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삼 인 회동
* * *
황궁에서 멀지 않은 북경 모처의 은밀한 저택.
한껏 아름답게 치장한 정옥수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서 꿀릴 게 없는 배경을 가진 그녀이지만 지금 만나게 될 사람들도 모두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가진 자들.
복장이나 장신구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명의 남자가 그녀를 반겼다.
관복을 입은 노인과 이십 대의 젊은이.
모두 이미 안면을 텄던 사람들이었다.
“제가 좀 늦었네요. 곽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남궁 공자도 그간 잘 지내셨고요?”
소림에서 함께 결전을 치렀던 곽 공공은 호의로운 미소로 맞아주었지만, 남궁혁은 표정이 영 밝지 못했다.
신룡대회에서의 기억이 그리 좋지 않은 까닭이다.
“하하하, 네가 와서 다행이구나. 남궁세가의 공자랑은 말이 안 통해서 심심하던 차인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곽 공공의 말에 남궁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는 것이, 병필태감의 위치는 남궁세가의 가주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니까.
‘흥, 잘난 척하기는. 나와 마찬가지로 수행원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남궁혁의 속마음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곽 공공과 정옥수는 죽이 잘 맞아서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르며 웃고 떠들었다.
“술과 안주가 잔뜩 있는 것을 보니 오늘의 회동은 꽤 길어질 건가 보네요?”
“후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르신들이 만나셨으니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으시겠지.”
정옥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술이 목에 걸릴 뻔했다.
어르신들?
지금 건너편 정자에서는 황궁의 귀빈,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그리고 자신의 부친이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귀빈이야 존대를 받아 마땅하지만, 동창의 수장인 병필태감이 남궁세가나 흑사련의 인물을 어르신이라 부를 이유가 없었다.
왜일까?
도대체 곽 공공은 자신이 모르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한편 곽 공공은 충격을 받은 듯한 정옥수와 남궁혁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한 방에 모여 있으니 셋 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겠지?
‘후후, 절대 그렇지 않아. 난 정자에 있는 세 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단 말이다.
반면 너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이고.’
무림세가나 사파의 고수 따위 발가락의 때만큼도 인정하지 않는 그였지만, 그들이 귀빈과 같은 존재라면 얼마든지 우러러 모셔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정옥수와 남궁혁은 다르다.
나이로 짐작해봤을 때 실제 핏줄일 가능성도 없으니까.
“자, 다 같이 한잔하세나. 왠지 우린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으니. 하하하.”
* * *
화기애애하게 술잔이 돌아가는 건너편 방과는 달리 정자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무공이 약한 자였다면 한 시도 견디지 못했을 사나운 기세가 사방을 짓눌렀다.
의심과 불신.
서로의 심중을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 비수처럼 날아다녔다.
“흠흠, 이거 매우 불편하군. 귀빈 당신이 우리를 오라고 했으니 그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맞지 않나?”
“흑사련의 정진악. 내가 부른 것은 당신뿐인데 어째서 남궁세가의 노인과 함께 온 것이죠? 게다가 그 무례한 말투는 뭔가요? 내가 황실의 귀빈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황실의 귀빈?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음양혈인과 혈질을 만들어내는 자가 귀빈이라고? 뻔히 아는 사이에 말 돌리지 말고 터놓고 이야기하지.”
“호호호, 좋아. 흑사련에서 오방혈수를 보낸 걸 보고 나도 당신의 정체는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노인은 뭐지?”
귀빈이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들어 남궁윤을 가리켰다.
“내가 널 느낄 수 있듯, 너도 내가 누군지 알 텐데?”
“알지. 어찌 모를 수 있겠어? 역한 고양이 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뭣이 어째?”
남궁윤이 분노하자 들고 있던 술잔이 퍽 터지며 가루가 휘날렸다.
귀빈도 참을 생각은 없는 듯 거친 기도를 뿜어냈다.
