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혈승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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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모임은 황궁 인근의 저택이었지만 이번엔 진짜 중심으로 진입했다.
황궁 안의 가장 화려한 전각이 모임 장소.
불과 몇 달 만에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이건 정말 감회가 새롭군. 회귀 전에는 황제를 피해 도망 다녔었는데 지금은 황궁을 차지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어. 현재 우리의 성공은 뱀의 공로가 커.”
용과 호랑이가 감탄사와 칭찬을 늘어놓았다.
공치사로 들리진 않았다.
정말로 감격스러웠고 지난날의 노력이 보상받는 듯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성별까지 바꿔가며… 늙은 황제의 품속을 파고들며 만들어낸 기회인데.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난 호랑이가 무림맹주가 된 것이 의미가 크다고 봐. 지난 생에서 가장 골치 아팠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정파의 척혈단이었으니까.”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에는 척혈단이 등장해선 안 된다는 것. 그 이유 때문에 일부러 정파 무림으로 회귀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맹주의 자리에 올랐지만 정파 무림을 완전히 장악하진 못했네. 앞으로 할 일이 많아.”
“상황이 어떤데?”
“오대세가 중에는 제갈세가가 눈엣가시지. 맹주 선발에서는 나에게 표를 주긴 했지만 총군사였던 제갈현선과 무림맹에 있던 가주의 아들의 행방불명 이후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제갈세가야 큰 문제는 아니지. 머리 쓰는 것 외엔 별다른 힘은 없는 곳이니까. 진짜 문제는….”
“구파일방인 거로군.”
“맞아. 소림은 뱀과 용 자네들이 뒤집어 놓은 이후 봉문을 선언했지만 언제 반기를 들고 나설지 모르고, 무당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무엇보다 화산이 문제인데… 화산의 자랑이었던 맹주 위무진에게 내가 누명을 씌웠다고 의심하고 있어.”
“호호,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야. 구파일방 내에서 화산의 입지는 상당하지. 도교 문파들 사이의 유대감도 무시할 수 없고. 화산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못 하도록 막아야 하네.”
“흥, 화산 말코도사들. 회귀 전에도 척혈단에 참여해서 귀찮게 하더만….”
이후 이야기는 정파 무림을 정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호랑이가 무림 맹주로서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정파 무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
그건 의외로 여러 방법이 있었다.
“오대세가라도 하나로 묶어 사병처럼 쓰려면 제갈세가는 사라져 주는 것이 좋겠군. 관료로 진출한 제갈세가 방계들이 여럿 있던데 그들에게 역모죄를 씌우면 되겠어. 그럼 제갈세가 본가까지 엮을 수 있으니.”
이런 식의 모의가 오갔다.
당사자들이 들었으면 소름 돋는 이야기였지만 뱀, 용, 호랑이는 매우 신이 났다.
마치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라도 된 느낌.
“나도 몇 문파는 제거해주겠네. 흑사련 내에 전문 살수 조직이 여럿 있으니 그들을 활용해도 좋고.”
“그도 좋지만 더 확실한 계획이 있네.”
“보다 확실한 계획? 그게 뭔가?”
“한 방에 왕창 정리하는 계획이지. 바로 정마대전을 일으키는 거야.”
뱀과 용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만큼 매력적인 말이었다. 정마대전.
“확실히 멋진 계획이군. 천마신교가 정파무림을 침공하면 무림맹 문파 중 최소 삼 분의 일은 박살이 나겠어.”
“그게 다가 아닐세. 정마대전으로 혼돈에 빠져 있을 때 흑사련도 침공을 해주는 거지. 비협조적인 문파들만 골라서 정리를 해주게.”
“푸하하하, 정말 멋지군. 정마대전에 이어 흑사련의 침공이라니. 이 두 사건만 잘 처리하면 호랑이 자네가 정파 무림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겠어.”
