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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09화 (198/210)

109화. 번천 (2)

* * *

강서성 용호산 흑사련 본부.

삼십 년 넘게 천하 사파의 주인으로 군림한 만악신권 정고궤는 련주 전용 지하 수련실에서 폐관 수련 중이었다.

삼 년간 계속된 이번 폐관 수련의 성과는 매우 높았다.

우연히 발견한 사파 무공의 전설, 유성폭기공(流星爆氣功)의 대성을 눈앞에 둔 것이다.

이 무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였다.

강력한 내공을 천지원기와 동화시켜 백여덟 개의 강기탄을 유성처럼 쏟아낼 수 있는 무공.

완성만 된다면 천마는 말할 것도 없고, 신주의협과도 한판 승부를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으면 삼 개월, 길어도 반년.

그 정도 시간만 더 집중하면 분명 대성을….

흐뭇한 상상을 하며 기공을 단련하던 정고궤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지상에서 연결된 방울이 딸랑딸랑 요란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방해하지 말라고 일렀건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상 방울 앞으로 향했다.

대나무 관을 통해 돌돌 말린 종이가 배달되어 있었다.

바깥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종이를 펼쳐보았다.

『 새로운 황제 등극.

흑사련을 황실의 공적이라 선포하고 말살을 명령.

일만 황군이 이곳 본부로 진격 중 』

이런 미친!

정고궤의 얼굴색이 허옇게 변했다.

정진악 이놈은 도대체 련을 어떻게 운영했길래 황제의 눈 밖에 났다는 말인가?

안타까웠다.

유성폭기공의 대성을 목전에 두고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한 시진 넘게 고민하던 정고궤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무공은 잠시 미룬 후 다시 익히면 되지만, 흑사련은 한번 무너지면 되돌릴 수 없으니 결론은 뻔했다.

콰콰콰쾅!

욱 하는 심정에 거칠게 손을 휘두르니 두꺼운 철문이 종이처럼 찢어졌다.

내리쫴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정고궤가 지상으로 올라갔다.

* * *

“도대체 어쩌다가 황실의 눈 밖에 나게 된 건가?”

정고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납작 고개를 숙인 총군사 허숙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련주님. 새로 황제로 등극한 삼황자 측과는 특별한 관계이온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특별한 관계?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얼마 전 저희가 그쪽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소림에서의 사건이온데….”

허숙이 빠르게 사건을 요약했다.

동창에서 요청이 온 것과 흑사련이 고수를 파견한 것,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목적을 달성한 것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럼 우리에게 포상을 해야지 왜 칼을 겨눈단 말이냐?”

“토사구팽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살인멸구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쪽이나 저희나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괴인들을 다수 투입했던 터라….”

“드러나선 안 될 비밀?”

허숙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시의 상황을 모두 고하면 후계자인 정진악의 비행을 까발리는 꼴이 되고,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련주의 질문에 답을 안 할 수도 없는 일.

“그, 그것이… 소련주께서 비밀리에 고수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은 련주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우리 흑사련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에서도 비밀리에 육성하는 무사들은 있는 법.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말이냐?”

“아마도 그 무사들의 무공이 일반적인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황실에서 신경이 쓰일 정도로요.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니 소림 사건 시 그들을 인솔했던 옥수 아가씨에게 물어보심이….”

“옥수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찬 바람이 쌩쌩 불던 정고궤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아들인 정진악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정이 안 가지만, 손녀 정옥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고 사랑했다.

폐관 수련 삼 년 동안 가장 보고 싶었던 것도 그녀였고.

“좋아. 나머지 내용은 옥수에게 직접 듣도록 하지. 그리고 내일 진악을 불러 잘잘못을 따지도록 하겠다!”

* * *

정옥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옥수 왔느냐?”

방 안에서 따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작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으며 방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하하하, 우리 옥수, 못 본 사이 더 예뻐졌구나.”

