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번천 (3)
* * *
이건 정말 자연재해 수준이구나!
정진악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늘 위에 떠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칠십이 개의 유성탄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과연 내 용혈공이 저걸 막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십여 개의 유성탄을 막은 것만으로도 용의 붉은 빛이 많이 옅어졌으니까.
“진악!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폐관 수련 일 년 정도로 봐줄 용의가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유성탄을 위협적으로 회전시키며 정고궤가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쳐 죽이고 싶지만, 슬퍼할 정옥수가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부자의 정이라도 느끼신 겁니까? 어울리지 않으니까 빨리 공격이나 하세요.”
“이놈! 정말 죽고 싶은 게냐? 넌 이번 공격을 견딜 수 없다는 걸 모르겠나?”
“후후, 벅찬 건 아버님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아직 유성폭기공을 대성하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칠십이 개의 유성탄을 만든 것만으로도 내력이 모두 고갈된 게 뻔히 보입니다. 저야 쉽게 죽이겠지만 과연 천마를 이길 수 있을까요?”
“어리석은 놈!”
정고궤의 분노가 한도를 초과했다.
손녀의 슬퍼할 모습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지 증명하는 것,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우우웅~
정고궤가 유성폭기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에 맞춰 공중에 유성탄이 새롭게 나타났다.
칠십삼 개, 칠십사 개… 칠십구 개.
여기까지가 한계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족한 공력은 자신의 분노로 채울 생각이었다.
구십일, 구십이….
이제 정말 한계였다.
멈춰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심장에서 뭔가 색다른 기운이 들썩거렸다.
혹시…?
정고궤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극한의 상황에 서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길이 보이는 법.
틀림없었다. 지금 이 순간 유성폭기공이 완성되려는 것이다.
구십사, 구십오….
늘어나는 유성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심장에서 생성되는 기운을 온몸으로 터뜨렸다.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간 기운이 뇌로 모이는 순간, 머릿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크아악!”
뇌를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공중에 떠 있던 유성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정고궤는 털썩 쓰러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곧 정신을 잃을 것을 알았기에 마지막 기력을 짜내 질문을 던졌다.
궁금증을 풀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뭐긴 뭡니까. 독(毒)이지.”
“독? 그럴 리 없다! 난 흑사련의 련주다. 독 따위에 당하지 않아!”
“보통 독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건 제 피로 제조한 혈령기독(血靈氣毒)이니까요.”
“혈령?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네가 나에게 독을 쓸 기회는 없었을 텐데…?”
“제가 독을 쓴 게 아닙니다.”
“그럼…?”
“어제 옥수가 준 책을 태우지 않으셨나요?”
“서… 설마….”
“맞아요. 그 책에 혈령기독이 묻어 있었죠. 삼매진화로 태우는 순간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간 것이고요.”
“이… 연놈들! 철저히 계획적이었구나. 왜? 어째서 이런 짓을…?”
“왜냐고요? 당신을 끌어내려야 내가 흑사련을 차지하니까. 그리고 당신의 무공이 너무 강해 정면 승부로는 불리하니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고.”
“하, 하지만 나에게 유성폭기공을 구해준 건 바로 너이지 않느냐?”
“그건 또 나름의 이유가 있었죠. 당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에게 도움이 되니까. 당신의 내 노예가 될 몸이거든.”
노예?
이제서야 깨달았다.
저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
“넌… 대체 누구냐?”
“후후, 말했잖아. 네 주인이 될 몸이라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이만 포기해. 무림맹주도 곧 너와 같은 꼴이 될 테니.”
정고궤의 두 눈은 이미 시뻘겋게 물들었다.
무림맹주도 이렇게 될 거라고?
하하하,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 생각을 끝으로 천하 사파의 우두머리 정고궤가 눈을 감았다.
* * *
무림맹주 위무진은 사교성이 좋은 인물이 아니다.
맹주라는 감투를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손님들을 만나긴 하지만 절대로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었다.