“그럴 생각이야. 우선은 정마대전을 끝내고 또 흑사련의 침공을 막아낸 영웅으로 등극한 후에 말이지. 껄껄껄.”
상세한 논의가 이어졌다.
정마대전을 꼭 천마신교에서 일으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무림맹에서 먼저 십만대산으로 진격하면 그만.
그것을 위해 필요한 건 커다란 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이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천마신교를 혹세무민의 사교로 지정하고 척살을 명해달라 이 말이군.”
“그래. 황제가 칙서 한 장만 써주면 나머진 내가 처리하겠네. 무림맹 내에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호전파들이 많이 있거든.”
“어찌 보면 이 또한 통쾌한 복수가 되겠어. 회귀 전에 우리 혈교도 황제가 사교로 지정하는 바람에 전 무림의 공격을 받았으니.”
“저기… 그런데….”
호랑이와 뱀의 계획을 듣고 있던 용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다 좋긴 한데… 만약 천마신교가 생각보다 강하면 어쩌지? 무림맹이 완전히 박살이 나면? 그럼 호랑이 자네의 기반을 잃게 되는 거 아닌가?”
“에이 설마.”
“아니야, 잘 생각해보게. 무림맹은 이미 약해지기 시작했네. 우선 소림이 봉문을 하고 전력에서 이탈했잖아?”
그건 용의 말이 맞았다.
정마대전이 벌어진다면 무림맹의 가장 강력한 칼이 되어줄 수 있는 건 원래 소림.
게다가 두뇌 역할을 해줄 제갈세가마저 낌새가 이상하니….
“흠… 좀 더 분석을 해봐야겠군.”
“그래, 천마신교의 전력부터 철저히 확인해야 할 거야. 그리고 또 하나 걸리는 게 있네.”
“또 뭐가 있는데?”
“과연 천마신교에는 우리 동료가 없을까?”
“물론 있겠지.”
뱀과 호랑이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황실에도 있고, 무림맹에도 있고, 흑사련에도 있으니 당연히 천마신교에도….
“만약에… 만에 하나 말이지… 그게 자 혈승이라면….”
세상을 다 차지한 것 같이 들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저 ‘자 혈승’이란 단어 한번 말했을 뿐인데.
“휴우. 자네 말이 맞아. 천마신교는 좀 더 알아봐야겠어. 무턱대고 정마대전을 일으킬 수는 없겠군.”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한 게 있네. 일전에 신룡대회 때 있었던 일인데… 왜 내가 용 자네 딸을 구해준 적이 있지 않나.”
“그랬었지. 그런데 그게 왜?”
“그때 누군가가 난입을 했었는데 그자가 마공을 사용했었어.”
“무림맹의 행사가 열리는 곳에 마공을 쓰는 자가 뛰어들었다고? 그건 정말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군.”
“그래. 천마신교, 특히나 자 혈승과의 연결고리가 있는지 밝혀내야 해. 이 일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까?”
질문의 모양새를 취했으나 실은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혈승 동료들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기기로 진작부터 이야기된 사람이 있으니까.
“호호, 안 그래도 원숭이를 부르려던 참이었어.”
뱀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밖에서 대기 중인 환관에게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제대로 예복을 차려 입은 대명제국의 황제, 그리고 원숭이였다.
“하하하, 형님들 안녕하십니까? 모두들 성공하셨군요. 아우가 감축드립니다.”
“오랜만이군 원숭이. 소식은 들었다. 어쨌든… 반갑군.”
용과 호랑이 모두 원숭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같이 흥겨운 자리에선 굳이 인상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시켜야 할 일도 있으니….
“그런데 솔직히 좀 서운합니다. 이런 자리가 있으면 저도 끼워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부르시다니요.”
“서운해할 것 없네. 수좌 혈승끼리 회의가 있었던 것이니.”
“아, 물론 제가 비술계열의 수좌는 아니죠. 하지만 여기는 제 혈노 소유의 집 아닙니까?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선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던데….”
원숭이가 강조하고 싶은 게 그거였다.