쪼르르 달려가 정고궤의 품에 안겼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을 통해 할아버지의 애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할아버지. 벌써 폐관을 끝내실 줄 몰랐어요. 분명 무공을 대성하신 것이겠죠?”

“아쉽지만 아니다. 마지막 고비 하나가 남았는데, 비상 상황이 생겨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새로운 황제 말씀이죠?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도와 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네가 그 일의 책임자였다고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정옥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평소 그녀의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난감한 표정.

“벼, 별일 아니었어요. 소림사를 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 해서 고수들을 파견해준 것뿐인데….”

“어떤 고수들을 보냈던 거지? 네 아비가 키운 괴물들 때문에 황실의 눈 밖에 난 것 아니냐?”

그녀의 표정이 난감을 넘어 거의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는 사랑하는 할아버지이자 흑사련의 련주이니까.

“할아버지. 제 입으로 아버지께 피해가 갈지 모르는 말씀을 드릴 수는 없어요. 대신 당시 현장 상황을 기록해 놓은 보고서가 있으니 이걸 드릴게요.”

정옥수가 품에서 얇은 책자를 꺼냈다.

소림에서의 대결 장면이 상세히 묘사된 보고서였다.

처음엔 가소롭다는 표정이던 정고궤의 표정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잔뜩 찌푸려졌다.

“오방혈수? 이건 우리 흑사련의 무공이 아닌데… 네 아비는 어쩌자고 이런 괴물들을 키운 거지?”

“아버지는 흑사련이 천마신교나 무림맹을 누르고 세상에 우뚝 서길 바랐어요. 그런데 우리가 가진 무공으로는 신주의협은커녕 천마도 이길 수가 없다고….”

콰아앙!

정고궤가 팔을 기대고 있던 탁자가 산산조각이 났다.

“정진악 이 썩어빠진 놈! 그래서 사악한 술법에 의존하려 했단 말이냐? 내가 유성폭기공을 대성하기만 하면 그깟 천마 따위 박살을 낼 수 있다는 말이다!”

“하,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퍼렇게 질린 정옥수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정고궤의 손에서 삼매진화의 열기가 일어나 손에 쥔 책자를 태웠다.

훨훨 불타 시커멓게 변해가는 종이 뭉치를 보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휴우, 미안하구나. 옥수 네 잘못이 아닌데. 넌 아무 걱정 말거라. 이 할애비가 잘 해결할 테니.”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아버지를 너무 혼내지 마세요.”

정고궤는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손녀의 부탁은 웬만하면 다 들어줬지만, 이번만큼은 힘들 것 같았다.

* * *

정진악이 향하는 곳은 본부 뒷산의 정상에 위치한 련주 전용 연무장.

이곳에서 만나자고 할 것은 이미 예상했었다.

예전부터 자신을 혼낼 때면 항상 연무장을 이용했으니까.

수련이나 가르침을 빙자한 무자비한 구타.

그것이 정고궤가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후후, 누가 사파의 수괴 아니랄까 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고궤는 흑사련주로 꽤나 적합한 인물이었다.

강한 무공, 폭력적인 성향…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방법을 알았다.

진작에 절대경에 오른 데다가 삼 년이나 폐관 수련을 했으니 더 강해졌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고, 마침내 연무장에 도착했다.

“아버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태양을 등지고 선 정고궤의 모습.

예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것이 대번에 느껴졌다.

이 정도면 분명 천하 삼대 고수.

신주의협과 천마 외에는 적수가 없을 것 같았다.

“흥, 많이 컸구나. 내가 보자고 했음에도 그렇게 느긋하게 걸어오다니.”

“제 나이도 이제 적지 않습니다. 누가 부른다고 헐레벌떡 달려올 나이는 지났지요.”

“갈!”

정고궤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황제의 눈 밖에 나 흑사련을 위험에 빠뜨린 것보다도 지금의 건방진 모습이 더 화를 돋웠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잘난 놈이 일을 이따위로 해? 요상한 사술로 괴물을 키워서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냐는 말이다!”

