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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08화 (197/210)

108화. 번천 (1)

* * *

북경 자금성.

황제의 침소인 건청궁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호위를 책임지는 금의위 부영반 공화전은 궁의 입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공화전은 입이 타들어 가고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었고, 이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 식경쯤 되었을까?

아름답게 차려 입은 누군가가 어둠을 헤치며 다가왔다.

“신 공화전, 귀빈 마마를 뵙습니다.”

“부영반. 늦은 시간까지 수고가 많아요. 일은… 차질 없겠죠?”

“금의위 소속의 호위무사들은 오늘 밤 건청궁 주변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뭐죠?”

“황제 폐하 직속의 비밀 호위들은 말이 통하질 않습니다. 오로지 청검(淸劍) 노인의 지시만 따르는 터라….”

“상관없어요. 예상했던 것이니까.”

“귀빈 마마.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청검 노인은 만만치 않습니다. 황제 폐하께 몸을 의탁하기 전에는 강호 십대 고수에 들었습니다. 황궁에 든 후에도 폐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각종 영약과 황궁 무고의 절기를….”

“부영반. 원래 그렇게 말이 많나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공화전은 납작 허리를 굽혔다.

피식 웃은 귀빈은 긴장이 극에 달해 파르르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줬다.

“표정 풀고 좀 웃어요.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니.”

* * *

황제의 침실로 향하는 회랑은 적막했다.

원래는 복도 곳곳에 대기해야 할 환관과 궁녀가 보이질 않았다.

귀빈은 그곳을 거침없이 걸었다.

침실 문 앞에 도착해서도 멈추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폐하, 소녀가 왔어요. 설마 벌써 주무시는 건 아니겠죠?”

황제는 커다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만인지상의 위엄이나 천하를 굽어보는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늙고 병든 몸에서 풍겨 나오는 허무와 죽음의 냄새뿐.

“귀빈. 그대가 왔구려. 많이 보고 싶었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여러 가지 일로 바빴거든요.”

“그대는 늘 바빴지. 그래도 오늘은 시간을 내어 와주었군. 설마… 혹시 때가 된 것이오?”

독심을 품고 사는 귀빈도 이 질문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도 분명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아마 수년간 몰래 비술을 펼쳐 황제의 건강을 해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을지도….

“그래요. 때가 되었답니다.”

“좀 뜻밖이군. 아직 몇 년은 남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정이 생겼어요. 서두를 필요가 생겼죠. 그리고 폐하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이런 상태로 몇 년을 더 사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데도 황제는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확실히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대범함이 있었다.

“준비는 잘 갖춘 거요? 장군들이나 번왕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장군들은 칠할 이상이 저를 따른답니다. 큰 소란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는 병이 악화되어 임종하시는 거니까요. 게다가 제가 차기 황제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삼황자가 뒤를 이을 거예요.”

“준비를 잘한 것 같군.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대의 뜻에 따를 생각이 없소.”

반쯤 기대어 누워있던 황제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의지의 표현이었다. 네 뜻대로 되게 두지는 않을 거라는.

“황제 당신의 뜻 따위는 관심 없어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좋게 좋게 끝내죠.”

“아니, 난 황태자 그 아이에게 자리를 물려줘야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곱게 죽어주지.”

“늙은이가 끝까지 고집을…!”

귀빈의 목소리가 표독하게 변했다.

그러자 황제의 침상 뒤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귀빈. 말을 삼가시오!”

검같이 날카로운 기도의 노인. 황제의 수신 호위인 청검이었다.

“흥, 말을 삼가지 않으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난 예전부터 당신을 죽이고 싶었소. 폐하께서 허락을 안 하셔서 실행하지 못했을 뿐.”

“호호호, 오늘은 어때요? 허락하실 것 같나요?”

귀빈과 청검의 시선이 동시에 황제에게 향했다.

청검은 충심이 깊었고 진심으로 황제의 허가를 바랐다.

황제, 아니 황실 전체가 수년간 농락당해 온 과정을 모조리 지켜봤기 때문이다.

“귀빈. 언제인가부터 난 헷갈리기 시작했소. 당신을 향한 깊은 사랑이 내 진심인 건지, 아니면 모종의 비술의 걸려 정신을 조정당하고 있는 것인지.”

“호호, 재밌는 생각이네요. 그래서 답은 찾으셨나요?”

“아직은. 하지만 방금 그걸 확인할 방법이 떠올랐소. 만약 내 정신이 지배되고 있다면 감히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겠지. 하지만 내 입에서 당신을 죽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면, 최소한 내 정신은 온전하며 당신을 향한 사랑도 진심이었다는 증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청검은 예리한 기세를 끌어올리며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고, 귀빈은 궁금해 죽겠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결국, 황제가 입을 열었다.

“청검. 귀빈을… 죽여라.”

쉭, 쉭, 쉭, 쉭.

천장과 벽 안에서 네 개의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귀빈을 포위했다.

청검이 직접 뽑고 가르친 제자들. 오로지 황제의 안전을 위해 길러진 은영수신위(隱映守身衛)였다.

“은영들은 저 마녀를 척살하라!”

짧은 명을 내린 청검은 강철 같은 호신강기를 겹겹이 두른 채 황제의 앞을 보호했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거라 믿었다.

은영수신위는 각각이 뛰어난 고수인 데다 합격술에 능해 구파일방의 장로급 고수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쇄애애액. 퍽퍽퍽.

