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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17화 (206/210)

117화. 설산의 천궁 (1)

* * *

신주의협과 조탁 노인을 태운 마차는 옥룡설산을 향해 달렸다.

무척 먼 거리인데다 길이 험해서 한 달을 달렸지만 아직도 천궁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넘게 붙어있었으니 제법 많은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공유된 정보가 제한적이었는데, 신주의협은 정체가 들통나지 않도록 조심했고 조탁 노인도 천궁에 관해서 함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감은 잡을 수 있었다.

천궁은 대단한 고수들을 보유한 대단한 조직이라는 것.

느낌일 뿐이지만 왠지 소림이나 무당 못지않은 강력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악한 조직은 아닌 것 같았다.

조탁은 천궁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세상의 빛이 될 거라 믿었다.

물론 조탁이 세뇌를 당했을 수도 있지만… 설마.

“신월. 지겨운 마차 여행도 이제 내일이면 끝이다.”

“드디어… 천궁에 도착하는 겁니까?”

“그래.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지만 않으면 내일 도착하게 될 거야. 해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하겠네.”

“경청하겠습니다.”

“이번에 여행을 같이하면서 자네의 됨됨이에 대해 파악했다고 자부하네.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그건 내 개인 의견일 뿐. 천궁에서는 별도로 자네 뒷조사를 할 거야. 규칙이 그러니 이해 바라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문제없습니다.”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만, 길어지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 그 기간 동안은 자네는 대기자 숙소에서 머물러야 하네. 안락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이 제공되지만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는 없다네.”

조탁은 조금 미안한 표정이었다.

좋게 포장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은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천궁과 같은 훌륭한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군. 어쨌든 대기자 신분으로 있는 동안은 어떤 질문도 허용되지 않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잘 참아야 하네.”

“알겠습니다. 숙소의 다른 대기자들과 대화하는 건 가능하겠지요?”

“당연히. 벙어리 흉내를 내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들과 너무 친해질 필요는 없네. 신분 조사가 끝나면 입궁 시험이 있을 거고, 결국 그들은 자네 경쟁자가 될 테니까.”

“어떤 시험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때그때 다르다네. 말했다시피 천궁에는 뛰어난 어른들이 계시네. 그중 천사장과 좌우 호법은 정말로 대단하시지. 그분들이 시험 내용을 정하실 거야.”

천사장과 좌우 호법이라….

조탁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그들은 과연 누굴까?

좌우 호법은 혹시 천룡사와 만검산장의 인물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그곳들이 천궁과 관련이 있음은 확실하고, 천룡사와 만검산장의 수뇌부라면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

하지만 천사장이란 인물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천룡사와 만검산장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그리고 그런 자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는 천궁의 궁주는?

“내가 자네 궁금증만 더 키운 모양이군. 천궁에 가입하게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고, 탈락하게 되면 알 필요 없는 것이니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네. 먼 길 피곤할 텐데 잠시 눈이라도 붙이게나.”

* * *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눈길을 밤새 달린 마차가 드디어 멈췄다.

“이것이… 천궁이군요.”

신주의협은 눈앞의 장관에 말문이 막혔다.

흩날리는 눈발 뒤로 보이는 거대한 전각들.

눈과 얼음뿐인 이 높은 산지에 어떻게 저런 건축을 할 수 있는지….

“장관이지? 나도 처음 봤을 땐 눈을 의심했다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북해의 빙궁도 이보다 근사하진 않을 거야.”

신주의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궁에 방문한 적이 있어서 조탁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언제 지어진 걸까?

척 보기에도 최소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맹주로 재직하던 기간이란 말인데… 천하 곳곳에 뻗어 있는 무림맹의 정보망에 이런 대공사가 걸리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자, 들어가세. 내부가 더 장관이라네.”

조탁을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갔다.

