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강한월의 구도 (1)
* * *
강한월은 소림을 떠났다.
올 때는 동료들과 함께였지만, 떠날 때는 혼자였다.
허리에는 천으로 둘둘 만 삼안혈도가 덩그러니 매달려있었다.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해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송목 대사 곁에 좀 더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역근경 내공을 넘겨준 후 많이 쇠약해진 노승은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봉문을 선언한 소림의 분위기도 손님이 머물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낙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곳엔 더 이상 문무대가 없었고, 대원들이 어디로 피신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오문의 민정화와 연락을 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홀로 걸었다.
이렇게 혼자 지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때는 제법 흔한 일이었다. 사부 신주의협이 일을 보러 나가면 몇 달이고 혼자 지내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외롭다는 느낌이 없었다.
사부가 돌아와 자신을 챙겨줄 것을 믿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몹시 외로웠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문무대 동료들과의 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것이리라.
한편으론 자유롭기도 했다.
홀가분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혈승을 잡아야 한다는 중압감, 동료들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
홀로 걷지 않았다면 그런 무거운 감정에서 한 시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건 그도 알았다.
열흘? 한 달? 혹은 반년?
자신이 짊어진 짐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강한월은 걷고 또 걸었다.
어떨 때는 소달구지를 얻어 타기도 했고, 어떨 때는 보부상의 행렬을 뒤따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간 후에야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 * *
길을 떠난 지 백 일쯤 되었을까?
소림을 나선 후 한 번도 몸 상태를 점검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었을 뿐이니 내공을 쓸 일도 없었다.
갑자기 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개울가의 고즈넉한 나무를 보니 저 밑에 앉아 좌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편안히 앉아 몸 안을 관조했다.
뼈와 근육, 신경과 장기는 모두 정상이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튼튼해진 것 같았다.
역근경의 효능인가?
강한월은 조심스럽게 기맥을 살폈다.
내력을 역행한 탓에 터지고 끊겼던 기맥은 모두 치료되어 있었다.
이건 송목 대사께 감사해야 했다.
귀한 대환단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본인의 진원지기까지 써서 치료해주신 것이니까.
기맥이 예전보다 좁아진 듯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운기행공을 안 했으니 길이 좁아질 수밖에.
다시 단련을 시작하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잠시 망설였다.
혈관과 피.
자신이 평생 달고 살았던 질병.
행동에 이상이 없는 것을 보니 피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이 음극과 양극이 되어 생명력을 순환시키던 것을 역근경이 홀로 해내고 있단 말인가?
최대한 집중하여 피의 흐름을 쫓았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액체가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 순간에는 그야말로 붉은 액체일 뿐, 생명력을 전달하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액체가 의미 없이 흐를 때, 단전에서 어떤 기운이 슬며시 일어났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절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자연스러웠다.
역근경 공력.
그 힘이 부드럽게 피로 스며들자 피가 생명력을 얻었다.
그러니 이젠 단전을 살펴봐야 했다.
사실 지금까지 강한월이 운기행공도 않고 몸을 방치했던 건 이 순간이 거북했기 때문이다.
송목 대사가 전해준 내공.
너무 미안했고, 또한 내 것 같지 않았으니까.
몸 안에 남의 것을 지니고 사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전부와 같았던 마불진경의 힘이 사라진 걸 직접 확인하는 것도 괴로웠다.
그래,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겠지.
강한월의 의식이 단전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역근경의 힘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 * *
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했건만… 정말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건가?
자고로 은혜를 베풀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청송문 문주 장학송은 화를 참지 못했다.
수염까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제대로 열 받은 모양인데, 온화하고 넉넉한 그의 성품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라.”
하지만 상대는 꿈쩍하지 않았다.
“자는 척해도 소용없어. 듣고 있는 거 다 아니까.”
그제야 눈을 뜬 상대는 장학송을 힐끗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 정말…!”
장학송은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상대는 넓은 평상을 홀로 차지하고 낮잠을 자던 누렁이.
강아지답게 바닥에서 자든가 아니면 평상 모퉁이에서 쪼그리고 자면 될 것을, 꼭 이렇게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아서 장학송이 누울 자리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으르릉, 깨갱.
“어림없다, 이놈!”
제법 날쌘 누렁이와 몇 번의 드잡이질을 벌인 후에야 장학송은 평상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완전히 승리하지는 못해 누렁이를 품에 안고 누워야 했지만 말이다.
오후의 따뜻한 햇빛과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좋았다.
북실북실한 누렁이 털도 제법 쓰다듬는 맛이 있었다.
역시 낮잠은 이렇게 야외 평상에서….
“휴우, 사부님. 오후 수련하신다더니 그렇게 퍼져 계시면 어떡해요?”
마당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던 영근이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모르는 소리. 나에겐 낮잠을 자는 것도 수련이라는 말이다. 너도 나중에 내 경지에 오르면 알게 될 거다.”
“네. 어련하시겠어요. 가린 사저는 객지에서 홀로 고생하고 있을 텐데… 사부라는 분은 이렇게 늘어져서….”
“가린이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냐? 가뜩이나 보고 싶은 거 참고 있는데.”
