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운남 (2)
* * *
만검산장(萬劍山莊)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일반적인 문파와는 다르다.
세속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검의 이치를 연구하는 곳.
붓이 아닌 검을 든 것만 다를 뿐, 책을 탐독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의 삶과 유사했다.
그리고 만검산장을 세운 자는 당연히 검에 미친 자였다.
검종(劍宗) 황우치.
천하의 각종 검법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천하 십대 고수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검에 대한 지식과 깊이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그런 황우치와 신주의협이 인연이 없을 리 없었다.
신주의협은 바빴고 황우치는 만검산장을 벗어나질 않으니 평생에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깊이 존경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검산장의 수석 검사가 황우치의 허락 없이 다른 조직에 가입했을 리 없다.
그러니 이 조직은 황우치와도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다.
황우치, 그리고 천룡사와 관련된 조직이라면 신주의협 본인과도 말이 통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작전을 수정했다.
이제부터는 좀 튀어 보기로 했다.
이 조직의 수뇌부와 빨리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신주의협은 삼 단계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에 들어섰다.
오십 명 좀 안 되는 참가자들이 줄을 맞춰 앉았다.
반 장 간격으로 촘촘히 앉힌 것으로 보아 몸을 쓰는 시험은 아닌 듯했다.
“이 단계를 통과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오. 이제 마지막 시험만 남았으니 최선을 다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길 바라겠소.”
심사관 한 명이 앞에 나서 시작을 알렸고, 나머지 심사관들이 돌아다니며 종이봉투 하나씩을 배포했다.
“그 봉투 안에는 여러분이 습득해야 할 심공(心功)이 적혀 있소. 백 글자도 안 되는 매우 짧고 간단한 것이지. 이번 시험은 그걸 이해하고 익히는 것이오. 시간은 여섯 시진.”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다.
백 근 등짐을 메고 하루 종일 달리라고 해도 불만 없을 무인들이지만 글을 해독하고 익히는 것에는 영 자신이 없는 것이다.
“심사관님! 저는 아는 글자가 몇 개 없습니다. 말로 설명을 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누군가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참가자 중 삼 분의 일 정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그들도 까막눈인 것은 매한가지인 듯했다.
“그럴 수는 없소. 안타깝지만 여러분 스스로가 읽고 이해해야 하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린 무사 모집에 지원을 한 것이지 과거 시험을 치르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만! 불평은 그만하고 심공을 익히시오. 시험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도대체 어떤 심공일까?
신주의협은 호기심을 느끼며 봉투를 열었다.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는 여든두 자의 심공.
순식간에 뇌리에 박혀 들더니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분류되고 재조합되었다.
반의반 각도 안 되어서, 신주의협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신월 형님. 설마 벌써 글을 다 읽으신 겁니까?”
옆자리에 있던 천석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글을 다 읽었냐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미 완벽하게 이해했을뿐더러 심공을 완성하기까지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관에게 가려던 신주의협이 잠시 망설였다.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천석을 조금 도와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천룡사와 만검산장과 연관된 곳이라면 악한 조직은 아닐 것 같으니 혹시 운 좋게 합격하더라도 나쁜 일은 아니겠고….
—천석. 그 글을 해석하려 애쓸 필요 없네.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안 될 거야. 어차피 앞뒤가 안 맞고 내용이 없는 글이니까
“혀, 형님…?”
자신과 비슷한 이류 무인이라 생각했던 신주의협이 전음을 보내자 천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정하게.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어쨌든 이 글자들은 뜻을 생각할 필요 없고 각각의 발음이 가지는 파장에 의미가 있는 거야. 성대 주변에서 발생하는 파장과 파동이 내력을 움직이고 혈류에 영향을 줘서, 궁극적으로는 상단전으로 통하는….
당연히 천석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숨을 내쉰 신주의협이 몸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전음을 보냈다.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작은 소리로 읽고 또 읽어보게.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자네가 성공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말을 마친 신주의협이 시험관을 향해 걸어갔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안 일이지만 아쉽게도 천석은 삼 단계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것이 다행인지 아닌지는 당장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사관님.”
“오, 신월 참가자로군. 그래, 무슨 일이오?”
“과제를 완성했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아직 일 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심사관은 믿지 못했다.
아무리 수석 판별관 어른이 관심을 가진 참가자이지만 이렇게 빨리 심공을 익힐 리는 없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요? 아니, 과제 자체를 이해 못 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심공을 펼쳐 보일 테니 확인을 해보시죠.”
“잠깐. 여기서는 안 되오. 아직 시험 중인 참가자들에게 보여줘선 안 되니. 따라오시오.”
심사관은 신주의협을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그곳엔 어제 그 노인이 있었다.
신주의협을 본 노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역시 내가 인재를 알아봤구나 하는 자부심과 그래도 설마 이렇게 빨리 하는 의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자네로군. 설마 벌써 심공을 익힌 건가?”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렇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어디 한 번 펼쳐보게.”
이미 확실히 튀어 보기로 결심한 터, 신주의협은 망설임 없이 심공을 시전했다.
물론 진짜 실력이 드러나진 않도록 공력을 확 줄이고서 말이다.
“이럴 수가…!”
노인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주의협의 머리 부분에서 가는 파장이 퍼져 나오며 주변 공기가 덩달아 춤을 추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수년간 무사 선발을 진행해왔지만 이런 천재는 처음이었다.
