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강한월의 구도 (2)
* * *
마치 바위와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강한월은 몇 시진째 꼼짝하지 않고, 장학송이 해 준 말만 곱씹었다.
갑자기 심검을 언급한 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라고 했다.
내공이 바뀌고 기도가 변했으니 추구해야 할 길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왠지 그 길이 심검일 것 같았다고.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부가 신주의협이니 검의 길이 보였을 것이고, 역근경의 내공을 얻었으니 기존의 무공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게다가 사상 초유의 강대한 적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강한월은 좋든 싫든 최강의 무공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더라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적인 무공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심검처럼 정체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은 또 없지요. 그 경지에 올랐다고 증명된 사람도 없고, 익히는 방법이 기술된 책도 없으니….”
장학송의 말이 맞았다.
무림 역사상 최고라고 추앙받는 달마대사, 장삼봉 진인, 초대 천마도 심검을 익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강 소협의 사부이신 신주의협이라면 확실한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해 줄 말이 별로 없소. 심검은 우리 동방선도와는 결이 많이 다르거든. 그럼에도 굳이 몇 마디 하자면… 지름길은 없다는 거요.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야 하지.”
“지금의 제 수준이 감히 심검을 익힐 단계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강 소협의 재능이야 두말할 필요 없지. 그 나이에 그 수준에 오른 사람은 무림 역사를 통틀어서 몇 없을 거요. 하지만 그래봐야 현재 수준은 절대경의 중간 정도?”
“마불진경의 무공을 잃기 전에는 그 정도였을 겁니다. 지금은 역근경에 적응하지 못해 형편없는 수준이고요.”
“그건 문제 될 게 없소. 수십 년간 무공을 잃었던 나도 있는데 뭐. 어쨌든….”
장학송의 말은 이러했다.
심검이 정말 지고한 경지의 무공이라면 절대경의 수준에선 절대로 길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당연히 절대경을 넘어 초월경에 올라서야 심검에 다가갈 기회가 생기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그러니 강 소협은 송목 대사께 감사해야 하오. 초월경의 문을 열어준 것이 그분이니.”
“역근경이 초월경으로 가는 열쇠라는 뜻입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기회를 제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을 동시에 익힌 덕에 강한월은 혈액의 병을 치유함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경지가 상승하는 혜택을 누렸다.
한편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도 발생했는데,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이 음극과 양극이 되어 상호작용한다는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절대경을 꿈꾸는 다른 고수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절대경 너머를 바라보는 강한월에게는 치명적인 문제.
절대경 다음은 초월경.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하는 경지인데, 정해진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내공이 발목을 잡으니 초월경에 도달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이다.
송목 대사가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을 없앤 것은 말하자면 그 틀을 깨버리고 올가미를 벗겨준 것.
“게다가 더 감사한 것은 새로운 내공으로 역근경을 심어준 것이라오.”
“역근경의 무속성 특징 때문이군요?”
“그렇소. 자기만의 분명한 색깔을 가지는 여타의 내공과 달리 역근경은 색깔이 없소.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며, 심지어 불가(佛家)의 특징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 기존의 것을 탈피해야 오를 수 있는 초월경에 이보다 더 적합한 내공이 어디 있을까?”
그런 것이었구나.
이제야 강한월은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송목 대사가 과감하게 자신의 내공을 모두 지웠는지, 어째서 심검을 언급하셨는지.
“그렇다면 소림에서 제가 당했던 일은… 기맥이 뒤틀리고 단전을 파괴당했던 것까지 모두 행운이었단 말입니까?”
“어제 말하지 않았소? 나는 잘 모른다고. 초월경에 오르고 심검을 완성한 들 그게 행운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 다만… 혈승들을 상대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 거요.”
장학송과의 대화는 이게 다였다.
그 이후로 바위에 앉아 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서 심검은 지워버렸다.
지금은 우선 초월경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학송 문주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지도 분명해졌다.
* * *
영근이 막 저녁상을 차리고 있을 때 강한월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 치를 모자라게 준비한 영근은 심통이 날 밖에.
“사부님. 강 소협은 저녁도 먹기 힘들 거라면서요?”
“허허, 그러게. 내가 틀렸네.”
영근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고 장학송은 강한월을 맞았다.
“강 소협. 예상보다 빨리 오셨구려. 생각은 좀 정리가 되셨고?”
“그렇습니다.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깨달았습니다. 문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것은….”
“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강한월은 마음이 급했지만 장학송은 천하태평이었다.
밥도 일부러 천천히 먹는 듯했다.
혹시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움을 청하는 형편에 재촉할 수도 없는 일.
저녁을 먹은 후 느긋하게 숭늉을 마셨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누렁이를 끌고 야간 산책을 다녀온 후에야 강한월은 장학송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원래 삶이 이렇다오. 아무리 급해도 밥은 먹어야 하고 개도 산책시켜야 하는 거지. 그래, 강 소협이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
“네, 문주님. 그… 초월경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더 이상 심검 이야기는 아니어서 다행이군. 나도 조금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으니까.”
“경청하겠습니다.”
“강 소협은 초월경을 뜻하는 다른 이름들을 알고 있겠지요?”
“사부님이 경지의 구분에 대해 설명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도가(道家)와 무림의 구분은 차이가 있는데, 무림의 기준으로 보자면 자연경, 여의경 등이 그것입니다.”
