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생사기로 (2)
* * *
청소를 담당하는 동자승까지 내보낸 후 암자의 문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출입을 금한다는 금줄을 내걸었다.
이제 이곳은 오로지 송목 대사와 강한월만을 위한 공간.
“참으로 길고 고단한 하루군. 노년이 너무 적적하고 심심하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는데, 그걸 부처님이 들으셨던 걸까?”
삭신이 쑤셨지만 송목 대사는 쉴 수 없었다.
침상에 강한월을 눕히고 진맥을 시작했다.
웬만한 상세야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는 실력이지만, 이번만큼은 세심하게 살피고 또 살폈다.
“자네… 몸 상태를 보니 얼마나 기구한 인생을 살았는지 알겠구나.”
상대가 듣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송목 대사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크다는 증거.
강한월의 상태는 심각했다.
세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내공을 역류시키면서 기맥과 기혈이 엉망으로 망가졌다는 것. 두 번째는 금강부동신공과 마공의 양 극성이 깨지면서 혈액의 병이 재발했다는 것. 마지막 문제는 칼에 꿰뚫리면서 단전이 크게 손상됐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위태로웠고 살아남는다 해도 십중팔구 무공을 회복하긴 요원한 상태.
하지만 여기는 소림이었고 송목 대사는 생명을 살리는 데는 천하제일의 의원보다 못할 게 없었다.
“목숨을 보전하는 게 목표라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는데….”
대환단, 그리고 자신의 웅혼한 공력을 사용한다면 생명은 구할 수 있다.
역류의 영향으로 미친 듯이 폭주하는 내공을 제거한 후 대환단으로 단전과 혈맥을 치료하면 되는 것이다. 내공이 사라지면 혈액 병증이 문제를 일으킬 테지만, 송목 대사의 강력한 내공으로 생명력을 순환시켜준다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나면 단전에 다시 내공이 쌓이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죽을 위험은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 봐야 공력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 과거의 수준을 회복하려면 최소 십 년은 걸릴 터.
과연 이 젊은이가 그것을 원할까?
왠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곽 공공과 흑사련이 몰고 온 괴인들, 대놓고 황태자를 적으로 돌리는 귀빈, 감히 소림의 본산을 쳐들어온 적들.
장구한 무림의 역사상 이런 무도한 집단이 있었던가?
“자네랑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 못한 게 후회되는군. 도대체 어떤 적들과 싸우고 있는 건가? 이렇게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 정도로 절박한 것인가?”
답을 듣진 못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월은 몹시 절박하다고. 목숨을 걸 정도로.
그렇다면 조금 전 생각했던 치료 방법은 적합하지 않았다.
소림사를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무공에 큰 손실이 오는 방법을 원할 리 없으니까.
“어쩐다….”
송목 대사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 애처로운 젊은이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병을 치료하고, 더불어 무공의 진전을 이룰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
실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송목 대사는 강한월의 무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십 대에 절대의 경지에 오른 것은 분명 엄청난 성과지만, 마공과 불공을 섞는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요원한 것이다.
송목 대사는 무공에 목을 매는 사람은 아니다.
무공이 더 강해진다고 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쓸데없는 욕심과 번민만 늘어갈 뿐.
하지만….
“자폭을 한 혈인이나 다른 괴인들… 보아하니 그들도 쓰고 버리는 도구에 불과하더군. 그렇다면 적의 수괴는 도대체 얼마나 강할지?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고, 아마 무당의 소요자 그 늙은이도 방법이 없을 거야. 신주의협이라면 가능할까?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서지 않고 제자인 자네를 앞세우는 걸 보면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듯한데….”
송목 대사는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풀기 힘든 문제에 봉착했을 때의 습관.
한 시진 넘게 그러고 있던 노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민한다고 뾰족한 답이 나올 리 없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자네가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건 나와 연이 닿았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겠네.”
부지런히 손을 놀려 강한월의 옷을 모두 벗기고 물수건을 준비해 정성껏 닦았다.
더 이상 이게 오른 선택일까 고민하지 않았다.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부처님의 뜻에 맡길 뿐.
송목 대사가 강한월의 가슴과 단전 부위에 양손을 얹었다.
“많이 고통스러울 거야. 아, 기절한 상태라 고통도 못 느끼겠군.”
웅장한 내공이 강한월의 몸속으로 폭포수처럼 밀려 들어갔다.
침상이 파르르 떨리고 암자의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력한 내공이었다.
곽 공공 일당을 상대하느라 지쳤을 텐데도 송목 대사는 아낌없이 내공을 쏟아부었다.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월 몸에서 날뛰는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을 모조리 없애야 했으니까.
“휴우, 이것 참 힘들구나.”
무려 두 시진이 흐른 후에야 송목 대사는 허리를 폈다.
피부색이 누렇게 떴고 눈가에 잔주름도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많이 지친 모양. 하지만 쉴 여유는 없었다.
“이제 두 번째 단계인데… 이번 것은 고통은 없을 거야.”
선반 위의 목함을 뒤져 자기병을 꺼냈다.
그 속에서 굴러 나오는 대환단 두 알.
잠시 고민하던 송목 대사는 한 알하고 반을 강한월의 입에 밀어 넣고 나머지 반 알을 자신이 먹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도 막대한 내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맥과 기혈을 치료하고 하단전을 되살리려면… 흠… 며칠 걸리겠군.”
* * *
“확인하셨어요? 대장은… 무사한 거죠?”
송목 대사의 암자를 찾아갔던 방장 대사가 돌아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던 소영영이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암자 문이 아직 굳게 닫혀 있어서….”
“아….”
기대했던 답을 듣지 못해서일까, 소영영의 무릎이 휘청였다.