탁자가 들썩거리며 술병과 접시들에 쩍쩍 금이 갔다.
“휴우, 진정들 하시게. 뱀과 호랑이가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날까지 으르렁댈 필요야 있겠나?”
정진악이 팔을 한번 휘젓자 요동치던 물건들이 잠잠해졌다.
싸울 상황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귀빈과 남궁윤도 기세를 거뒀다.
“용의 말이 맞아.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솔직히 조금은 반갑기도 하고.”
성격 독하기로는 열두 명의 혈승 중 최고인 뱀이 한발 물러서자, 호랑이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여인의 모습으로 살더니 성격도 변한 건가?”
“흥, 쓸데없는 소리.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긴 해. 꽤나 예쁘지 않나? 호호호.”
귀빈이 시녀들을 불러 다시 술상을 차리게 했다.
이후로 밤새도록 술자리가 이어졌다.
각자 할 말이 많았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거쳐왔던 역경과 노력.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았고 울컥한 사연도 있었다.
그렇게 몇 시진을 함께 웃고 떠들자, 자신들이 회귀한 혈승이라는 자각이 새삼 솟아났다.
또한 지금껏 풀리지 않던 의문 몇 가지도 자연스레 풀렸는데, 바로 강한월과 문무대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야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군. 낙양 인근에서 내 수하들을 몰살시킨 것도 그놈들이 분명해.”
“우리가 신경 써서 준비한 신룡대회를 망친 것도 그렇고. 종적을 찾을 수 없는 놈이라 골치 아팠는데, 뱀 자네가 처리를 했다니 다행이군.”
다들 강한월에게 당한 사연이 한두 개씩 있었다.
각자 파악하고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었는데, 이렇게 모여서 조각을 맞춰보니 이제야 어렴풋이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내가 처리한 것이 아니야. 용의 딸아이의 공이 컸지. 제법 당찬 아이인 것 같더군.”
“후후, 옥수 그 애는 흑사련에 딱 어울리는 아이지. 그나저나… 서른도 안 된 강한월이 이 모든 것을 주도했을 리는 없을 텐데?”
“도대체 배후가 누굴까? 혈승 동료 중 배신자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역시 신주의협이겠지?”
“난 신주의협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 시대로 회귀하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우리 모두 알고 있던 거잖아?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신주의협이라는 것을.”
뱀의 말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용과 호랑이가 무거운 표정으로 뱀을 바라봤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지?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가?”
“뱀. 너는 정말로 가장 위험한 적은 신주의협이라고 보는가?”
“너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뱀의 안색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머리 좋기로는 혈교에서 손꼽히는 뱀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용과 호랑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나와 호랑이는 몇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회귀라는 역천의 방법을 쓰면서까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인지에 대해.”
“신주의협은 분명 강하지만 나와 용 둘이 힘을 합하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뱀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원초적인 두려움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래 어쩌면 이들과 함께라면…?
“너희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뱀, 진정해라. 우리도 자 혈승에게 반기를 들 생각은 아니니까. 다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지. 만약 그가 우리 몰래 엉뚱한 일을 꾸민다면….”
뱀은 용과 호랑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자 혈승이 자신들을 위협할 것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렇다. 지금 차지하고 있는 위치 때문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흑사련의 후계자가 되면서 더 이상 다른 사람 밑에서 주눅 들어 살아가기가 싫은 것이다.
그건 뱀도 마찬가지.
아니, 용과 호랑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뱀이 차지한 것은 황궁이니까.
“너희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자 혈승의 상대가 될까? 아무리 호랑이가 무(武)의 수장이며 용이 제사장이라고 한들 어림없어.”
“뱀 너의 말이 맞다. 우리 셋이 힘을 합해도 그의 상대가 될 순 없지. 우리가 가진 힘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이고 그는 격이 다른 존재이니까. 하지만 그건 개인 대 개인의 대결일 경우. 만약 조직 대 조직으로 싸운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조직 대 조직이라….