특히 오늘 약속된 사람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남궁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남궁세가의 인물인 데다 연배도 자신보다 위이니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태상가주씩이나 나선 걸까?
일이 있으면 서신을 보내면 될 것을.
게다가 야외에서 만나자는 건 또 뭐야?
내 더러워서 맹주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원….
구시렁거리며 솔밭을 걸어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래도 예의는 지킬 생각이었는지 남궁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맹주, 어서 오시오. 바쁘신 분을 청하게 되어 송구스럽소이다.”
“별말씀을요. 남궁 노선배님이 부르시면 당연히 와야지요. 그나저나 어째서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무림맹 내에도 안락한 장소는 많이 있습니다만.”
은근히 핀잔을 주는 말.
하지만 남궁윤은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넘겼다.
“허허허, 가끔 바깥 공기를 쐬는 것도 좋지요. 게다가 무림맹에는 보는 눈도 많고요.”
“보는 눈이 많다라… 뭐 비밀리에 하실 말씀이 있나 봅니다?”
“실은 그렇소. 비밀스러울뿐더러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이 노인네가 또 뭔 일을 벌이려고 그러나?
맹주는 벌써부터 속이 거북해지는 것 같았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뭔 일인지 속 시원히 말씀하시지요.”
“허허, 역시 맹주는 화통하시군. 좋소,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리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 내가 어제 해남파 장문인을 만났소.”
“그래요? 해남파 장문인이 낙양에 있다고요? 맹주인 나는 왜 몰랐을까? 뭐 어쨌든… 그래서요?”
“그리고 삼사일 지나면 소식이 올 텐데, 종남파 장문인이 주화입마에 빠져 급사했소이다. 장문인 자리는 태상장로가 물려받게 되었고요.”
“뭐라고요?”
맹주의 눈빛이 돌변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일파의 수장의 죽음을 저리 쉽게 이야기하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선배. 지금 무슨 말이 하고픈 겁니까?”
“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해놓고 내가 말이 길었군. 요점은 이거요. 오대세가 전체, 개방, 해남파, 그리고 종남파까지… 나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말이지요.”
맹주도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무림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십오대 문파 회의 중 여덟 표를 확보했다는 말.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과반을 확보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이 후배는 여전히 모르겠군요. 도대체 무슨 표결을 하시려고 표를 구걸하러 다니신 겁니까?”
맹주의 말투도 꽤나 거칠어졌다.
하지만 아직 화를 내긴 일렀다.
이어진 남궁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뭐긴 뭐겠소? 당연히 신임 맹주 선발 표결이지.”
이것 참, 기가 막혀서.
너무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남궁윤의 뻔뻔한 얼굴을 뻔히 바라보던 맹주가 말했다.
“그렇군요. 신임 맹주 선발이었군요. 하지만 한 가지 잊고 계신 게 있는 것 같군요.”
“내가 잊고 있는 게 뭐요? 맹주의 가르침을 바라오.”
“별것 아닙니다. 신임 맹주를 뽑으려면 우선 맹주 자리가 공석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이지요. 보시다시피 현재 맹주 자리는 공석이 아니고요.”
“난 또 뭐라고. 그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소. 맹주 자리는 오늘 부로 공석이 될 테니.”
이거 선을 넘은 것 맞지?
그래… 넘어도 한참 넘은 거야.
남궁세가의 이름을 생각해서 웬만한 일에는 한 수 접어줄 의향이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선배. 미쳤소?”
“난 멀쩡하오. 맹주의 검을 꺾을 만큼 기력도 넘치고.”
“아니, 내가 보기엔 선배는 미친 게 맞아요. 그리고 난 미친 노인네의 헛소리를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고.”
맹주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하지만 채 세 걸음도 걷기 전에 다시 몸을 돌려야 했다.
무시무시한 검이 등 뒤로 날아들었으니까.
