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생사기로 (3)
* * *
강한월은 꿈을 꿨다.
매우 긴 꿈이었다.
척혈단 동료들과 함께 혈교에 맞서 싸우는 꿈.
비술로 탄생한 온갖 괴인들을 베어 넘기고, 동료들의 죽음에 울분을 삼키는….
조각난 살점과 뼈가 난무하고 혈향이 가득한 그 꿈은 강한월에겐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새로운 장면이 추가됐다.
지금껏 수백 차례 꿈을 반복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혈교의 전사들이나 척혈단의 영웅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눈으로 뒤덮인 높은 봉우리.
꿈의 주인공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의 눈을 통해 주변을 둘러보며 강한월은 생각했다.
여기는… 무공을 수련하는 곳인가?
봉우리 곳곳이 날카롭게 베어져 있었다.
분명 예리하기 그지없는 검의 흔적.
하지만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꿈의 주인공의 시선이 십여 장 떨어진 아름드리나무를 향했다.
순간 마음속에 나무가 베어진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허리 둥치가 깨끗이 둘로 나뉘었다.
쿠웅!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공력이 일어나거나 검기가 방출되는 느낌도 없었다.
이건… 설마…?
긴 꿈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 * *
“이제 정신이 좀 드나?”
강한월이 눈을 뜸과 동시에 송목 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송목 대사가 살아있다는 건 소림이 처참히 패하진 않았다는 뜻이니까.
“대사께서 절 구해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글쎄. 자네를 치료한 건 사실이지만… 감사를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군.”
송목 대사의 표정이 애매했다.
단순한 겸양은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강한월은 얼른 몸 상태를 살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강한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부를 살피기 위해 진기를 일으키는 순간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하단전을 가득 채운 금강부동신공이 일어나고, 그에 호응하여 중단전에 자리잡은 마기가 기지개를 펴야 하는데….
하지만 없었다.
금강부동신공도, 그리고 마기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기운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단전은 물론 기맥과 기혈 곳곳에 웅혼한 기운이 넘쳐났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금강부동신공과 마기가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혈액의 병 또한 재발했을 텐데…?
“피는 걱정하지 말게. 비록 방법은 다르지만 병의 재발은 막아 놨으니….”
“제가 어리석어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흠… 그게 말이야… 실은….”
겸연쩍은 표정의 송목 대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공력의 역류로 기맥이 엉망으로 망가진 것, 그리고 삼안혈도에 꿰뚫려 하단전이 파괴된 것을.
여기까지는 강한월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의 일.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자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었어. 소림엔 대환단이 있고 내가 익힌 내공에 상처 치료의 효능이 있거든. 정작 고민이 된 것은 자네의 무공에 관한 것이었네. 과연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가….”
“맞습니다. 무공을 잃는다면 살아있을 의미가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라고 꾸짖고 싶지만, 곽 공공이 데려왔던 괴인들을 생각하니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군. 어쨌든 무공에 관해선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네.”
첫 번째 방법은 기존의 금강부동신공과 마공을 유지하며 치료하는 것.
하지만 망가진 기혈과 기맥 때문에 마공을 내버려 둘 수 없었고, 하단전이 파괴된 바람에 금강부동신공도 상당 부분 유실되었다. 조화가 깨졌으니 몸에는 독이 될 터, 억지로 두 공력을 흩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가도록 해야 했는데….
“그 방법으로 치료했다면 예전의 무공 수준을 회복하는 데 족히 몇 년은 걸렸을 거야.”
“저에게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군요.”
“그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럴 시간 여유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군. 결국 다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네.”
송목 대사는 강한월이 가진 금강부동신공과 마공의 특성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말도 안 되는 시도였지만 송목 대사가 백 수십 년을 쌓아온 역근경의 힘이라면 가능했다.
웅장한 역근경의 힘으로 강한월의 공력을 감싸 안아 자신의 몸으로 흡수한 후, 텅 빈 강한월의 단전과 기맥을 치료했다.
그사이 송목 대사의 몸속에서는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의 연화가 이루어졌다.
강한월의 단전이 다시 소생한 후, 송목 대사는 특성이 사라진 공력을 강한월의 몸에 돌려놓았다.
그것이 현재 강한월의 몸을 돌고 있는 기운.
“하지만 제 혈액병이 어떻게 재발하지 않는지는….”
“아, 그거? 별거 아니야. 마침 역근경의 능력 중에 자네 피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힘이 있거든.”
“그런가요? 그렇다면 어째서 예전에 제 사부님이 찾아오셨을 때는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시고 금강부동신공을…?”
“흠… 그건 말이지… 역근경에 그런 능력이 있는 건 맞지만 그 정도 힘을 갖추기 위해선 최소 한 갑자 육십 년 이상을 연마해야 하거든. 당시 자네의 상황에선 그럴 시간이 없었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강한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오랜 시간 공들인 역근경 공력만이 혈액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그 말인즉슨….
강한월은 즉시 대화를 멈추고 몸속을 관조했다.
기맥을 돌며 힘찬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는 막대한 양의 공력.
송목 대사는 강한월의 금강부동신공과 마공을 연화하여 다시 돌려놓은 것이라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강한월 본인의 연화된 공력도 일부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송목 대사 자신의 역근경 공력을 아낌없이 부어준 것이었다.
“대사님. 본신 내력을 저에게 주신 겁니까? 이건…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당장 죽기라도 할까 봐?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네.”
“하지만….”
