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척혈단 모임
* * *
마차가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장원을 통째로 사용하는 기루는 정말로 크고 화려했다.
“놀랍군. 이런 기루가 있다니.”
마차 밖 풍경에 맹주는 압도된 것 같았다.
정원에 심어진 나무와 석상들만 봐도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갔는지 짐작이 갔다.
“맹주님을 모시는데 설마 싸구려 기루를 골랐겠습니까?”
사마염이 농을 던졌지만 맹주는 마음이 씁쓸했다.
자신은 더 이상 맹주가 아니니까.
어쨌든 마차는 계속 달렸다.
정원과 후원을 지나 별원에 도착한 후에야 마차가 멈췄다.
이후에도 꼬불꼬불 미로 같은 걸어야 했고, 곳곳에 은신해 있는 경비 무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맹주 입장에선 별것 아니지만, 기루의 경비나 하기엔 아까운 제법 강한 무사들.
“이건 뭐… 기루라기보다는 철옹성이군.”
맹주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혼잣말이었지만 대꾸가 있었다.
맹주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제갈윤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모신 것이죠.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맹주님. 원로원주님. 그리고… 총군사님.”
“오, 우리 총군사의 조카님이시군. 반갑네. 그리고 고마워. 자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말이지.”
“저도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선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제갈윤 뒤편에 서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맹주님을 이곳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오문의 민정화라 합니다.”
* * *
여러 개의 방과 회의실을 갖추고 있는 은밀한 별채.
이곳이 동창의 급습을 피해 달아났던 문무대가 임시 본부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물론 민정화가 마련해준 곳.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한편에는 맹주와 사마염, 제갈현선이 앉았고, 반대편에 문무대 대원들과 민정화가 앉았다.
회의실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맹주의 눈길이 한 곳에 꽂혀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는 광군영과 소영영은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고 말이다.
“뭐, 좋아. 착실해 보이는 젊은이들이군. 함께 일할 만하겠어.”
뜬금없는 맹주의 평가에 제갈윤은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어쨌든 시작이 좋았다.
맹주가 스스럼없이 천마신교의 대원들을 받아들였으니.
“맹주님께 휴식이 필요한 줄 알지만, 우선 간단히 인사라도 드림이 맞을 것 같아….”
“내 부상은 별것 아니네. 며칠 지나면 저절로 나을 거야. 하지만 머리는 복잡해서 깨질 것 같네. 궁금증을 풀지 못하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어.”
“대략적인 설명은 원로원주님께 들으신 걸로 압니다만.”
“그랬지. 하지만 아직 모르겠는 것투성이야. 지금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건가?”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민정화가 맡았다.
문무대가 피신한 이후 모든 정보의 취합은 그녀의 몫이었으니까.
“세상이 뒤집혔습니다. 최근 한 달 이내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 네 곳 중 세 곳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네 곳 중 세 곳?”
“그렇습니다. 황실과 흑사련…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림맹. 회귀자가 숨어있을 거라고 저희가 의심하던 곳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무림맹만이 아니었다고? 이거 정말 미칠 노릇이군.”
“큰일이죠. 시작은 황실이었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후 흑사련과 남궁세가에도 일을 벌일 기회를 마련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무림맹은 어찌 되는 건가?”
“저희가 은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죄송합니다… 맹주님께는 최소 네 가지의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새외 세력과의 결탁, 금지된 무공의 수련, 뇌물수수, 암살 사주. 모두 동창에서 조작한 것이죠.”
“허허, 참. 곧바로 무림 공적이 되겠군.”
“그리 처리될 겁니다. 그리고 남궁세가 태상가주가 한 달 내에 신임 맹주가 되겠죠.”
“흠… 차 말고 술 없나? 갑자기 술이 땡기는 군.”
“기루에 설마 술이 없겠습니까?”
민정화는 얼른 술과 안주를 내왔다.
맹주가 술을 청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고, 대원들도 스스럼없이 의견을 말할 용기가 생겼다.
한 시진 정도 거침없이 이야기가 오가자 맹주와 제갈현선도 어느 정도 앞뒤 파악이 되었다.
그간 의문으로 남았던 실종 사건이나 신룡대회 사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다들 정말 수고가 많았어. 맹주랍시고 아무 일도 못 한 내가 부끄러워지는군.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한 법. 물론 계획은 있겠지?”
“큰 계획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하는 게 있지요.”
“우선해야 하는 것… 그게 무얼까? 총군사 자네는 짐작이 가나?”
맹주는 제갈현선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기 젊은 천재들이 활약하고 있으니 자네도 끼어서 실력 발휘 좀 해보라는 뜻.
“민정화 소저와 제갈윤의 계획을 제가 다 알 수는 없지요. 하지만 만약 저라면… 조직을 갖추는 것을 우선 추진하겠습니다.”
“오! 적을 상대하기 전 우리 진형이 공고해져야 한다는 말이군. 일리가 있어.”
“그리고 그를 위해선 무조건 두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신주의협과 강할월이군.”
“맞습니다.”
맹주가 이번엔 민정화와 제갈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무림맹 총군사의 실력이 어떠냐는 뜻이었다.
“역시 총군사님은 대단하시군요. 정확히 저희 생각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대들의 계획은 좀 더 구체적이겠지. 내가 들어볼 수 있겠나?”
“저희에게 필요한 건 세 가지입니다. 정보, 자금, 그리고 무력. 이 중 정보와 자금은 지금까진 무림맹에 의존하고 있던 건데… 상황이 바뀐 만큼 당분간은 하오문과 흑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민 소저의 역할이 크군.”
