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생사기로 (1)
* * *
열기의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양혈인은 산산이 조각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흑사련 고수 중에는 귀살검과 독수혈침이 폭발에 휘말려 죽었다.
오방혈수들도 바닥에 널브러진 것이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송목 대사는…?
휘이익 바람이 불어와 자욱한 연기를 밀어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송목 대사.
수염과 눈썹이 완전히 타버리고 심한 화상으로 피부 곳곳이 벗겨졌다.
아궁이의 타다 만 장작처럼 비참한 몰골이었지만, 중요한 건 두 발로 꼿꼿이 서 있다는 것.
“사조님!”
“나 안 죽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시게. 방장은 내 신경 쓰지 말고 제자들이나 돌보라니까.”
송목 대사는 곽 공공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초라한 모습. 하지만 곽 공공의 눈에는 불사의 거인처럼 느껴졌다.
“곽 공공. 당신이 이 대 이의 약속을 깼으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겠소?”
“흥, 애당초 약속은 말이 되지 않았다. 황실이 명령하면 그대들은 따라야 할 뿐.”
“뭐 그건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더 싸워봐야 당신에게 득 될 게 없을 텐데?”
송목 대사가 손가락을 들어 뒤편을 가리켰다.
산산조각이 난 시체들과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오방혈수들. 게다가 살아남은 흑사련 고수들도 눈빛이 안 좋았다. 양혈인의 자폭으로 동료를 잃은 것에 분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에겐 아직 음혈인이 있다! 그리고 송목 당신도 정상은 아닐 텐데?”
“한 번 더 자폭을 시키겠다? 나는 상관없으니 그렇게 해보시던가?”
송목 대사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근거 있는 자신감일까, 아니면 공갈일까?
곽 공공이 재빨리 머리를 굴려 유불리를 따져봤다.
데려온 고수들 중 상당수가 전투 불능. 기대했던 사념체도 태반이 소멸되었고 나머지도 양혈인의 자폭 후 힘을 잃고 있었다.
반면 소림의 전력 손실은 미미했다.
초반에 나한승 몇몇이 죽은 것 외에는 계율원주와 젊은 고수 하나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이 전부.
무엇보다 송목 저 노괴가 아직 버티고 있으니….
“소림은 자비를 근본으로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소. 부상자를 치료해야 하니 빨리 결정을 하시오. 싸울 거요 말 거요?”
곽 공공의 속이 타들어 갔다.
당장 후퇴함이 정답이지만 그러자니 귀빈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눈앞의 송목과 황궁의 귀빈 중 누가 더 무섭냐고?
답은 뻔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품에 넣어 폭죽을 꺼낼 수밖에.
“송목, 방장. 잘 들어라! 지금 산 밑에는 오천의 어림군이 대기하고 있다. 이 폭죽이 터지면 즉시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다!”
“우리가 병사 오천을 두려워할 것 같소?”
“병사들의 무술 실력이야 두려울 게 없겠지. 하지만 소림의 승려들이 제대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일반 병사들을 학살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사이 병사들은 천년 역사의 소림사를 불태울 텐데.”
“틀린 말은 아니군. 그렇다면 곽 공공 당신이 폭죽을 터트리지 못하게 해야겠군.”
송목 대사와 곽 공공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하지만 이것이 뻔한 말싸움이 아닌 건 모두가 알았다.
긴장의 끈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당겨진 것.
붉은 옷의 무사들은 활시위를 겨눴고 음혈인은 소림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승포 소매가 팽팽히 부푼 것을 보니 소림의 고승들도 출수할 준비를 마친 듯했다.
당겨야 하나?
곽 공공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황실 최고수라 소문난 그였지만 송목 대사에 맞설 수 있다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았다.
폭죽의 끈을 당기기 위해 근육과 관절이 움직이는 순간 송목이 번개보다 빠른 공격을 하겠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귀빈이 때맞춰 음혈인을 폭파시켜 준다면….
결심이 선 곽 공공의 손이 까딱이려는 순간.
