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번천 (4)
* * *
무(武)의 수좌 호랑이는 다른 혈승들과는 달랐다.
비술이나 영적 능력에 집착하는 뱀이나 용과는 달리 그는 순수한 무공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니 무림 맹주와의 이번 대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이자 기쁨이었다.
다음 상대로 기대하고 있는 천마나 최종 목표로 정해 놓은 신주의협에는 못 미치지만 이 정도 대결 상대를 어디서 또 구한다는 말인가?
콰앙! 우르릉… 퍼엉!
남궁윤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날뛰었다.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을 보니 정말로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반면 맹주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실은 죽을 맛이었다.
남궁윤이 갑자기 검을 버리고 적수공권으로 달려드는데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장, 권, 지, 퇴… 온갖 무공이 거침없이 펼쳐졌는데, 남궁세가의 무공도 있었지만 불문, 도가의 무공은 물론 군문, 사파의 무공까지 튀어나왔다.
심지어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지력을 검처럼 휘두르는데, 몇 초식은 틀림없이 화산파의 검법이었고 완벽하진 않지만 매화까지 그려내는 것을 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천하의 무공을 집대성하는 무술 천재라도 된다는 말인가?
화산의 신묘한 검법을 연달아 시전했지만, 야수의 그것과 같은 유연함과 탄력에 더해 수십 종의 무공으로 대응하는 남궁윤에겐 소용이 없었다.
“으아악! 진짜!”
자신의 모든 공격은 막혔고, 반대로 남궁윤의 공격은. 작은 상처를 하나하나 더해갔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른 맹주가 풀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면 필패, 그리고 죽음.
더 이상 뭘 숨기고 말고 할 때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가 이런 수준일 줄 상상도 못 했소. 정말… 대단하군.”
“하하, 자네도 맹주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췄어. 이렇게 전력으로 무공을 펼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남궁윤은 정말로 이 대결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게 통할지도…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내 목표는 언젠가 신주의협에게 도전하는 것이었소. 그때를 위해 한 가지 무공을 창안하여 연마하고 있었지.”
뜬금없는 맹주의 말에 남궁윤의 귀가 솔깃해졌다.
“신주의협? 아껴뒀던 최고의 무공을 쓰려는 것인가?”
“그렇소.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써볼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서.”
“그걸… 나에게 선보이겠다고?”
솔깃했다.
남궁윤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영광으로 알고 기꺼이 상대해주지. 신주의협에게 도전하기 위해 만든 무공이라니 기대가 커.”
맹주가 의도한 대로 되었다.
이번에 시도할 무공은 정말로 미완성이었고, 펼칠 준비를 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남궁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맹주는 잡생각을 모두 버리고 검에 집중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
펼치려고 하는 것은 암향검(暗香劍).
화산파 최고의 경신법인 암향표의 원리를 검에 적용한 것이다.
맹주가 쥐고 있는 검의 형체가 점점 흐릿하게 변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윤의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였다.
설마 전설의 심검(心劍)은 아니겠지?
짜릿한 긴장감이 희열로 다가왔다.
그리고… 너무 흥분한 탓에 하마터면 놓칠 뻔한 매화 향기.
향기?
샤아악~
향기가 날카로운 예기로 변해 베어온 것과 남궁윤이 뒤로 물러선 것은 거의 동시.
공중에 핏방울이 뿌려졌다.
하지만 맹주의 입에선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남궁윤이 초인적인 감각으로 회피한 탓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진 못한 것이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남궁윤은 진심으로 감탄했지만 맹주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미완성의 암향검을 펼치느라 기력을 다 짜냈으니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었다.
“내가 졌소.”
“아쉽군. 조금 더 대결을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과 놀아줄 생각은 없으니 죽일 테면 어서 죽이시오.”
“고민이 되는군. 원래는 이 자리에서 자네를 죽여야 하지. 맹주의 시체가 확인되어야 차기 맹주 선발이 열릴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죽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드는군. 차라리 살려 놓고 혈노로 만드는 것이….”
“혈노?”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감이 왔다.
내 정신을 제압해 노예로 만들겠다고?
흥, 누구 맘대로?
맹주는 검을 거꾸로 들고 자신의 목을 베려 했다.
남궁윤이 지체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막 목의 경동맥을 가르려던 검이 지풍에 맞고 방향을 잃었다.
그리고 이어서 날아온 장력이 맹주의 몸을 휩쓸었다.
“감히 내 앞에서 자결을 시도해? 흥, 내가 그 정도도 예측하지 못할 줄 알았나?”
피를 토하며 쓰러진 맹주를 향해 남궁윤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체념의 빛이 역력한 맹주를 향해 손을 뻗던 남궁윤이 멈칫했다.
솔밭 나무 뒤에서 얼핏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금빛.
금빛을 띄는 검광(劍光)!
남궁윤은 순간 뇌가 굳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빛 검광은 신주의협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니까.
본능적인 위기의식으로 인해 남궁윤은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검광이 휩쓸었고, 뒤이어 검은 복면을 한 사내가 나타났다.
“신주의협께서 이곳엔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복면의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뚜벅뚜벅 걸어와 쓰러진 맹주를 안아 들었을 뿐.
남궁윤은 갈등에 휩싸였다.
이대로 맹주를 구해가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신주의협과 한판 붙어볼 것인가?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또 한편으론 천하제일고수와 싸워보고 싶은 열망도 일었다.
조금 전 검광이 휩쓸었던 자리로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검광의 흔적을 통해 신주의협의 수준을 가늠해보려는 것.
확실히 뛰어난 수법이긴 한데… 천하제일고수의 검이라 하기엔 무언가….
급하게 공격하느라 실력 발휘를 못 한 건가?
그런데… 신주의협 정도 되는 자가 왜 복면을…?