수석 판별관이라는 조탁의 지위도 꽤나 높은 것인지 마주치는 사람들이 예를 표했고, 동행하는 신주의협도 일절 제지받지 않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안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세. 아쉽지만 한동안은 못 보겠군.”

대기소 책임자에게 신주의협을 인계하며 조탁이 말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는 겁니까?”

“시험이 치러질 땐 볼 수 있을 거야. 꼭 참석해서 응원하겠네.”

“감사합니다.”

뒤돌아서는 조탁을 향해 신주의협이 예를 표했다.

감사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덕분에 천궁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 * *

신주의협과 헤어진 조탁은 좌호법의 방으로 향했다.

복귀 신고를 해야 했고, 겸사겸사 자신이 뽑아온 특급 인재에 대해 보고를 하기 위함이다.

“장주님. 속하 조탁, 업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일흔은 되어 보이는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이 조탁을 맞았다.

신주의협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천궁의 좌호법은 만검산장의 장주 황우치였다.

“어허, 장주라는 호칭은 쓰지 말래도 그러는구나. 이곳은 만검산장이 아니라 천궁임을 잊지 말게.”

“좌호법이라는 호칭보다는 장주님이 더 입에 붙는 걸 어쩝니까?”

“이 사람 참. 그건 그렇고… 대단한 인재를 발굴했다고?”

“네. 이번엔 저도 칭찬을 좀 들어야겠습니다. 특상 중에서도 특상의 인재를 데려왔으니까요.”

“별일이군. 자네처럼 눈이 까다로운 자가 그렇게 칭찬을 하다니.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러나?”

“신월은 파동심공 제일 편을 일각도 채 안 되어 완벽히 성공했습니다.”

“사실인가?”

황우치는 크게 놀랐다.

평생 무공을 연구해 검종(劍宗)이라 불리는 자신도 그 심공을 구현하는 데 반 시진이 걸렸는데….

“이해력과 자질만 뛰어난 게 아닙니다. 제가 겪어보니 품성도 중후하고 바릅니다.”

“그렇게 훌륭한 인재가 왜 지금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까?”

조탁이 칭찬을 하면 할수록 황우치가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이 정도 인재라면 천궁에서도 중용하게 될 텐데, 그러려면 보다 철저한 신분 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무공 수련을 하며 홀로 지냈으니까요. 명예욕이나 물욕이 있는 친구가 아닙니다.”

“좋아. 자네가 큰 공을 세웠어. 아무쪼록 신월 그자가 무사히 입궁하게 되기를 기대하겠네.”

“그래야지요. 천룡사 측에서 구해온 인재가 아무리 대단해도 신월을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 하하하.”

* * *

대기소는 두 가지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지의 선발소에서 정상적인 채용 과정을 거쳐 뽑혀온 자들은 일반 대기소에 머물렀고, 현재는 약 오십 명이 있었다.

신주의협은 특급 대기소로 보내졌다.

커다란 숙소에서 단체생활을 하는 일반 대기소와 달리 특급 대기소는 별채를 사용했고 개별 침실이 제공됐다.

“새로 오신 분이구려? 반갑소. 난 단유라 하고, 이쪽은 하우철 형님이시오.”

잘생긴 삼십 대 청년과 사십 대 중년인이 신주의협에게 인사했다.

특급 대기소에 먼저 입소해 있었나 본데, 단유가 사근사근하게 맞아준 것에 반해 하우철은 표정이 냉랭했다.

“대기소 선배들이시군요. 저는 신월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선배는 무슨… 시험은 같이 치르니 결국 입궁 동기가 될 텐데요. 물론 합격을 한다면 말이죠.”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실은 치열하게 서로를 파악 중이었다.

딴에는 단단히 감추고 있었지만 신주의협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단유는 그 나이에선 보기 드물게도 초절정의 고수였다.

정명한 불가의 기운이 은은히 풍겼는데, 어려서부터 귀한 영약을 복용하고 명사들의 지도를 받은 명문의 직계들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자신감과 여유도 보였다.