황제를 혈노로 부리는 건 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그렇기에 굳이 필요도 없는 황제까지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후후, 그래. 황제를 혈노로 부리는 건 너였지. 황제를 만인지상이라 부르지만 실은 네가 만인지상이군.”
“헤헤, 저야 언제나 형님들 아래인걸요.”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걸 원숭이는 알았다.
서운하고 심통이 나서 한마디 한 거지만, 뱀은 말할 것도 없고 용과 호랑이도 무시무시한 자들.
자칫 잘못하다간 대접을 받기는커녕 역효과만 날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 아우를 부르신 걸 보니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본데….”
“그래.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아, 이미 뱀 형님께 들었습니다. 나머지 동료들을 찾는 일 말씀인 거죠? 하하하,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확실히 해내겠습니다.”
원숭이는 이 임무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동료를 찾는다는 핑계를 대고 온 천하를 유람할 수 있으니까.
황제를 혈노로 두고 있으니 세상 어느 곳에 가더라도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고 말이다.
소름 돋는 뱀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그렇다고 놀기만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최소한 말 혈승만큼은 꼭 찾고 싶었다.
문무대 감옥에서 탈출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내줬지만, 동료들을 살해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말은 꼭 죽여서 입을 막아야 했다.
다른 혈승들이 그를 찾기 전에 말이다.
그러니 지금 맡겨진 이 임무는 천운이라 생각했다.
이어지는 뱀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머지 동료들을 찾는 임무가 맞는데, 네가 우선 확인해줘야 할 곳이 있다.”
“그게 어디죠? 제가 바람같이 달려가서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하하하.”
“천마신교.”
“네? 뭐라고요?”
원숭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천마신교에 가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원숭이가 놀란 까닭은 따로 있었다.
‘천마신교? 거긴 미친개가 있던 곳이잖아? 게다가 문무대 녀석들과 관련된 곳이고. 내가 미쳤어? 거길 가게.’
원숭이는 강한월을 마주치게 될까 두려웠다.
언젠가는 처절한 복수를 해 줄 생각이지만, 그리고 황제를 혈노로 뒀으니 조만간 그럴 힘이 생길 거라 믿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강한월 앞에서 항상 큰소리를 쳤었지만 실은 그를 볼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원초적인 두려움이 솟구쳤던 것이다.
뱀이나 용보다 더한 두려움.
굳이 비교하자면… 자 혈승 앞에 선 것 같은….
“천마신교에 가 줘야겠다. 가서 직접 확인하고 와. 혹시 그곳에 자 혈승이 있지는 않은지.”
“천마신교… 자 혈승이라고요?”
이것들이 정말!
원숭이의 표정이 창백하다 못해 파래졌다.
“형님들. 저한테 죽으러 가란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황제를 계속 부리려면 네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왜 너를 사지로 내몬다는 말이냐?”
“하지만 천마신교는… 게다가 자 혈승은….”
“원숭이.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이냐? 넌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가는 거야. 아무리 천마라 하더라도 감히 황제의 특사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어. 게다가 자 혈승은 우리에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뭐가 문제지?”
그런 뻔한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내뱉는 네가 문제다!
그렇게 안전한 일이면 너희들이 직접 가던가!
원숭이는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흠…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아니, 안 가겠다는 건 아니고요… 계획을 좀 세워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하지만 너무 오래 생각하진 말고. 우린 가급적 빨리 확인하길 원하니까.”
“자,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술이나 마시자고.”
“하하, 그래야지. 황궁의 술은 분명 최고급이겠지? 이 봐, 원숭이. 황제에게 술 좀 따르라고 시켜라. 하하하.”
척혈단이 머무는 기루에 술이 넘쳐나는 것처럼, 이곳 황궁의 창고에도 술은 많았다.
환관과 궁녀들은 수십 동이의 술을 날라야 했고, 황제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모두가 즐거웠다.
술맛도 못 느끼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원숭이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