“잠깐.”
심한 부상으로 인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강한월이 힘겹게 외쳤다.
“뭐지?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당신에겐 할 말이 없소. 다른 분께 드릴 말씀이 있지.”
강한월이 소림사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뚫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는 사람들. 선두엔 장준검과 소영영이 있었고 그 뒤를 황태자와 박위가 따랐다.
“황태자 전하!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지. 내가 너무 늦었군. 좀 더 빨리 내려왔어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는 황태자의 표정이 심각했다.
소림에 대한 미안함, 귀빈 패거리에 대한 분노,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제왕의 수업을 받은 황태자는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안색을 회복하더니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곽 공공. 불문의 성지에서 황실의 이름을 팔아 이런 일을 벌이다니… 정말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군.”
“황태자 전하. 저는 명을 따를 뿐입니다.”
“황제 폐하가 아니라 귀빈의 명을 따르는 게 자랑은 아닐 텐데?”
“귀빈께서 황제 폐하의 의지를 대변하신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쯧쯧. 끝까지 궤변이군. 되었고… 난장질은 이만하면 충분하니 이쯤에서 물러나시게.”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저 명을 따를 뿐….”
“삼황자를 데려가게.”
황태자가 짧게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엄청난 고뇌의 산물임이 분명했다.
장준검, 박위와도 상의한 것인데… 삼황자를 넘기지 않는 한 문제는 점점 커질 거라는 게 결론이었다. 만약 귀빈이 삼황자를 포기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인데, 그 경우 역모라는 방식을 택할 것이 뻔했다. 그럼 황권을 둘러싼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
침통해하는 소림의 승려들.
반면 곽 공공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결국 자신의 승리. 수하를 많이 잃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귀빈의 문책도 없을 것이고.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남아 있었는데….
“준검아.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나와 함께 가자.”
삼황자를 인계받으러 가던 중, 곽 공공이 장준검에게 먼저 다가갔다.
“병필태감 대인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동창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해한다. 많이 서운했을 테지. 너를 보호해주지 못한 나에게 실망이 컸을 거야. 하지만 삼황자를 확보하는 성과를 냈으니 귀빈께서도 더 이상….”
“그간 키워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귀빈에 대해선… 휴우, 아무쪼록 양해를 바랍니다.”
“정녕 보장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냐?”
“저는 강 소협과 함께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강… 소협? 강씨라면… 강한월을 말하는 건가?
그놈의 이름이 왜 갑자기…?
잠시 의아해하던 곽 공공은 비로소 깨달았다.
저놈이구나! 송목의 속가제자라는 저놈이 바로 강한월이구나!
참기 힘든 분노가 치솟았다.
아들같이 키웠던 장준검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만든 것도, 봉위선의 일을 망쳐 소림까지 찾아오게 만든 것도… 모두가 저놈 때문이구나!
곽 공공의 표정에서 얼음 같은 냉기가 풍겼다.
다른 건 몰라도 강한월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혼자만은 아니었는데, 분노한 이유야 달랐지만 오늘 끝장을 보려는 생각은 정옥수도 마찬가지였다.
삼황자를 넘겨받은 후 제자리로 돌아오던 곽 공공.
뚜벅뚜벅 걷던 중 갑자기 강한월을 향해 벼락같은 장력을 날렸다.
이심전심이었을까? 그 순간 흑사련의 염왕장과 흑한쌍귀도 은밀한 기습을 시도했다.
“안 돼!”
“멈추시오!”
곳곳에서 호통이 터졌지만 곽 공공의 개의치 않았다.
일단은 죽여 놓고 볼 일. 설마 강한월 하나 죽는다고 황태자가 마음을 바꾸겠는가?
하지만 그의 바람이 손쉽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퍼엉, 콰아앙!
가까이 있던 장준검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들며 곽 공공의 장력을 막았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송목 대사도 마술처럼 나타나 염왕장과 흑한쌍귀의 공격을 걷어냈다.