“별말씀을요. 역시나 관건은 무력인데… 이번에 세상이 뒤집히면서 적들은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특히나 허수아비 황제 덕분에 백만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죠.”
“머릿수 싸움에선 이미 졌군.”
“네. 저희가 기대할 것은 초고수들밖에 없습니다. 양에선 안 되니 질이라도 앞서야 하는 거죠.”
그렇기에 신주의협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또한 혈승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강한월도.
그 외에 기대하는 고수들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소요자를 비롯한 전대 고수들이었다.
마지막으로 거론된 이름에 대해선 맹주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고.
“천마? 물론 아주 강력한 전력이긴 하지만… 꼭 천마신교까지 손을 잡아야겠나? 다른 뜻은 아니네. 그냥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천마신교, 특히 천마님의 도움은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음… 이건 광 소협이 직접 말씀하시죠.”
맹주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광군영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
“천마께선 곧 완전한 마신강림을 이루실 겁니다.”
“완전한… 마신강림?”
“네. 조만간.”
맹주와 제갈현선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부작용 없는 마신강림은 지난 수백 년간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그걸 당대 천마가 해낸다고?
순간 왜 민정화가 천마신교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천마가 초고수이니 힘을 빌리자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정파 무림이 홀로 혈교와 전쟁을 벌일 경우 승리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 뻔했다.
천마신교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전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것이고.
혈교와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만약 천마신교가 침공을 해온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원 무림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천마신교와 협력하여 혈교에 맞서는 게 맞았다.
져도 같이 지고, 피해를 입어도 같이 입어야 했다.
그것이 혈교 이후 또 다른 전쟁을 예방하는 길이 될 테니까.
“민 소저의 깊은 뜻, 잘 이해했네.”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생각이 깊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함께 일할 맛이 날 것 같았다.
“자, 그럼 나는 무슨 역할을 하면 되겠나? 명을 내려주시게.”
“명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민정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맹주는 진심이었다.
“회귀자를 상대하는 일은 자네들이 전문가 아닌가. 자네들이 계획을 짜고 나는 그 명에 따르는 게 맞지.”
“명이란 표현은 감당할 수 없지만, 그럼 저희 계획을 말씀 올리겠습니다.”
민정화와 제갈윤이 번갈아 가며 계획을 설명했다.
우선 문무대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무림맹에서 도망쳐 나온 이상 의미가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부대 명칭은 당연히 척혈단.
“선배 어른들께는 죄송하지만 단장은 강한월 소협이 맡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지.”
“신주의협께서 합류하시면 태상 호법을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맹주님께서는 제 일 호법을 맡아주십시오.”
“신주의협 선배와 함께 호법이라… 영광이군. 호법으로서 내가 할 일은?”
“맹주님은 총군사와 함께 초고수들을 섭외해주십시오. 완전히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완벽한 고수여야만 합니다.”
“소수 정예로 가자는 말이군. 좋아, 명을 받들지.”
“그리고 사마염 원로원주께서는 신주의협의 행방을 찾아주십시오.”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마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하겠네. 하지만 내 능력으로 가능할는지….”
“하오문의 정보원들을 최대한 붙여드리겠습니다. 실은… 이미 몇몇 관심 가는 정보가 있고요.”
“정말인가? 도대체 어떤 정보가…?”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천산에서 운남으로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오문의 정보분석가들에 따르면 그 정도 속도를 내려면 천하 십대고수에는 들어야 한다네요. 그런데 그 시점에 십대고수들의 행적은 대부분 파악을 했고요. 신주의협을 제외하면 말이죠. 보다 자세한 것은 전체 회의가 끝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마염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민정화는 비록 어리지만 얼마나 똑 부러지는지, 그리고 하오문의 정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익히 알기 때문이다.
사제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자지도 먹지도 않고 단숨에 달려갈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원래 문무대가 하던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몇몇 혈승들은 밝혀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찾는 일은 제갈윤 대원의 지휘 아래 기존 문무대 대원들이 계속할 겁니다.”
제갈윤이 목례를 하며 임무를 받았다.
부담이 컸지만 뒤로 뺄 수는 없었다.
가급적 한 명의 혈승이라도 더 밝혀내면 그만큼 승리할 확률이 올라갈 테니까.
“마지막으로… 이게 시급한 과제인데… 척혈단의 중심이 되어야 할 강한월 단장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할 일입니다만 우선은 곽철과 진가린 대원이 맡을 겁니다.”
“그 중요한 일을 단 두 명이서 맡는다고?”
“나름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만약 두 대원이 성공하지 못하면 이후 다시 협의하도록 하죠.”
“좋아. 그런데… 민 소저는 어떤 역할을 맡는가? 물론 척혈단의 군사이겠지?”
“제갈현선 총군사님이 계시고 제갈윤 소협도 있는데 제가 어찌… 전 그저 멀리 떨어진 대원들 간에 원활한 교신이 이뤄지도록 지원하는 역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변방으로 떠난 황태자 일행을 포함해서요.”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척혈단의 구성의 축하하는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강한월이 행방불명이고 맹주는 자리에서 쫓겨난 마당에 뭔 술자리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신나게 마셔야 한다는 게 민정화와 제갈윤의 생각이었다.
슬픔을 잊어야 했고, 의지를 다져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공포를 이겨내야 했으니까.
“호호호, 다들 마시자고요. 맹주님과 천마신교 교인들이 함께 술 마시는 걸 언제 또 보겠어요?”
“하하, 그러자고. 대장도 분명 지금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기루에 보관된 술은 많았고 이야깃거리도 끝이 없었다.
흥겨운 자리가 해 뜰 녘까지 계속된 건 당연했다.
그런데… 흥겨운 술자리를 준비한 것은 척혈단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