뱀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개인으로서 자 혈승에 맞설 용기는 없지만 각자 차지하고 있는 조직을 동원한다면 해볼 만했다.
황실과 정파무림 그리고 흑사련이 연합한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자 혈승과 싸울 생각은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각자의 조직 내에서 위치를 확고히 해야겠지?”
“하하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맞아. 뱀 너는 황실을 완전히 장악해야 하고, 호랑이는 무림맹을 손에 넣어야 하지. 물론 나는 흑사련 련주에 등극해야 하고 말이야.”
“어차피 계획했던 일. 시점만 조금 당기면 되겠군.”
세상 사람들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렇게 경천동지할 역천의 계획이 수립되어 갔다.
어느 하나만 실현되어도 세상이 떠들썩할 사건이 황실과 정파 무림, 그리고 사파 무림에서 동시에 추진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각자 가지고 있던 계획을 털어놓고 의견을 구했다.
특히 까다로운 것은 무림맹이었다.
황실이나 흑사련과는 달리 후계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서, 현 무림맹주를 끌어내린다 하더라도 남궁윤이 신임 맹주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명색이 정파 무림의 맹주를 선발하는 것이니 무력으로 윽박지를 수도 없을 테고… 호랑이 자네가 맹주가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현 맹주가 구파일방 출신이니 다음 맹주는 오대세가에서 뽑자는 것이 말이 되기는 하지. 하지만 결국엔 투표로 정하는 것. 오대세가의 다섯 표는 확실한데 구파일방에서 최소한 세 표는 더 확보해야 한다.”
“말이 통하는 곳은?”
“해남파는 구워삶을 수 있을 것 같아. 종남파는 태상장로와는 친분이 깊은데 장문인이 까탈스러워서….”
“그건 걱정 말게. 종남파 장문인은 곧 급사를 하게 될 테니.”
용이 비릿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런 게 터놓고 상의하는 것의 좋은 점이었다.
힘 있는 동료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래도 한 표가 모자라는군. 그건 황실에서 해결토록 하지.”
“방법이 있는가?”
“호호, 개방의 총타가 북경에 있잖아? 방주 뒷조사를 좀 해보면 답이 나올 거야. 이런 일은 동창이 전문가이니 맡겨두라고.”
“고맙네. 먼 길을 찾아온 보람이 있군. 자, 이제 일 이야기는 접어두고 술이나 마시자고.”
“잠깐. 그 전에 마저 협의해야 할 일이 있어.”
“뭐지?”
“나머지 동료들을 찾는 일.”
용과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무림맹주나 흑사련주에 등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었다.
특히나 그들이 이미 자 혈승에 붙지는 않았는지, 혹은 신주의협과 관련된 배신자가 아닌지는 꼭 알아내야 했다.
“정보력을 총동원해야겠군. 책임자도 정해야 할 것이고. 동창의 곽 공공이 어떨까? 정보 조직을 부리는 데는 최고 전문가니까.”
“아니, 곽 공공은 황실에 일이 많아. 내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신분이라 그가 내 대신 일 처리를 해야 하지. 그보다 더 적합한 자가 있다.”
“누구지?”
“원숭이.”
“뭐?”
용과 호랑이가 제법 놀랐다.
특히 호랑이는 술잔을 턱 내려놓는 것이 꽤나 마음에 안 드는 모양새였다.
“원숭이가 너와 함께 있었나? 난 그 녀석 믿을 수가 없는데.”
“호호, 무술 계열이 원숭이를 싫어하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동료 혈승을 찾는 것은 원숭이가 동창보다 나을 거야. 허튼짓 못 하도록 내가 잘 관리할 테니 나를 믿으라고.”
뱀이 자신 있게 이야기하자 호랑이도 더 이상 토를 달 순 없었다.
이렇게 하여 뱀과 용, 호랑이 그리고 원숭이의 사 인 혈승 연합이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