제길, 실패인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곽 공공의 눈에 쏜살같이 날아가는 빛살이 보였다.
정옥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칼!
뇌옥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장준검은 이것마저 막을 힘은 없었다.
염왕장을 밀어내던 송목 대사가 급히 손가락을 튕겼지만, 칼은 탄지신통에 맞고도 부러지지 않고 날았다.
정옥수의 칼은 보물 중의 보물인 삼안혈도(三眼血刀)이니까.
쇄애액.
챙강.
강한월이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검으로 막아봤지만, 내공을 담지 못한 검은 삼안혈도 앞에선 수수깡이나 다름없었다.
검을 두 동강 내며 그대로 복부에 박히는 칼.
울부짖으며 달려온 소영영이 쓰러지는 강한월을 부둥켜안았다.
“곽 공공! 이게 뭐 하는 짓이요? 정말 끝장을 보고 싶은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저 젊은이와는 묵은 원한이 있기에… 황태자 전하나 소림과는 관계없는 사적인 일이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황태자지만 이번만큼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친분이 오랜 것은 아니지만 강한월에게는 특별한 기대와 애착이 있는 것이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단전을 꿰뚫렸으니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는데….
“황태자 전하.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습니까? 저들을 보내주시지요.”
“송목 대사님! 지금은 자비를 말할 때가 아닙니다. 강 소협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나를 믿고….”
“그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부상 치료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소란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미타불.”
부상 치료를 위해서라니 황태자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소림이 나서주지 않으면 곽 공공을 징벌할 힘도 없었다.
가마에 오른 곽 공공은 수하들을 데리고 빠르게 물러났다.
삼황자를 확보한 데다 강한월에게 분풀이도 했으니 표정이 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옥수는 좀 찜찜한 표정이었는데 강한월의 복부에 박혀 있는 삼안혈도 때문이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이 하도 여럿이라 칼을 돌려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곽 공공와 흑사련의 무리는 그렇게 소림에서 멀어졌다.
“사조님!”
대열의 후미에 섰던 자들까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송목 대사의 무릎이 휘청였다.
방장 대사가 달려들어 부축을 해야 할 정도로 기력이 쇠한 상태.
“난 괜찮으니 호들갑 떨지 마시게.”
“괜찮으시다니요? 이렇게 몸이 불덩이 같은데. 공륜 사제는 뭐 하는가? 어서 대환단을 가져오지 않고?”
“됐다는 데도 그러는구나. 난 좀 지쳤을 뿐이야. 기벽을 치느라 무리를 한 상태에서 자폭을 방어하느라 공력이 소진되었어.”
그래서였구나.
어째서 송목 대사가 곽 공공 무리를 빨리 보내려고 했는지 이제야 밝혀졌다.
송목 대사의 상태를 적들이 눈치챘다면 삼황자 뿐만 아니라 황태자까지도 위험할 수 있었던 것.
방장 대사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송목 대사가 고개를 돌려 강한월을 바라봤다.
장준검이 내력을 불어넣고 있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정신을 잃은 강한월의 얼굴을 시체처럼 창백했다.
“대사님… 그… 대환단을 주실 수 없을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소영영이 송목 대사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여기는 소림사. 대환단만 얻을 수 있으면 분명 대장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글쎄. 영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거라면 대환단보다 더한 것도 내놓을 텐데….”
가슴이 철렁해지는 말을 하며 송목 대사가 강한월을 안아 들었다.
“사조님. 어째 직접 몸을 움직이십니까? 내려놓으십시오. 강 소협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되었네. 강한월은 나한테 맡기고 자네들은 각자 볼일들 보시게나.”
송목 대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산 위로 올라갔다.
소영영은 쫓아가고 싶었지만 장준검이 만류하는 통에 발만 동동 굴렀다.
“소저. 지금은 송목 대사님을 믿어볼 수밖에 없어요. 방해하지 않는 것이 돕는 길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황실과 흑사련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조만간 큰일들이 터질 겁니다. 강 형의 상태가 저러하니 우리가 더 힘을 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