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05화 (194/210)

105화. 운남 (1)

* * *

신주의협이 운남성 대리국에 도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천산 백응신장과의 만남 후 걷잡을 수 없는 의혹에 바람처럼 달려왔지만, 운남에 도착한 후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단서라고는 의문의 조직이 천룡사의 무공을 썼다는 것뿐이었고, 대리국의 호국사찰인 천룡사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무엇보다 자신이 신주의협임을 노출시켜서도 안 되었다.

그렇기에 운남의 경계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외모를 바꾸는 일이었다.

제대로 변신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근육을 미세하게 조정해 얼굴을 바꾸고 피부를 팽팽하게 펴는 것은 초월경의 고수에겐 너무도 쉬운 일.

염색을 하고 수염을 다듬으니 삼십 대 후반 중년인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 모습으로 한 달 동안 천룡사 주변을 탐색했다.

며칠에 한 번씩 불공을 드리는 척 천룡사 경내에 들어갔고, 객잔 이곳저곳을 돌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은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계속 발품을 팔다 보니 관심이 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보게 천석이. 자네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며?”

“당연한 것 아닌가? 지난번엔 배탈이 나는 바람에 아쉽게 탈락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할 테니….”

“하하하, 지난번엔 배탈이었지만 그 전엔 관절염 때문이라며. 이번엔 또 무슨 핑계를 대려고?”

“자네 날 못 믿는 건가? 내 천상천하육십구검을 제대로 펼치기만 하면 그깟 시험이야…!”

요 며칠 이런 류의 대화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누군가 정기적으로 무인을 모집하고 있던 것이다.

주워들은 정보를 종합해보면 완전한 비밀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집은 은밀하고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럼에도 많은 지원자들이 몰렸는데 각종 처우와 보수가 꽤 높았기 때문이다.

백여 명이 지원하면 고작 서너 명이 합격한다고 하니 상당한 실력자를 뽑는 듯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신주의협이 추적 중인 비밀 조직과 관련 있다는 정황은 아직 없었다.

그럼에도 이 무사 모집을 제대로 조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 다른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오랜 시간 강호를 종횡하며 얻은 감각이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벌써 세 번째 응시한다는 천석이라는 사내에게 술 몇 잔을 사주고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경쟁자가 추가될까 싶어 처음에는 꺼리던 사내도 신주의협의 몸에서 별다른 내공이 느껴지지 않자 안심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모집 시험이 열리는 것은 앞으로 열흘 후 천룡사 인근의 한 장원.

삼 단계 시험을 통해 실력을 판별한 후 최종 면접을 통해 합격자를 가린다고 했다.

어떻게 면접을 보는지는 모르나 면접에서 탈락하는 자도 부지기수.

채용이 되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는 비밀이었다.

그저 천룡사와 대리 왕족이 관련되어 있을 거란 소문만 무성할 뿐.

시험 당일.

신주의협은 천석 무리에 끼어서 함께 시험장으로 갔다.

구경꾼들은 입장이 금지되었음에도 장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얼핏 보기에도 이백 명은 넘는 응시자들.

대부분 이류 수준의 그저 그런 무인들이었지만 날카로운 기도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고수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신월 형님. 촌티 나게 뭘 그리 두리번거려요? 그러면 사람들이 얕잡아본다고요.”

신월은 신주의협이 사용하는 가명.

천석의 눈에는 주변을 살피는 신주의협의 모습이 많이 긴장한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모인 건 처음 보는지라… 경쟁이 만만치 않을 것 같군.”

“하하하, 설마 첫 도전에 바로 성공하길 바라는 겁니까? 아서요. 이번엔 그저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라고요.”

일 단계 심사는 간단했다.

심사관 앞에서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을 몇 수 펼치면 심사관이 통과와 탈락을 결정하는 방법이었다.

신주의협의 관심을 끈 것은 다섯 명의 심사관.

내력을 드러내지 않고 잘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신주의협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다섯 중 둘은 천룡사의 내공을 익히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각기 다른 내공이었지만 모두 정파의 정명한 것이었다.

심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각각의 심사관 앞으로 줄을 선 무인들이 최선을 다해 실력을 발휘했다.

중간중간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꽤 괜찮은 실력을 보이고도 탈락하는 참가자가 있는 반면 별 볼 일 없는 실력으로 통과하는 자도 나왔기 때문이다.

탈락한 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했고, 심사관이 편파적이다 혹시 뒷돈을 받은 건 아니냐 언성을 높였지만, 판단 기준이 뭐였는지 신주의협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무공의 근원이 혼탁하거나 마공이나 사공에 뿌리를 둔 것 같으면 가차 없이 탈락시켰던 것.

내가 잘못 짚은 건가?

신주의협은 혼란스러웠다.

신입 무사를 뽑을 때부터 이처럼 정(正)을 따지는 조직이라면 악한 무리일 리가 없을 텐데…?

그러는 사이 함께 온 천석의 심사가 진행됐다.

천상천하육십구검이라고 주장하는 검법을 펼쳤는데, 누가 이름을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종남파의 입문 검법인 천하삼십육검 중 쉬운 초식 몇 가지를 가져다 이래저래 변형하고 살을 붙여 만든 검법.

천석은 빰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실력은 별 볼 일 없는 이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신주의협은 천석의 통과를 예상했다.

어쨌거나 정파의 명문인 종남파 무공에 뿌리를 둔 무공이었으니….

“하하하, 신월 형님. 저 통과했습니다. 형님도 최선을 다해보세요.”

입이 귓가에 걸린 천석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고 신주의협이 앞으로 나섰다.