아니, 만검산장이나 천룡사의 인재 중에서도 이렇게 빨리 심공을 터득했던 사람은 없었다.
잠깐 말을 잇지 못하던 노인은 곧 단호한 목소리로 심사관들에게 말했다.
“남은 시험 일정은 자네들이 맡아서 진행해주게. 난 즉시 천궁(天宮)으로 가봐야겠네.”
“지금 즉시 떠나신다고요?”
“궁주께서 인재를 중시하시는 걸 알지 않나? 상(上)급 인재가 나타나면 궁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이 있으셨네. 신월은 특상(特上)급 인재가 분명하니 내가 직접 데려가야겠네.”
* * *
신주의협과 노인을 태운 마차가 힘차게 달렸다.
마차에 가득 실은 먹거리와 두툼한 겉옷으로 볼 때 제법 긴 여정이라는 것과 목적지의 날씨가 춥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가 달리는 방향, 그리고 천궁 즉 하늘 위의 궁전이라는 이름….
옥룡설산(玉龍雪山)이구나!
천궁의 위치가 어디인지 느낌이 왔다.
그렇다고 한들 그 장대한 산맥과 수많은 봉우리 중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마차 안에서 노인과 신주의협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은 신월이라는 인물의 배경을 캐려는 노인의 질문이었다.
절차를 건너뛰고 곧바로 본궁으로 데려가는 만큼, 의심스러운 사람은 아닌지 가려내려는 것이었다.
신주의협은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신월이라는 인물의 설정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무림맹주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비밀 수신 호위무사의 정보를 차용했다. 그 호위는 불미스러운 사고로 사망했는데 비밀 호위였던 만큼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천궁에서 뒷조사를 하더라도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신월 자네는 송운 거사라는 은거 기인의 제자라는 말이군?”
“맞습니다. 고아였던 저를 거두시고 십 년간 무공을 가르치셨습니다.”
“강호에 나온 후에는 어떻게 살았는가? 최근의 행적이 궁금하네만.”
“쑥스럽게도 제대로 된 활동을 한 적은 없습니다. 동왕 상단의 호위무사로 일하며 상행을 다녔고, 최근 몇 년은 산속에서 무공을 단련했습니다.”
노인은 신주의협의 목소리와 표정까지 살피며 모든 정보를 꼼꼼히 기록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수백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자, 드디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지금까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네는 우리 조직에 딱 어울리는 인재가 분명하군.”
“높이 평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그렇게 망설일 필요 없네. 자네도 궁금한 것이 많다는 걸 테지?”
“맞습니다. 앞으로 일하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는 저도 알아야 하니까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정식으로 입궁하기 전까지는 알려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네.”
“모든 걸 알겠다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 몇 가지는 꼭 알아야겠습니다.”
“중요한 것이라… 어떤 게 중요한 거지?”
“예를 들면 저를 뽑아주신 어르신의 성함 같은 것이죠.”
자신의 생각에도 조금 미안했는지 노인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에 대한 것도 아직은 비밀이지만… 먼 길을 함께 갈 텐데 이름도 알려주지 않으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나는 조탁이라고 하네. 천궁의 신입 무인 채용을 책임지는 사람이지.”
“조 어르신이셨군요.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천궁은 비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급여를 많이 주셔도 악한 일을 하는 조직엔 가담할 수 없습니다.”
신주의협의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기에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네 무슨 정의의 협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번엔 신주의협이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정의의 협객. 자신의 별호가 바로 그것이며 일평생 들어왔던 말이기 때문이다.
“협객은 아닙니다만, 제가 익힌 무공을 나쁜 일에 사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보기엔 어떤데? 우리 조직이 악한 조직으로 보이나?”
“그랬다면 어르신을 따라 이 마차에 올라타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 짐작으로는 분명 정과 협을 위해 일하는 조직일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느꼈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단계 시험에서 어르신과 손을 마주 댔을 때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매우 맑고 정명한 내공을 익히고 계신 것을요.”
“정파의 내공을 익히고 있다고 행동까지 바르다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네 추측이 맞네. 우린 천궁은 절대 악한 조직이 아니야.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하는 중요한 곳이라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비밀이 많은 것입니까?”
“그건 궁주님의 뜻이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아직은 때가 아니니 우리는 조용히 숨어서 힘을 기르며 기다리는 거지.”
“혹시 궁주님이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불가. 그건 절대 말해줄 수 없네. 다만 천하에서 가장 의롭고 강한 분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네.”
천하에서 가장 의롭고 강한 자.
조탁 노인은 가득한 자부심을 가지고 말했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니 기대가 되는군요. 저도 그런 의로운 분을 위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좋아. 자네 눈빛이 맑아 믿음이 가는군. 이것은 자네 인생에 엄청난 기회일세. 비록 지금은 우리가 음지에서 조용히 준비 중이지만, 결국엔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는 큰일을 하게 될 거야.”
“그 큰일을 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겁니까?”
“왜? 일이 없어 심심할까 봐? 자네 역할은 새로운 무공을 배우면서 힘을 키우는 것이니 일 걱정은 할 필요 없네. 당장 중요한 일은 천궁의 다른 선배들이 맡아서 하고 있으니.”
“당장 중요한 일이요?”
“하하하. 알려줘도 이해 못 할 거야. 세상을 누비며 돌을 찾는 일이니.”
마차는 눈 덮인 설산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노인이 마지막 말을 곱씹는 신주의협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