완벽한 방위를 이루고 쇄도했던 은영수신위 중 셋이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고, 마지막 한 명은 귀빈의 손에 목이 잡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다인가요? 더 있으면 빨리빨리 불러요. 시간 끌지 말고.”

귀빈은 청검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뚝.

목이 꺾인 마지막 은영수신위를 휙 던져버리는 귀빈.

이럴 수가!

청검은 말문이 막혔다.

색공이나 섭혼술 같은 비술에나 능한 줄 알았던 귀빈이 이 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일 수에 은영수신위 넷을 처리하는 건 청검 본인도 가능했다.

하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비명 소리 한번 없이 이처럼 깔끔하게 손을 쓸 순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클 것 같았다.

“폐하. 이 여자는 제가 막아볼 테니 어서 몸을 피하시지요.”

“청검 자네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인가?”

“제 한 목숨 던져서라도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피신을….”

“허허, 내 비록 천하의 주인이지만 이 침실 외에는 갈 곳이 없다네. 그대가 내 마지막 희망이야.”

무거운 한숨을 토하며 청검이 앞으로 나섰다.

귀빈이 짐작하기 어려운 고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스르릉.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버리며 검을 뽑았다.

강력한 검기도, 날카로운 예기도 맺히지 않은 맑은 검.

검에 대해서만큼은 신주의협 외에는 적수가 없을 거라 자부심을 갖게 했던 바로 그 청천검이었다.

“이것 참, 곤란하네요.”

청검의 기세를 유심히 살피던 귀빈이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웬만하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끝내려고 했는데… 검을 들고 나선다면 가구가 몇 개 부서질 수도 있겠어요.”

승패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가구가 부서질까 걱정이라고?

자존심이 상한 청검이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그래, 이건 내 평정심을 어지럽히려는 격장지계다.

난 실력으로 증명할 뿐!

쉬이익~

검이 깔끔한 궤적을 그렸다.

깜짝 놀랄 변화나 폭발적인 힘을 내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검. 청천검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푸슈슉.

검이 지나는 길에 피 분수가 터졌다.

지켜보던 황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청검의 실력에 대한 감탄. 이제는 살았구나 싶은 안도감.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푹, 푸슈슉.

계속 휘둘러지는 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핏방울들.

피에 익숙지 않은 황제는 현기증을 느꼈다.

“청검! 이제 그만하면 되었네. 굳이 시신을 훼손할 필요는….”

하지만 황제의 명이 들리지 않는지 청검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에 맞추어 점점 농밀해지는 피 안개.

마침내 붉은 빛이 실내를 가득 채웠고 그제서야 청검의 움직임이 멈췄다.

너무도 잔인했다.

하지만 귀빈이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이런 최후는 사필귀정.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피 안개가 서서히 걷혔고, 실내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깜짝 놀란 황제가 털썩 주저앉았다.

난도질당한 시체로 변한 줄 알았던 귀빈은 상처 하나 없는 멀쩡한 모습이었고,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던 청검은 길들여진 노예처럼 귀빈 앞에 공손히 서 있는 것이다. 눈동자가 온통 붉은색으로 변한 채로.

“뭘 놀라요? 설마 내가 저딴 노인에게 당할 줄 아셨어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요?”

“별거 아니어요. 청검 저 노인의 검술이 꽤나 상승의 경지에 올라서 말이죠. 정면으로 붙어도 못 이길 건 없지만 만약 무공으로 싸웠다면 이 건천궁이 박살이 났을 거예요. 소리소문없이 오늘 거사를 완수해야 하는데 그런 소란을 피울 순 없죠.”

“그래서 무공이 아닌 사악한 요술을 썼던 거요?”

“사악한이란 표현은 거북하군요. 그냥 초특급 비술을 쓴 걸로 해두죠. 청검이 워낙 고수라 아까운 혈령 한 조각을 낭비해야 했지만… 뭐 결과가 좋으니 감수할 만해요. 좋은 재료를 얻었으니까요.”

“좋은 재료?”

“청검 저 노인의 몸뚱이. 천하 십대 고수급 노예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혈노로 만들던 귀장으로 만들던… 뭐가 되었던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줄 거예요.”

“노예?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럴 수가. 정말 잔인하구나!”

“호호,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자, 이제 슬슬 정리를 하죠. 작별 인사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

분노로 달아올랐던 황제의 표정이 서서히 진정됐다.

체념했기 때문이다.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황제는 머리와 복장을 가다듬고 침상에 바로 누웠다.

“바로 그거예요. 그게 황제다운 모습이죠. 호호호.”

귀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핏방울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황제의 이마에 떨어졌다.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끼며 황제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황태자가, 그 아이가 복수를 해줄 것이다. 반드시….”

“호호호, 능력 되면 그러시던가.”

* * *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황궁에 울려 퍼졌다.

새하얀 상복을 입은 귀빈과 삼황자가 상주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어진 조정 관료들의 회의.

애도의 시간을 가지며 황태자의 복귀를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탁자를 두드리며 화를 내는 대장군들의 기세에 눌려 의견을 철회해야 했다.

결국 삼황자를 차기 황제로 옹립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곽 공공의 지휘를 받는 동창과 금의위는 재빨리 움직였다.

삼황자와 경쟁 관계이던 나머지 황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모조리 체포되었다.

불과 십여 일 사이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살해당했다.

귀빈, 즉 뱀은 완전히 황실을 장악했다.

역천의 음모를 꾸몄던 혈승들 중 가장 먼저 성과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삼황자의 황제 등극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갈 때.

흑사련의 본부에서도 역천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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