어떤 무공을 어느 정도로 선보일지는 미리 정해 놓은 상태.

과도한 관심을 끌 필요는 없었지만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쉬익. 샤악. 스르릉.

바람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신주의협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초식들.

내공을 담지 않아 진정한 위력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정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누가 봐도 정파의 전통 검법.

“참가자 신월. 통과!”

예상을 뛰어넘는 깔끔한 솜씨로 합격하자 천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변 무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남은 참가자들의 심사를 구경하니 시간은 쑥쑥 흘렀고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일 단계 시험에서 절반이 탈락하고 남은 인원은 백여 명.

곧바로 이 단계 시험이 진행되었다.

담당 시험관과 양손을 마주 대고 잠시 힘겨루기를 하면 되는 것인데, 내공을 판단하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는 배탈이 나는 바람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천석이 품속에서 작은 환약을 꺼내어 입에 넣었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력을 증진시키는 약을 구해온 것이다.

천석은 매우 귀한 약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풍기는 냄새만으로도 신주의협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약이라는 걸.

“천석 아우, 힘내시게.”

격려하는 척하며 어깨를 몇 번 두들겨줬다.

천석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 순간 신주의협의 내공 한 줄기가 은밀히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한 시진 정도 후에는 사라질 내공이지만 이 단계 시험을 통과하기엔 충분했다.

갑자기 불끈 힘이 솟는 걸 느끼며 천석은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

뛸 듯이 기뻐하는 천석을 보며 신주의협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뿐. 삼 단계 시험까지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별것 아닌 인연이지만 어쨌건 연을 튼 천석이 의심스러운 괴집단에 들어가도록 놔둘 수는 없으니까.

“다음 참가자 나오시오.”

신주의협이 심사관 앞에 섰다.

그 순간 뒤쪽에서 탐스러운 수염을 기른 노인이 다가왔다.

“이름이 신월이라 했나? 자네 시험은 내가 보도록 하겠네.”

노인이 나서자 심사관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양보했다.

보아하니 심사관들을 총괄하는 자 같았는데, 직접 나선 것을 보니 신주의협에게 관심이 가는 모양.

일 단계 시험 때 신주의협이 펼쳤던 검법을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아까 펼쳤던 검법. 전진파의 북두신월검 같던데?”

두 손을 마주 대며 노인이 물었다.

“안목이 높으시네요. 오래전 실전된 무공이라 아는 분이 거의 없는데….”

“자네 말이 맞네. 그러니 더욱 궁금해지는군. 자네가 어디서 전진파의 무공을 배웠는지.”

신주의협의 내력을 확인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노인이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맞서 신주의협도 양손에 공력을 보냈는데, 실전된 전진파의 내공심법과 유사한 느낌을 풍기는 공력이었다.

다른 문파의 공력인 것처럼 흉내 내고 너무 튀지 않게 수준을 조절하면서, 더불어 노인의 공력을 몰래 파악하는 것.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주의협이니까 가능한 일.

잠시 후 마주했던 손바닥을 떼며 노인이 말했다.

“흠… 이 정도면 되었네.”

“저는… 통과입니까?”

“하하하, 시험관 대신 내가 나선 순간 자네는 이미 통과였네.”

* * *

이 단계 통과자들에게 제공된 숙소.

같은 방에 배정된 천석이 곯아떨어지자 신주의협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경비가 삼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횃불을 들고 곳곳을 지키는 무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신주의협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둑한 밤 그림자에 동화된 신주의협은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목적지는 심사관들이 머무는 전각.

불과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전각의 대들보 위에 편안히 몸을 눕혔다.

“자네들이 보기엔 어떤가? 쓸만한 지원자들이 눈에 띄던가?”

“내일 삼 단계 시험까지 쳐봐야 알겠지만 예닐곱 명은 괜찮아 보였습니다.”

전각의 대청에선 신주의협을 심사했던 노인이 심사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백이 넘는 지원자 중에 고작 예닐곱이라… 안타깝군. 이번엔 특별히 많은 인원을 선발해야 하는데….”

“선발된 인원이 열 명을 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많이 선발하려고 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궁에서 명이 내려왔네. 인원 확충에 박차를 가하라는.”

“혹시… 대업의 때가 된 것입니까?”

질문하는 심사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호기심, 기대, 격동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면 좋겠지만 나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하네. 조만간 알게 되겠지.”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삼 단계 기준을 좀 낮출까요?”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기준에 못 미치는 자들을 뽑아 봤자 이후 교육 과정을 통과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다른 지역에서 추가 모집을 하는 게 나을 거야.”

“천룡사에서도 추가로 선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귀를 기울이던 신주의협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심사관의 입에서 처음으로 천룡사가 언급된 것이다.

시험에 응시하는 수고를 감내하며 뛰어든 것이 영 헛수고는 아닌 것 같았다.

“천룡사에서도 이십 명 정도가 차출될 거야. 대리 왕부에서도 차출이 있을 거고.”

이후로도 한참 동안 대화가 오갔다.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지만 이 조직이 천룡사와 대리 왕부까지 아우르는 거대하고 막강한 세력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그나저나 어르신, 아까 직접 이 단계 시험을 보셨던 것은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 신월이라는 무사 말이구나.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실전된 전진파의 검법을 익히고 있으니까.”

“전진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문파는 꽤 여럿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신월 그자처럼 전진 검법의 요체를 잘 꿰고 있는 자는 드물 거야.”

“저희야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지만, 어르신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어르신께선 만검산장의 수석 중 한 분이시니까요.”

만검산장!

드디어 쓸 만한 정보를 건졌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느낀 신주의협이 스르륵 전각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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