“그럼 어쩝니까? 평생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눈치만 보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모자란 놈! 열심히 수련하여 제대로 된 힘을 키워야지! 천마나 신주의협은 내가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후후, 폐관 수련의 성과가 제법 좋으셨나 봅니다?”

이놈이?

느낌이 이상했다.

정진악이 예의 바르고 착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무얼 믿고 이렇게 건방져진 걸까?

“진악아. 아무래도 내가 널 잘 못 가르친 것 같구나. 역시 너에겐 따끔한 훈계가 필요해.”

“손을 쓰시겠다? 좋지요. 제가 구해드린 유성폭기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여주시죠.”

아버지와 아들, 흑사련의 주인과 후계자의 대결이 시작됐다.

물론 정고궤는 이것을 대결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줌으로써 건방진 놈의 버릇을 고쳐 놓으려는 것.

반년은 거동을 못 하게끔 실컷 두들겨 패서 폐관 수련실에 가둬 둘 생각이었다.

그러니 첫수부터 매우 강력한 공격을 시전한 건 당연한 일.

정고궤가 오른손을 치켜들자 십여 장 높이의 허공에 빛나는 구체(球體)들이 생겨났다.

대자연의 원기를 끌어와 만들어낸 유성탄!

지금껏 냉소적인 미소를 띠고 있던 정진악도 처음으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유성낙하!”

정고궤의 외침에 맞춰 열 개의 유성탄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하압!”

정진악이 붉게 물든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손 주변 일 장 넓이로 형성되는 강기 방패.

펑 펑 펑 펑 펑….

낙하하는 유성탄이 강기막을 연달아 강타했다.

움푹움푹 파이는 강기막.

붉은 기운이 부서져 가루가 되고 파지직 연기가 피어나는 것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정진악을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양손에 공력을 집중했고, 결국 공격을 막아냈다.

“네가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구나. 그 정도면 흑사련의 이인자로서 부끄럽진 않군.”

내용은 칭찬 같았지만 실은 비웃는 말을 던진 후, 정고궤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공중에 서른여섯 개의 유성탄이 생겨났다.

열 개도 겨우 막았는데, 과연 서른여섯 개를 막을 수 있을까?

정진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아랑곳 않고 유성우가 떨어졌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힘의 결정체가 하늘 위에서 내리꽂히니 마치 대재앙이 임한 것 같았다.

정진악은 다시 한번 붉은 방패를 만들어냈다.

이번 것은 조금 더 크고 두꺼워 보였고, 더 선명한 붉은 색을 띠었다.

그렇지만 유성탄의 수는 무려 서른여섯 개.

펑펑펑펑… 펑펑….

먼저 낙하한 십여 개의 유성탄에 맞은 강기막이 볼썽사납게 찌그러졌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질끈 물며 정진악이 힘을 짜냈지만 역부족.

펑! 펑! 펑!

다시 십여 개의 유성탄이 떨어지자 강기막은 방패의 모양을 잃었다.

후후, 이제 어쩔 것이냐?

정고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고, 그 순간 나머지 유성탄이 쏟아져 내렸다.

쌔애액~

강기막의 방해도 받지 않고 거침없이 쇄도한 유성탄이 정진악의 몸을 강타하려는 순간.

“도, 도대체 이건…?”

어디선가 나타난 용의 모습을 한 붉은 기운.

똬리를 틀 듯 정진악의 몸을 감싸 보호하더니 날아드는 유성탄을 덥석 삼켰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 듯이.

“휴우, 제법 위험했습니다. 유성폭기공의 위력이 대단하군요. 제 본신 공력까지 꺼내게 만들다니.”

“본신 공력? 흥, 그게 네놈이 건방을 떤 밑천이었나 보군. 내 똑똑히 보여주마. 그따위 사술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하려는 것인 듯, 정고궤가 오른손과 함께 왼손까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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