채앵~
재빨리 검을 뽑아 공격을 막은 맹주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선배! 이건 반역이오. 맹의 문파들이 가만있을 것 같소?”
“가만있을 거야. 오히려 나를 칭송할 거고. 새외 세력과 손을 잡고 중원 무림을 배신한 맹주를 내 손으로 처단하는 거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증거가 차고 넘치니까. 이 분야에선 최고라 할 수 있는 동창이 위조해낸 증거들이 아주 그럴듯하거든.”
동창이 개입했다고?
그렇다면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맹주의 안색에서 노기가 사라지며 무표정의 얼굴이 되었다.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
“선배. 아니 이제 선배라고 부르기도 뭐하군. 남궁윤 당신이 뭔가 일을 꾸미는 모양인데… 그게 뭐든 우선 당신이 나를 이겨야 할 거요.”
“이제야 핵심에 도달했군. 맞아. 오늘 만남의 목적이 바로 그거다. 제대로 한번 겨뤄보자고.”
남궁윤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의 기세가 떠올랐다.
제왕검형(帝王劍形).
오늘날 남궁세가를 오대세가의 수장의 위치로 올려준 바로 그 무공.
처음부터 세가 최강의 무공을 꺼내는 것을 보니 남궁윤은 진심으로 맹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맹주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건만, 갑자기 주변으로 보라색 노을이 번졌다.
화산파의 절대무공인 자하신공(紫霞神功)을 끌어올린 것이다.
“남궁윤. 지금이라도 포기하시오. 전임 맹주보다 못하다고 나를 무시하는 모양인데… 남궁세가의 무공 따위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소?”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순간 맑은 하늘이 쩍 갈라지며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맹주는 구궁보로 발을 옮기며 육합매화검을 펼쳤다.
표홀히 떠오르는 열두 송이의 매화.
거대한 검의 형세와 비교하여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자하신공에 기반한 매화꽃은 멋지게 제왕검형을 막아냈다.
샤악~
이어지는 남궁윤의 공격.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에 더하여 수평으로 거대한 기세가 날아왔다.
마치 십 장 길이의 예리한 낫으로 베어오는 것 같았다.
“흥, 어림없다.”
암향표의 경공으로 뛰어오른 맹주가 놀랍게도 날아오는 검의 기세를 밟고 한 번 더 도약했다.
동시에 하늘을 뒤덮는 보랏빛 노을.
제왕검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틈에 수십 송이 매화가 곳곳에서 피어났다.
콰아아앙!
남궁윤이 다급히 왼손을 쭉 뻗었고, 태풍 같은 장력이 사방으로 뻗어가 매화 송이를 집어삼켰다.
검의 기세도 사라졌고 매화도 증발했다.
얼핏 동수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맹주와 남궁윤은 알고 있었다.
맹주의 솜씨가 한 수 위였다는 것을.
남궁윤은 세가 최고의 무공인 제왕검형을 썼지만 맹주는 화산파 최고의 검법은 아직 꺼내지도 않은 것이다.
“이쯤 했으면 당신도 느꼈을 것 같은데? 남궁세가의 무공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겠네. 맹주의 무공은 과연 대단하군. 신주의협이 왜 자네에게 자리를 물려줬는지 잘 알겠어.”
“알겠으면 이만 포기하시오. 맹주를 시해하려 한 죄를 묻지 않을 순 없지만 그래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게 해주겠소.”
“하하하, 내가 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방금 남궁윤 당신도 인정했지 않소? 남궁세가의 무공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자네가 보기엔 내가 남궁세가의 무공만 익혔을 것 같은가?”
남궁윤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에 쥔 검을 땅에 던졌다.
검을 놓으니 당연히 제왕검의 기세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 행동이 싸움을 포기하는 게 아님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남궁윤의 등 뒤로 새로운 기세가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이건 또 뭐요?”
맹주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지만 목소리의 떨림을 모두 감추진 못했다.
새로 등장한 기세는 그만큼 위압적이었다.
그것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붉은 빛의 호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