“사저 이름을 팔아야 사부님이 몸을 움직이시니까 그렇죠.”
“됐다. 잔소리 그만하고 마을 입구에나 나가봐라. 내 천기를 보아하니 조만간 귀한 손님이 찾아올 것 같구나.”
“또요? 전에도 천기 어쩌고 하시더니 누렁이만 데리고 오셨잖아요.”
“누렁이가 어때서? 나중에 너랑 송윤이마저 떠나고 나면 내 곁을 지킬 건 요놈밖에 없을 텐데.”
“떠나긴 누가 떠난다고 그러세요?”
얼핏 보면 싸우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정이 넘치는 대화가 한창 오가고 있을 때, 마을에 나갔던 송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부님, 사부님!”
“왜? 무슨 큰일이라도 났느냐?”
“손님이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고요.”
* * *
“허허, 이것 참.”
차를 다리며 강한월을 힐끔힐끔 살피던 장학송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문주님? 저에게 무슨 문제라도…?”
“아, 손님을 앞에 앉혀 놓고 죄송하오.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강 소협의 기도가 변해도 너무 변해서….”
역시 장학송은 강한월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봤다.
강한월이 아는 한 장학송은 신주의협을 제외하면 최고의 고수.
무공을 회복하는 중이라 당장의 무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무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에 있어선 분명 그러했다.
그런 장학송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문주님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 변화가 긍정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 반대인지….”
강한월의 목소리가 꽤나 심각했나 보다.
전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럽더니 지금은 조바심 가득한 어린아이 같았다.
재미있다는 듯 강한월의 표정을 살피던 장학송이 피식 웃었다.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앞으로 좋을지 아닐지 어찌 알겠소?”
“네…?”
“무공이 강해져 불행해지는 사람도 많고,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지. 마공을 익혀 성불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선도를 닦다가 악마로 변하는 사람도 있는 법.”
“그 말씀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멋지게 표현한 거라오. 하하하. 그보다 강 소협의 이야기나 좀 들어봅시다. 지난번 헤어진 이후로 꽤나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소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당장에 장학송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배려였다.
무작정 동쪽으로 걷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지만, 어쩌면 강한월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꽤나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만.”
“그럼 더더욱 좋고. 보시다시피 무료하던 참이라.”
강한월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기에 뒤죽박죽 두서가 없었다.
그럼에도 장학송은 잘 들어줬다.
말을 끊지 않았고, 질문도 하지 않았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고 때가 되어 밥을 지어 먹었다.
눈치 빠른 영근이 행자나무집 소춘 할멈에게서 술을 받아왔다.
술을 몇 잔 마시니 말이 더 많아졌다.
“주무실 시간이 지난 것 같군요.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마저 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먼 길 온 강 소협도 피곤할 테니.”
송윤이 객방에 잠자리를 봐 두었다.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서는 강한월의 뒷모습을 향해 장학송이 말했다.
“전에 알던 강 소협은 요점만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더군. 다른 건 모르겠고… 그건 좋아 보였소.”
* * *
강한월은 두 발을 뻗고 누웠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기 전 마불진경을 수련했었지만 그것도 이미 한참 전 이야기.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오늘은 왠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악몽을 꾼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매일 밤 꿈속에서 봐야 했던 그 처절한 대결과 비명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소림에 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꿈이 그것이었나?
누군가가 심검을 수련하던 그 꿈.
그런 꿈이라면 한 번쯤 더 꾸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 * *
왕왕 개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장학송은 아침부터 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를 키우면 이게 안 좋다는 말이오. 좋든 싫든 산책을 나가줘야 하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싱글벙글 웃고 있는 걸 보니 누렁이보다 산책을 더 즐기는 건 본인 같았다.
앞장선 누렁이를 쫓아 장학송과 강한월이 함께 걸었다.
안개가 걷히는 시간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누렁이는 능숙하게 산을 올랐고 시야가 탁 트인 능선 위에서 멈췄다.
“여기서 좀 쉬어 갑시다.”
장학송이 널찍한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소매 춤에서 오이를 몇 개 꺼냈다.
“이것 좀 드셔보시오. 누렁이 것까지 세 개를 가져왔으니.”
“개가 오이도 먹습니까?”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이는 맛있었다.
우적우적 씹으니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강 소협. 어제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보시오.”
“아, 아닙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후회가 되더군요.”
“그래요? 나는 재밌게 들었는데. 그럼 더는 할 이야기가 없는 거요?”
“네,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구려. 나는 강 소협이 ‘심검’ 이야기를 하려는 줄 알았지.”
하마터면 쥐고 있던 오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장학송은 왜 뜬금없이 심검을 언급한 걸까?
그리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혹시… 심검에 대해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 *
“사부님, 무슨 산책을 이렇게 오래 하셨어요? 강 소협은 왜 같이 안 오고요?”
누렁이를 앞세우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장학송에게 영근이 물었다.
“산책이야 느긋하게 즐기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릴 때도 있는 거지 뭐. 그리고 강 소협은… 혼자 생각할 게 있는 것 같더라.”
“그래요? 어쩌죠… 아침밥 차려놨는데.”
“아마 점심도 못 먹을 거야. 저녁도 어떨지 모르겠고.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