“잠깐!”
맹주를 안고 천천히 물러나던 복면인을 남궁윤이 불러 세웠다.
“당신… 신주의협이 아니구나!”
“흥, 난 신주의협이라고 말한 적 없소!”
복면인은 맹주를 안은 채 맹렬히 달려갔다.
분노한 남궁윤이 뒤를 쫓았다.
복면인도 꽤나 빨랐지만 남궁윤의 속도가 월등했고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숨 몇 번 쉴 시간이면 따라 잡힐 게 뻔했는데….
휘익~
복면인이 남궁윤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암기라고 생각하고 슬쩍 피하니 그 무언가가 발 옆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벼락이 떨어지는 폭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덮쳐왔다.
초인적인 순발력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음에도 남궁윤은 십여 장을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온몸의 그을음을 털어내며 비틀비틀 일어섰을 때, 복면인과 맹주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복면인은 솔밭의 좁은 길을 나는 듯이 달렸다.
천뢰가 제대로 터졌지만 안심할 순 없었으니까.
솔밭을 빠져나와 조금 더 달리니, 저 앞에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는 복면인과 맹주를 태우더니 질주를 시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행히 성공하셨군요.”
“아슬아슬했소. 제갈 군사 당신이 준 천뢰 덕분에 겨우 성공할 수 있었지.”
이제 좀 안심이 되는지 사내가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무림맹 원로원주 사마염.
그렇기에 신주의협과 같은 금검문의 무공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주님의 상태는 좀 어떻소?”
“내상이 심하지만 이건 큰 문제는 아닌 듯싶고요, 그보다는….”
“그래, 정신적 충격이 문제겠지.”
제갈현선 총군사가 환약 몇 개를 맹주의 입에 밀어 넣고 추궁과혈을 시작했다.
사마염도 힘을 보태 내력을 불어넣으니, 잠시 후 맹주가 눈을 떴다.
“쿨럭. 음… 원로원주님? 원주님이 절 구하신 겁니까?”
“나 혼자 한 일은 아니오. 여기 제갈 군사 역할이 컸지.”
“오, 우리 총군사가 평소엔 일을 안 하더니, 그래도 내가 쫓겨나는 날엔 도움을 주는군.”
재미없는 농담. 그래도 맹주가 너스레를 떠는 걸 보니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맹주님만 쫓겨난 게 아닙니다. 저 또한 오늘부로 백수가 되었죠.”
“그럼 이제 다른 할 일도 없을 테니 설명을 좀 해보게. 남궁세가의 노인이 왜 갑자기 미친 거지? 총군사와 원로원주께선 어찌 알고 날 구하러 온 거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먼저 답을 드리죠. 제 조카가 몰래 연락이 왔습니다. 남궁세가에서 맹주님을 만나자 할 경우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서 ‘천뢰’라는 폭탄도 함께 보냈습니다.”
“조카라면 문무대의 제갈윤 그 아이겠군. 근데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지?”
“말씀드렸으면 믿기는 하셨겠습니까? 오늘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정체가 의심스러웠던 건 문무대였지 남궁세가가 아니었잖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 어쨌든 세 번째 질문을 추가해야겠군. 자네 조카는 어떻게 남궁세가의 음모를 알고 있는 걸까?”
질문은 제갈현선에게 한 것이지만 맹주의 시선은 원로원주에게로 향했다.
답은 당신에게 듣겠다는 듯이.
“맹주께서 감이 좋으시군. 맞소. 총군사보다는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오.”
“역시나 강한월이 관련되어 있군요?”
“그렇소. 강한월과 문무대는 오늘과 같은 사단을 막기 위해 애써왔던 거요.”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어쨌거나 지금까지 맹주인 저를 속여왔다는 것이니….”
“그 부분은 내가 사과드리지요. 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맹주께서도 납득이 가실 겁니다.”
사마윤이 설명을 시작했다.
문무대가 왜 설립되었는지, 강한월이 어떤 활약을 해왔는지.
원래는 미쳤냐는 면박을 들을 수도 있는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죽음 직전까지 같던 맹주는 사마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듣고만 있지도 않았는데….
“뭐요? 문무대에 천마신교의 마인들이 있다고요?”
“그, 그렇소. 천마의 지원을 받아서 함께….”
“무림맹의 공식 조직인 문무대에 대해 천마는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맹주인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겁니까?”
“진정하시오, 맹주. 내 방금 설명을 드렸잖소? 맹주도 회귀자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허허, 참. 살해 위협을 당하고 맹주에서 쫓겨나게 되어서야 겨우 의심을 벗게 되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양해 바라오, 맹주. 솔직히 사실을 보고드렸더라도 믿지도 않으셨을 것 아니오?”
“그 말도 맞네요. 그건 그렇고… 신주의협께선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제갈현선도 그 부분이 궁금했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신주의협의 이름이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는, 긴 설명을 듣는 내내 다시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소.”
맹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마윤을 살폈다.
일이 이 모양인데 문무대의 설립자인 신주의협이 행방불명이라고?
“그럼… 강한월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휴우, 그것도 모르겠소이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핀잔이라도 주려던 맹주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놀리거나 비난할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그만큼 힘들고 위험하다는 증거.
신주의협과 강한월이 안전하기를 같이 기원해줘야 할 문제.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아, 그 말씀을 안 드렸군요.”
대답은 제갈현선의 입에서 나왔다.
“이 마차의 목적지는 기루입니다.”
“기루? 기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그 기루?”
“하하, 맞습니다. 기루 중에서도 최고급 기루라고 하더군요.”
마차는 꼬박 하루를 쉬지 않고 달렸다.
도착한 곳은 기루가 맞았다.
제갈현선의 말 대로 고풍스럽고 귀티 나는 최고급 기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