송목 대사가 강한월을 업고 암자에 들어간 지 삼 일째. 방장 대사가 매일 찾아갔지만 아직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상황이 나쁘다면 오히려 소식이 있었을 테니까요. 이럴 때는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죠.”
장준검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다지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방장 대사의 말에 소영영은 더 큰 혼란을 느껴야 했다.
“이번에도 얼굴을 뵙진 못했지만 말씀을 들을 수는 있었소. 송목 사조께서 말씀하시길 강한월 소협은 시간이 좀 필요하니 동행들께서는 먼저 복귀하라고 하셨다오.”
“대장을 놔두고 먼저 가라고요? 어째서요?”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사조께서 분명 생각이 있으실 테니 그분의 의견을 따르는 게 좋겠소.”
소영영이 울상을 지었다.
걱정이 되어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대원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할 건가? 대장을 혼자 두고 왔다고 난리를 칠 텐데….
“소저. 방장 대사의 말씀대로 하시죠. 강 소협은 송목 대사와 함께 있는 한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상의했던 사안도 시간이 매우 촉박합니다. 여기서 마냥 기다릴 수는….”
장준검의 말이었다.
강한월을 걱정하는 마음은 그 역시 다르지 않지만, 여기 계속 머물 수 없는 상황도 분명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곽 공공이 강한월이 누구인지 알아버린 것.
동창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문무대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고, 귀빈이 독한 마음을 먹을 경우 문무대 전체가 위험한 상황.
그렇기에 장준검은 소영영을 독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저. 빨리 전 대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대피시켜야 합니다. 제 생각엔 낙양의 대원들이 강 소협보다 더 위태롭습니다.”
“휴우. 알겠어요. 저는 즉시 낙양으로 돌아갈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소저. 저도 오늘 밤 황태자님을 모시고 출발할 겁니다.”
황태자는 국경 지역의 대장군에게 몸을 의탁할 계획이었다.
삼황자를 확보했다 해도 귀빈에게 있어 황태자는 여전히 눈엣가시 같은 존재. 소림사마저 대놓고 쳐들어올 정도로 막 나가는 그들은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터였다.
결국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할 상황임이 분명했다.
“한동안은 못 뵙겠네요. 아무쪼록 안전하시기를 기원하겠어요. 연락 주는 거 잊지 마시고요.”
“문무대 여러분도 모두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하오문 민정화 소저의 도움을 받으면 소식을 주고받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 * *
황궁 후원의 정자.
삼황자를 사이에 두고 귀빈과 원숭이가 마주 앉았다.
누군가 봤으면 눈살을 찌푸렸을 모습이었다. 차기 황권의 유력 후보인 삼황자가 무릎을 꿇고 앉았으니까.
“원숭이 네가 쓸모가 있구나. 삼황자를 혈복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하하, 먼저 간 토끼형 덕분이죠. 아직은 혈복 연계가 조금 불완전하고요. 조만간 제 피를 한 번 더 주입하겠습니다. 그럼 혈복 비술이 완벽해질 겁니다.”
원숭이는 꽤나 신난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곧 천하의 지배자가 될 자를 자신의 노복으로 부리게 되었으니.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은 물론이고, 삼황자가 혈복으로 있는 한 자신의 안전도 보장되는 것이다.
뱀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원숭이의 생각이야 뻔히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당분간은 대접을 해줄 테니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원숭아.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일지… 흐흐흐.’
눈치와 잔머리로는 열두 혈승 중 최고인 원숭이가 뱀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차려진 술과 안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실은 그가 당장 관심이 가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대형. 이번에 소림에서 꽤나 고전을 했다면서요?”
“소림의 늙은 괴물이 대단하긴 하더군. 아깝게도 음양혈인 중 하나를 잃었지.”
“곽 공공의 말을 들으니 골치 아픈 젊은 놈도 하나 있었다던데. 이름이 뭐라더라? 강 뭐였던 것 같은데….”
원숭이가 은근슬쩍 강한월을 언급하자 귀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네가 왜 그놈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전에 내가 물었을 땐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아, 저는 모르지요. 그냥 젊은 놈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대형이 손수 키운 수하들을 상대할 수 있었나 궁금해서요.”
“흥, 관심 가질 필요 없다. 강한월 그놈은 이미 죽었으니까.”
“확실합니까?”
“혈질을 상대하느라 기맥이 터지고 보도에 단전마저 꿰뚫렸다더군. 십중팔구 죽었을 거고, 혹 목숨을 건졌다 한들 폐인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원숭이는 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강한월은 혈승보다 더한 괴물 같은 놈. 그런 놈이 고작 뱀의 수하들의 손에 죽었을까?
어쩌면 이 안일한 대처가 언젠가 뱀의 목을 조르게 될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충고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말이다.
“강한월 그놈은 죽었지만 그래도 그 뒷배는 조금 신경이 쓰이더군.”
“뒷배요? 그놈을 키운 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동창의 정보력을 동원해 알아봤지. 강한월은 신주의협의 제자다.”
“신주의협? 헐… 만만치 않은데요.”
“그래. 이 시대의 최강의 적이지. 몇 년간 소식이 없길래 어디서 급살이라도 맞았나 했더니 제자 놈을 앞세워서 우릴 방해하고 있던 거였다.”
“혹시… 신주의협이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겁니까?”
“그건 알 수 없다. 아마 아닐 거라고 보지만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봐야지.”
“어디서 알아본다는 말씀입니까?”
“강한월 그놈이 무림맹 소속이다. 문화사업을 하는 부대라던데, 물론 주변의 눈을 의식한 위장일 테지. 그곳을 족치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원숭이의 뇌리에 낯익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광군영, 제갈윤, 소영영, 위청보….
그리고 진가린의 얼굴까지.
흠… 진가린 그것은 죽지 않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어렵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