“어차피 버리려던 공력이었네. 쓸데없이 높은 공력을 갖고 있으니 몸이 죽지를 않아. 내 나이 이미 백 오십이 넘었네. 괴물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지. 도대체 언제까지 더 살라는 말인가?”
송목 대사의 목소리에서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역근경은 신체를 건강히 하는 데는 독보적인 기공. 하지만 일정 수준을 지나 너무 높은 경지에 도달하니 역효과라면 역효과라 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세월은 흐르는데 신체의 건강이 유지되는 것.
어떤 자에겐 축복일 수 있겠지만 송목 대사에겐 아니었다.
“진작 마음먹었던 일이야. 하지만 소림에 불길한 일이 닥칠 것 같아 미뤄왔었지. 이제 곽 공공의 침입도 지나갔고 마침 자네를 만났으니… 이게 인연이 아니면 뭐겠나?”
회귀를 해서라도 생을 계속하려는 자들이 있는 반면 송목 대사와 같은 분도 있구나.
노승의 깊은 고뇌와 뜻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했다.
강한월은 진심을 담아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네가 내 뜻을 이해하니 다행이로군. 하지만 이게 과연 감사를 받을 일인지는….”
송목 대사의 표정에 살짝 미안한 감이 돌았다.
왜 그러는 건지 강한월은 알고 있었다.
“제 무공을 우려하시는 것이죠?”
“그렇다네. 내가 본 바로는 자네의 무공은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을 기반으로 하더군. 물론 신주의협의 금검공도 익혔겠지만 주력은 마불진경의 무공인 것 같던데… 맞는가?”
“정확히 보셨습니다.”
“자넨 더 이상 마불진경의 무공을 쓸 수 없네.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이 사라졌으니 초식을 흉내 내더라도 위력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겠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에게 시간이 없는 걸 아시면서도 이 길을 선택하셨으니 무언가 생각하신 바가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미안해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이야. 솔직히… 대책 같은 건 없다네.”
송목 대사에게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당장 위험한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강한월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현실은 냉혹하니까.
“지금 자네의 상태는 힘만 센 바보와 같아. 아, 물론 충분한 양의 내공이 있으니 웬만한 자들이야 쉽게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곽 공공이 몰고 왔던 괴인들이나 그들을 만들어낸 진짜 흉수들은 내공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지.”
더 큰 문제는 역근경이 싸움에 특화된 공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역근경은 태생이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는 기공. 송목 대사야 백수십 년의 수련을 통해 역근경을 기반으로 소림의 절예를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강한월에겐 불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소림 칠십이종 절예 중에 역근경과 상성이 맞는 게 몇 개 있기는 해. 하지만 그걸 배우라고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시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그것으로 괴물들을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제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신 바가 있으시군요?”
“이쯤 이야기했으면 자네도 이미 알 텐데?”
순간 송목 대사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그 꿈도.
“결국… 심검인 것입니까?”
“그래. 난 그렇게 믿는다네. 자네가 신주의협의 제자인 것도, 이곳에서 큰 부상을 입은 것도,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네의 공력을 지우게 된 것도…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면 그 길은 심검과 이어져 있네.”
“하지만 저는 심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정말인가?”
송목 대사는 믿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강한월이 심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방금 전까지 반복되는 꿈속에서 본 것은 분명 심검을 수련하는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안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꿈은 꿈일 뿐이니까.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눈을 통해 겉에서 훔쳐본 것일 뿐.
“그렇다면 자네는 빨리 사부님을 만나야겠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군가 심검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신주의협일 걸세.”
정확한 조언.
그렇기에 강한월 입장에선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심검이 아니라도 사부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도대체 소식이 닿지를 않으니….
* * *
삼황자를 찾아오는 일을 성공했으니 이제는 좀 기를 펼 만도 하건만, 귀빈 앞에 무릎을 꿇은 곽 공공은 여전히 고양이 앞의 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거네요?”
“네, 특별한 문제점이나 뒷배경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급습을 한 때에는 강한월의 문무대 대원들은 모두 모습을 감춘 뒤라서….”
어쩔 수 없었다.
곽 공공이 소림사에서 돌아온 후 뒤처리를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동창의 정보를 뒤져서 강한월이 문무대의 대장임을 알아내는 데에도 시간이 소요되었으니까.
“확실한 것을 알아야 하는데 아쉽네요. 강한월과 문무대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림맹과는 어떤 관계인지….”
“무림맹 수뇌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만, 제 판단으로는 무림맹은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문무대는 정말로 문화재 발굴을 하는 것이라 알고 있더군요. 실제 왕희지의 작품 등 발굴 성과도 있고요.”
귀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화재 발굴로 위장을 했다니 더욱 의심스럽지 않은가?
그런 걸 찾아내는 건 미래에서 온 회귀자에겐 누워서 떡 먹기. 혹시… 강한월의 배후에 혈교의 배신자가…?
“강한월이 신주의협의 제자라고 했죠? 신주의협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해요. 현 무림맹주가 관련이 없다면 분명 신주의협이 배후일 테니.”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즉시 실행토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흑사련의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귀빈 입장에선 이것도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소림의 일을 보고받은 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흑사련에 동료가 있다고. 그것도 꽤나 강한 동료가.
“정옥수라는 아이와 교신하고 있습니다. 귀빈 마마께서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시면 오방혈수를 만든 자와 함께 오겠다고 합니다.”
“좋아요. 미룰 필요 없죠. 당장 자리를 마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