의문의 여지 없이 대리 단왕부의 왕족.

그에 반해 하우철의 기도는 조금 종잡을 수 없었다. 일단은 판단 유보.

한편 단유와 하우철은 의아한 혹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신주의협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잘해야 일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류 수준의 무사가 특급 대기소에 배정될 리는 없는 법.

분명 뭔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오늘은 새로운 동료가 왔으니 조촐히 회식을 하도록 합시다. 이런 날 술을 안 마실 수 없잖아요?”

“대기소에서 술을 마셔도 됩니까?”

“하하하, 물론이지요. 시비에게 말하면 술은 얼마든지 제공됩니다. 그것도 꽤 고급술이요.”

* * *

대기소에서 생활한 지 며칠이 지났다.

신입이 들어왔으니 회식을 하자는 건 핑계였음이 드러났다.

단유는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하루도 빼지 않고 술잔을 돌렸으니까.

신주의협도 흔쾌히 동참했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단유와 하우철의 입에서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신주의협은 하우철의 실체를 파악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하우철이 찰나의 순간 기세를 노출했는데, 신주의협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꽤 대단한 실력, 그리고 신주의협의 초감각을 삼 일이나 피했으니 기세를 감추는 능력은 더 대단했다.

‘절대경의 벽을 넘기 직전이군. 극양(極陽)의 기운인데… 설마 태양궁?’

알고 봤더니 하우철도 실력과 신분을 숨기고 천궁에 잠입했던 것이었다.

본인 소개를 할 때는 천양문의 무공을 배웠다고 하더니.

하긴 천양문도 양기에 치우친 내공이니 태양궁의 무공을 숨기기엔 적합하긴 했다.

상황이 공교롭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단유. 자네는 분명 대리 단가의 왕족이겠지?”

“뭐 대단할 건 없지만… 실은 그렇습니다. 하하하.”

“대단하지 않기는. 나 같은 사람 눈에는 엄청 대단하게 보인다네.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는 왕족이 어째서 천궁에 지원한 거지?”

하우철이 긴장하지 않도록 신주의협은 우선 단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제로 단유가 여기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왕족이긴 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정도로 높은 위치는 아니라서 말이죠. 조정에 들어가 일을 하거나 그게 아니면 천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야 하는데, 둘 다 싫지 뭡니까. 그래서 천궁에 지원한 거죠.”

신주의협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단가의 왕족들은 단왕부를 위해 봉사하거나 아니면 천룡사로 가는 것이 전통.

그 전통의 예외로 인정될 만큼 천궁의 위치가 높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럼… 하우 형은 어떻게 이곳에 지원하게 된 겁니까?”

“나는….”

취기가 오른 하우철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나도 신월 자네와 다를 바 없네. 보수가 좋은 일거리를 찾다가 우연히 지원한 거야.”

“그게 조금 이상해서 말이죠. 하우 형은 천양문의 무공을 익히셨다고 했는데, 이곳의 날씨는 극양의 내공을 익힌 무인에겐 어울리지 않네요. 태양이 작렬하는 곳이면 공력 증진에 효과가 좋을 텐데요?”

‘태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하우철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신주의협의 뭔가를 아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든 것 같았다.

하지만 하우철의 눈빛은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태양궁의 공력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눈앞에 그런 사람이 앉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지원하는 순간엔 천궁이 이런 설산에 있는지 몰랐다네.”

“그렇네요. 저는 천궁이라는 이름도 모르고 지원했으니까요.”

더 이상 자극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신주의협은 질문을 멈췄다.

이후엔 단유의 농담을 들어가며 술을 마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신주의협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한 줄기 연기처럼 창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최고의 살수가 펼치는 은신술도 이보단 못할 것 같았다.

웬만한 고수라면 절대 느끼지 못할 은밀한 움직임.

신주의협은 그보다 더 은밀한 움직임으로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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