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강한월의 구도 (3)
* * *
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은 내공과 초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의 공력을 잃은 강한월의 마불진경 초식은 원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목검을 사용하는 이런 대련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검에 대한 이해와 순발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까.
무공을 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없다면 장학송의 검을 충분히 막을 수….
따악!
다시 한번 정수리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런, 미안하게 되었군. 제법 아플 텐데.”
어째서 막지 못한 거지?
검에 관해선 일대종사라 할 수 있는 천마신교 부교주와의 초식 대결에서도 승리했던 나인데?
장학송 문주가 초월경이라 그런가?
하지만 문주도 공력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시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의아해할 필요 없소. 답은 뻔한데 뭐.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니까.”
목검이 홍수처럼 퍼부었다.
강한월도 정신없이 검을 마주 휘둘렀다.
이상한 것은, 그러자 더 이상 얻어맞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백 초, 이백 초, 삼백 초… 끊임없이 검과 검이 마주쳤다.
확실히 천지원기와 호흡하는 장학송은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내공을 쓰지 않는 강한월은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신이 났다.
소림에서의 일을 겪은 후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은 처음이었다.
몇 초식이나 겨뤘을까?
지켜보던 영근과 송윤이 슬슬 하품을 시작할 때, 장학송이 검을 거두며 물러섰다.
“이쯤 합시다. 몸을 너무 혹사하는 것도 좋지 않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근육은 비명을 질렀지만 강한월은 표정이 밝았다.
“그래… 좀 어땠소?”
“네? 어떤 부분을 물으시는 것인지…?”
“기존의 무공이 좀 버려진 것 같소?”
“아… 그건….”
“내가 볼 땐 정해진 초식만 계속 쓰던 것 같던데?”
“그렇습니까? 흠… 제가 이번엔 신경을 안 썼던 터라 아마도 습관적으로….”
강한월의 얼굴이 굳었다.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장학송이 개구장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 정말 강 소협이 기존 무공 초식만 사용했어요?”
“왜? 아닌 것 같니?”
“제 수준이 낮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형적인 검법을 쓰는 것 같진 않던데요?”
“제법이네. 잘 봤다. 처음 백여 초는 습관처럼 익숙한 검초가 튀어나왔지만 그 이후엔 전혀 달랐지.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았고 그때그때 새로운 검로를 만들어 내더구나.”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거짓말은 무슨! 그냥 장난 좀 친 거지. 하루 이틀 지나면 놀릴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장학송의 생각이 맞았다.
다음 날도 강하월은 장학송과 대련을 계속했는데, 더 이상 장난이 통하지 않았다.
스스로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 몰려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부터는 기존의 무공을 모두 잊고 자신만의 검을 펼친다는 것을.
감히 자연체라 생각하지도, 초월경의 모습이라 말하지도 않았지만, 동작이 군더더기가 없고 간결해지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대련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강한월의 검은 묶은 때를 벗었다.
다섯째 날 대련이 끝난 후 강한월이 물었다.
“문주님과 대련을 할 때는 막강한 공격을 막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습니다.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죠. 그런데… 만약 저보다 약한 사람과 대결할 때는 어떨까요?”
“당연히 이런저런 생각이 나겠지요. 여유가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런 대련 방식도 초월경에 이르는 완전한 방법은 아니겠군요.”
물끄러미 강한월을 바라보던 장학송이 검을 내려놓더니 평상에 가서 앉았다.
“강 소협. 이리 와서 앉아봐요. 오늘은 이야기나 좀 합시다.”
장학송이 아는 강한월은 천재였고 재능을 타고났으며 진중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신주의협을 사부로 모셨으니 무공에 대한 이해와 지식도 뛰어났다.
그런 그가 이런 검술 대결을 통해 초월경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했다고?
“내가 보기엔 강 소협은 지금 마음이 너무 급해요.”
“마음이 급한 게 아니라 실제로 시간이 없습니다. 적들은 빠르게 세력을 키우고 있고, 도피한 대원들은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빨리 무공을 완성하지 못하면….”
“그게 초월경이랑 무슨 상관이오?”
“네…?”
“초월경이란 경지일 따름이지 신이 아니오. 강 소협의 형편 따위 알지도 못한다는 말이오.”
장학송은 평소와는 다르게 차갑게 말했다.
강한월이 벽을 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가린의 안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니까.
“단계를 넘길 원하는 수행자들이 왜 세상과 연을 끊고 산속에 처박혀 지내는지 모르는 거요? 세속의 인과 연만큼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 없어서 그렇소. 절대경에 진입하는 것도 그러한데 하물며 초월경이야….”
“하지만 제 사부님께서는 협객으로 활동하시면서도 경지에 오르셨습니다만….”
“아주 특별한 경우요. 그리고 강 소협의 경우와는 두 가지가 다르지. 첫째, 내 확신하건대 신주의협께서는 무조건 초월경에 들어야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으셨을 거요. 강박이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강 소협과는 천지 차이지. 둘째, 며칠 혹은 몇 달 만에 벽을 넘어야 한다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강한월은 바보가 아니다.
장학송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아이처럼 떼쓰고 싶었다.
“문주님. 하지만 저와 대련을 해주셨지 않습니까? 분명 이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셨을 텐데요?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길을 알려주십시오.”
“휴우. 처음에 내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오. 나도 정확한 방법은 알지 못하지. 그럼에도 내가 대련을 했던 이유는….”
우선은 무아지경을 경험 시켜주고 싶었다.
기존의 방식과 틀을 벗어버리는 첫 번째 단계가 그것이니까.
시간만 충분했다면 이런 대련을 통해 초월경에 한 발 한 발 다가갈 수 있었다.