“정확하오. 사실 우리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절대경이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경지라 할 수 있소. 말 그대로 ‘절대’이니까. 하지만 초월경이 그보다 높은 경지라면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경지란 말씀입니까? 하지만 문주님만 하더라도 분명 초월경에….”
“나는 적절한 예시는 아니고. 강 소협의 사부님은 확실히 초월경 혹은 그 이상이라 알려졌으니 분명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지.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절대 초월경에 들지 못하는 것이고.”
말을 하면서 장학송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는데, 이런 류의 애매모호한 이야기는 스스로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 듯 말 듯 한 말들 속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강한월은 정신을 집중했다.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어 자연에 가까워져야만 한다는 뜻이군요. 그렇기에 자연경이라고도 불린다는….”
“강 소협은 이해력이 좋군. 굳이 조금 덧붙이자면, ‘초월’이란 단어를 쓴다고 해서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음… 그 부분은 이해가 어렵습니다만.”
“저기 저 담벼락 아래의 화초를 보시오. 인간과 저 화초 중 무엇이 더 자연에 가깝겠소?”
“그야 저 화초겠지요.”
“그렇지. 그럼 저 화초는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인 거요?”
“그래 보이지는 않습니다.”
“맞소. 그렇기에 내가 이 애매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는 거라오. ‘초월’이라는 단어에 현혹되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초월경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데 있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강 소협이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초월경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거요. 그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첫 단추임은 분명하오.”
강한월은 묵묵히 장학송의 말을 곱씹었다.
신주의협의 모습, 눈앞의 장학송의 모습, 최근에 겪은 일들… 그런 것들이 뒤죽박죽 엉켜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참이 지난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연경이라 불리는 것이고… 결국 자연체로군요.”
“하하하, 정말 강 소협하고는 대화를 나누는 재미가 있다니까.”
* * *
다음 날 아침.
강한월은 영근, 송윤과 함께 목검을 잡았다.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몸에 체득되어 있는 무공과 초식을 버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이 방법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검 두 자루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강한월이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알았기에 영근과 송윤은 망설임 없이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쉬이익, 샤악. 탕~
헉.
불과 삼 초식을 막은 후 하마터면 영근의 검에 허리를 찔릴 뻔했다.
막기 어려운 검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수비식을 펼치던 중 그것이 마불진경의 초식임을 깨닫고 주춤했기 때문이다.
“저… 괜찮으세요?”
“아, 괜찮고 말고. 계속 부탁할게. 가능하면 더 빠르게.”
검들이 다시 춤을 췄다.
영근과 송윤의 수준은 아직 낮았지만 동방선도의 검은 확실히 달랐다.
마치 잉어가 헤엄치듯이 유연하고 힘차게 치고 들어왔다.
몸에 익은 초식을 쓰지 않으려던 강한월은 양손을 묶고 싸우는 것 같았고, 채 십여 초가 지나지 않아 어깨와 허벅지를 얻어맞았다.
“강 소협 대장님….”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헤헤, 그래도 될까요? 강 형님. 제 주제에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지금 너무 이상해요.”
“내가 이상하다고?”
“가린 사저만큼은 아니지만 제 눈에도 흐름이 조금은 보이거든요.”
“보기에… 많이 안 좋았나?”
“장터의 삼류 건달이 싸울 때도 나름의 흐름이 있는 법인데, 좀 전의 형님은 뒤죽박죽 엉망이었어요. 뭔가 연결될까 싶으면 끊기고, 들쭉날쭉….”
강한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근이 제대로 본 것이다. 마불진경도, 금검문의 무공도 아닌 데다가 본능적인 움직임도 아니었으니.
“물론 너희 사부님과도 지도 대련을 해봤겠지?”
“당연하죠. 거의 매일 하는걸요.”
“장학송 문주님의 흐름은 어떤 모습이지? 면면부절 부드럽게 연결되겠지?”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초월경의 고수인 장학송의 움직임은 어떤 흐름을 그릴까?
그것을 알면 초월경에 다가갈 단초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였다.
“흠, 사부님의 흐름이라… 글쎄요, 그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송윤이 너 기억나니?”
“아니오. 사부님과 대련할 때는 그런 거 안 보이는데요. 물론 전 아직 실력이….”
영근과 송윤은 장학송의 흐름은 읽지 못하는 듯했다.
이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강한월의 생각엔 그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초월경의 고수에겐 흐름 자체가 없는 게 분명했다.
자연체.
모든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떻게 움직여도 타당하니까.
달리 말하자면 흐름이 없는 게 아니고 오히려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겠지.
강한월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정해진 흐름이 없다는 것은 모든 흐름이 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가?
마불진경과 금검문의 무공을 모두 잊으면 나도 빈틈없이 꽉 찬 흐름을 만들게 될까?
명상인지 망상인지 모를 생각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영근과 송윤은 보이지 않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장학송 문주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시오?”
“아, 아직 머릿속이 복잡해서요.”
“그럴 때는 차라리 생각을 안 하는 게 좋지. 머리는 그만 쓰고 몸을 움직이는 게 나을 거요. 이번엔 나하고 대련을 해봅시다.”
강한월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장학송이 목검을 날렸다.
따악!
확실히 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존 무공을 자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정수리를 얻어맞았다.
“머리 굴리지 말라니까. 가지고 있는 무공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오!”
다시 매서운 공격이 날아왔다.
정수리를 계속 얻어맞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 한번 해보자.
강한월은 최선의 초식을 사용하여 반격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