 비단 금침 속에 누워있던 귀빈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사념(邪念)을 투영해서 만든 음양혈인(陰陽血人)의 봉인이 풀렸기 때문이다.

‘음양혈인까지 써야 할 상황인 건가? 과연 소림이 이름값을 하는 모양….’

관 속에 누워있던 한 쌍의 남녀는 뱀 혈승이 만들어낸 수많은 괴인 중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피의 비술로 제련하는 여타 괴인들과 달리 음양혈인에게는 뱀의 사념, 보다 정확히는 혈령의 조각을 심어 넣은 것이다.

소중한 영혼의 조각을 할애하여 만들었기에 일정 시간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초상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후후, 소림이 얼마나 강한지 감상이나 해야겠군.’

뱀은 침상 옆에 놓은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음양혈인과는 혈령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쿵쾅쿵쾅쿵쾅….

급격한 흥분과 함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 분명했다.

* * *

관 속에서 걸어 나오는 시커먼 장포의 남자와 새하얀 소복의 여인.

길게 풀어헤친 머리에 창백한 피부, 유독 빨간 입술만 도드라져 마치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

방장 대사의 입에서 불호가 흘러나왔다.

어쩌자고 불문의 성지인 이곳 소림에서 저런 사악한 괴인들이 설치는 것인지….

“방장. 쫄 것 없어. 귀신같이 보이지만 저들도 사람이니까.”

어느 틈에 나무 위에서 내려온 송목 대사가 방장 대사의 옆에 서며 말했다.

“사조님. 제가 쫄다니요? 제자들이 듣고 있는데 그런 말은 좀….”

“왜? 듣기 거북하나? 난 자네가 겁먹었을까 봐.”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송목 대사는 일부러 경박스레 말했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방장 대사는 패배할 가능성은 일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긴장하지도 않았다.

신주의협이 천하제일고수라고 이야기하지만, 활동을 안 해서 사람들이 모를 뿐 송목 대사의 실력도 천하제일을 논할만하다고 방장 대사는 굳게 믿었다.

게다가 자신도 명색이 소림의 방장.

이 대 이의 싸움에서 자신들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방심하진 말라고. 자, 그럼 시작해볼까?”

송목 대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장 대사가 먼저 행동을 시작했다.

그의 상대는 소복의 여인 음혈인.

그녀의 머리 위로 두둥실 떠 오른 방장 대사가 승복 소매를 펄럭이며 장력을 날렸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장력을 향해 음혈인이 한 손을 쭉 뻗었다.

콰아아앙!

무려 오 장이나 하늘로 튕겨 올랐다가 몸을 회전시키며 착지하는 방장 대사. 한 마리 나는 새처럼 아름다운 동작이었지만 보는 눈이 있는 자는 즉시 알 수 있었다. 공력의 힘에서 방장 대사가 밀렸다는 것을.

엄청나군. 소림사 방장보다도 내공이 강하다고?

내상 치료가 급했지만 강한월은 정신을 집중해서 대결을 살폈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송목 대사가 상대를 꺾을 때까지 방장 대사가 버틸 수 있는지가 승부처가 될 것 같았다.

불안한데….

강한월의 얼굴에 살짝 근심의 빛이 번졌다.

방장은 잘 버텨줄 거야.

송목 대사는 믿었다.

코흘리개 사미승 시절부터 방장을 봐왔기에 그가 얼마나 열심히 내공을 수련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소림의 내공은 정종 중의 정종. 정종의 내공은 흘린 땀과 노력을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까.

어쨌든 빨리 끝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려면 우선 저놈을 붙잡아야 하는데….

송목 대사가 남은 상대인 양혈인을 향해 가볍게 손목을 휘저었다.

가벼운 살랑바람이 일더니 양혈인 앞에 다다를 때는 거대한 폭풍으로 증폭되었는데.

콰아앙!

폭탄이라도 터진 듯 파헤쳐진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양혈인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오 장이나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눈부시게 빠른 신법.

사실 그냥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그 움직임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으니….

“허, 쾌속의 벽을 넘었구나!”

송목 대사가 혀를 찼다.

속도만 놓고 보자면 절대고수 중의 절대고수.

어디 누가 더 빠른지 보자는 듯이 송목 대사가 사내를 향해 쇄도했다.

믿을 수 없는 속도였지만 그 순간 양혈인은 이미 저만큼 물러서 있었다.

급히 손가락을 들어 탄지신통을 쐈다. 그가 익힌 무공 중 가장 빠른 것이 이것이기 때문. 하지만 화살보다 백 배는 빠른 지풍을 날렸음에도 양혈인은 유유히 몸을 피했다.

초월적인 속도. 역시 까다로운 상대였다.

저 빠름이 공격으로 전환될 경우 어떤 파괴력을 가질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과연 속도뿐일까?

분명 무언가 더 있는데….

그 순간 방장 대사는 음혈인과 내공 대결을 시작했다.

몇 차례 장력을 교환하다 자연스레 두 손을 붙인 채 내공을 겨루게 된 것이다.

눈부신 속도로 주변을 휘돌고 있는 송목 대사의 대결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정적인 대결. 하지만 실상 이것이 더 흉험하다는 것을 알 사람은 알았다.

여인이 평온한 모습인 데 반해 방장 대사의 발밑은 한 치나 땅속으로 꺼져 있었다.

도대체 이 여인은 어찌 이런 막강한 공력을 갖게 된 것일까?

육십 년간 하루도 빼지 않고 내공을 연마한 방장 대사 입장에선 속이 탈 노릇.

게다가 장심을 파고드는 극음의 냉기 때문에 기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조님.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둘러야 함은 송목 대사도 알고 있었다.

속절없이 양혈인의 꽁무니만 쫓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무언가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것.

조금만 더… 이제 한 방향만 더하면….

“대인. 과연 대인의 수하들은 대단하군요. 송목 저 노인이 많이 지쳐 보입니다.”

흐릿한 잔상만을 남기며 빠르게 움직이던 송목 대사가 웬일인지 갑자기 멈춰 섰다. 정옥수의 눈에는 상당히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흥,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게냐? 송목 노괴가 소림 내공을 연마한 지 백수십 년이고 절대의 경지를 돌파한 것도 오십 년이 넘었다. 벌써 지칠 리가 없지.”

따끔한 곽 공공의 핀잔.

제법 논리적인 말이었지만 정옥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눈에는 분명 그리 보였으니까. 저게 지친 표정이 아니면 뭐라는 말인가?

그리고… 그녀가 맞고 곽 공공이 틀렸음이 곧 밝혀졌다.

“휴우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겨우 이 정도 움직였다고 벌써 힘들구나.”

송목 대사가 과장되게 팔다리를 주무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지친 표정과는 달리 눈빛은 초롱초롱 빛났는데.

“뭐, 힘은 들지만 준비도 대충 끝났으니 이제 제대로 해보자고.”

* * *

귀빈, 즉 뱀 혈승은 벌써 석 잔째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음양혈인의 거친 숨결과 투지가 전달돼 오자 뱀의 몸도 후끈 달아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기분.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빈이 된 후 자신이 직접 손을 쓸 일이 전무했으니까.

그래. 가끔은 나도 몸을 좀 움직여야겠어.

펄떡거리는 심장을 움켜쥘 때의 손맛을 느껴본 게 언제인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네 잔째 술을 따르던 손이 순간 얼어붙었다.

뭐지?

술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초인적인 자신의 감각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한 올 한 올 일어서는 솜털.

개미가 지나가는 듯 손등을 간지럽히는 불쾌한 느낌.

하지만 위기감에 피부가 저릿할수록 뱀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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