게다가 대련 중 장학송의 움직임은 자연체.
무의식중에 강한월은 자연체의 동작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익숙해지면 장학송은 대련의 수준을 조금씩 낮출 생각이었다.
정신없이 몰아붙이지 않으면 강한월의 의식이 살아날 것이고, 무의식에 빠지지 않고도 기존 무공을 잊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초월경의 문을 열기 직전까지 도달한 것이 되니까.
하지만 장학송의 이런 계획을 쫓아가기엔 강한월의 마음이 급했다.
“강 소협. 세상에 서둘러서 되는 일은 없다는 게 내 지론이지만… 정히 빠른 성취를 원한다면 모험을 해볼 순 있겠소. 물론 위험도 따르지만.”
“가르침을 주십시오, 문주님. 어떤 위험도 감내하겠습니다.”
“좋소. 한번 해봅시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장학송이 고안한 방법은 정말 파격적이고 변칙적이었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동방선도의 문주로서 절대로 생각해선 안 될 방법.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에 시도해도 될 일 안 될 일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그 방법이란 강한월의 기억을 한시적으로 제어하는 것이었다.
장학송은 영선기를 상단전에 주입해 뇌의 기능 일부를 마비시킬 수 있었다.
기억을 잃으면 강한월은 원하든 원치 않던 과거에 익힌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 몸을 단련하여 자연체의 움직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만큼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강한월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의지를 보였다.
“문주님.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몸을 단련할 수 있을까요? 문주님이 곁에서 이끌어주시는 겁니까?”
“아니. 강 소협 혼자서 해내야 하오. 나를 포함하여 누구든 친분이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기억을 통제하는 효과가 지속될 수 없소.”
“그렇다면 어떻게…?”
“기억을 없애면서 한가지 무의식을 주입할 거요.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강 소협은 이곳을 떠나 계속 싸우시오. 몸이 새로운 움직임을 터득할 때까지.”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억을 되돌릴 방법이 궁금할 거요. 그건 걱정 마시오. 강 소협의 몸이 새롭게 거듭나면 단전에 잠들어 있는 역근경 공력이 자연스레 일어날 테니. 역근경이 강 소협의 것으로 융화되면 상단전을 막고 있는 영선기를 알아서 녹여버릴 것이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강 소협. 천천히 잘 생각해보시오. 두말할 필요 없이 이건 매우 위험한 방법이오. 내공도 쓰지 않고 과거의 무공도 모두 지우고 실전을 치르는 거요. 오로지 감각과 무의식에 의존한 채. 어떤 강적을 만날지, 어떤 악인과 대면하게 될지 알 수가….”
“하겠습니다. 제 기억을 지워주십시오.”
“흠… 좋소. 한번 해봅시다.”
* * *
다음 날, 강한월이 떠났다.
올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삼일 후 장백산 지역을 벗어날 때쯤 장학송이 심어 놓은 영선기가 작동할 것이었다.
청송문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영근과 송윤은 검술을 연마했고, 장학송은 누렁이를 끼고 평상에 누웠다.
한 달쯤 시간이 흘러 강한월이 다녀갔다는 사실도 희미해질 무렵,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일남 일녀였는데, 한 명은 손님이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사실 손님이라 할 수는 없었다.
“사부님, 영근아, 송윤아~ 저 왔어요.”
멀리서부터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온 것은 진가린과 곽철이었다.
“가린 사저! 어째 연락도 없이… 그건 그렇고 사저는 매번 올 때마다 남자를 데리고 오네요.”
“호호, 영근이 네가 농담이 많이 늘었구나. 어디 무공도 그만큼 늘었는지 한번 볼까?”
진가린이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었고 영근은 얼른 장학송 뒤로 숨었다.
“가린아, 잘 왔다. 일단 밥부터 먹자.”
“사부님. 제가 갑자기 왔는데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예상하고 계시던 거예요?”
진가린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자신이 올 것을 사부가 예상하고 있었다면, 분명 강한월도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
먼 장백산까지 찾아온 것이 헛걸음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예상은 했다만… 아직은 네 얼굴이 펴질 상황은 아닌 것 같구나. 강 소협은 이곳을 떠났다.”
“벌써… 떠났다고요?”
이곳으로 오면서 진가린은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청송문에 가면 강한월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강한월이 홀로 떠났다는 소식을 소림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 문무대 대원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다.
대장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더 높은 무공을 찾기 위해 구도행을 떠났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소림에서 무시무시한 괴인들을 만나 끔찍한 부상을 입었으니 현 상태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신주의협을 찾아갔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강한월도 사부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고, 무작정 찾아 헤맬 시간은 없으니까.
천마에게 갔을 거라는 의견도 말이 되질 않았다.
소림이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강한월은 마공을 잃었고, 그렇다면 천마에게 무공을 가르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무당의 소요자도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장학송 문주일 확률이 높다고 진가린이 주장했다.
자주 천하를 주유하는 소요자와는 달리 장학송은 장백산을 벗어나질 않고, 무공을 버렸다가 다시 회복했던 경험이 강한월의 현 상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근거였다.
그래서 곽철과 함께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제가 늦었네요. 새로운 무공을 연마하느라 이곳에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제자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장학송은 괜히 미안해졌다.
게다가 강한월이 어떤 상태로 세상에 나간 줄 알면 분명 화를 낼 텐데….
“사부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사부님이 대장의 기억을 지웠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곽철이 민망해질 정도로 진가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게 완전히 지운 건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벽을 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잠시만….”
“어쨌든요! 대장은 지금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혼자 떠돌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날 오후, 아쉬워하는 사부와 사제들을 뒤로하고 진가린과 곽철은 다시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