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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18화 (207/210)

118화. 설산의 천궁 (2)

* * *

검은 그림자로 변한 하후철은 천궁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움직임에 거침이 없는 걸 보니 이렇게 몰래 침투하는 것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순찰을 도는 경비 무사를 피해 전진하던 하후철은 후원을 지나 사찰로 보이는 전각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만큼 경비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스으윽.

하후철의 모습이 뿌옇게 변하더니 벽돌의 색깔에 동화되었다.

그런 모습으로 다시 움직이는 하후철.

방향은 지하였다.

대단하군.

신주의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항상 당당하게 행동했기에 은신술을 익히진 않았지만, 그 원리와 효능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하후철이 펼치는 것은 은신술 중에서도 최상의 종류였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대막 태양궁의 전수자가 도둑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살금살금 움직인 하후철은 지하 삼 층까지 내려왔다.

벽에 걸린 작은 횃불 하나가 어른거리는 그곳엔 두꺼운 철문이 있었다.

조용히 철문을 응시하던 하후철은 은신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철문을 열 방법을 찾는 것 같았는데, 여러 겹의 시건 장치로 잠겨 있는 문이었다.

방법이 있을까?

신주의협은 하후철이 하는 양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소리 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후철은 자물쇠에 몇 번 손을 가져가다가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단숨에 부수고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좋지 않은데…?

신주의협의 귀에 순찰을 도는 경비 무사의 소리가 잡혔다.

하지만 경비 무사가 무음의 보법으로 걷고 있어서 하후철은 아직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경비 무사가 지하 삼 층 계단에 들어설 때 즘이야 알아챌 텐데, 그러면 하후철이 다시 은신술을 펼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신주의협이 손가락을 튕겼다.

경력 한 줄기가 손가락에서 뻗어나가 계단을 굽이굽이 지나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경비 무사가 발을 딛는 바닥에 정확히 떨어졌다.

탁.

작은 소리였지만 귀에 들릴 정도는 되었다.

경비 무사는 돌 조각을 밟았다고 생각했고, 하후철은 서둘러 은신술을 펼쳐 천장으로 스며들었다.

오늘은 별 성과가 없겠군.

쓴웃음을 지은 신주의협이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 * *

하후철은 이틀에 한 번꼴로 야행을 나갔다.

첫날 갔던 지하실만 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 문서고, 무기고까지 가능한 여러 곳을 훑었다.

신주의협은 빠짐없이 뒤를 밟았는데, 하후철의 행동이 궁금하기도 했고 이를 통해 천궁의 구석구석을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드르렁… 단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주의협은 침상에서 일어나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하후철이 창문을 빠져나왔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평소와 달랐다.

지금까지는 피해왔던 곳. 천궁 중앙의 내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왜지? 갑자기 용기가 생겼나?

아니면 무슨 다급한 사정이라도…?

지금껏 내전을 피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내전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침소.

좌우엔 각각 좌호법과 우호법의 침소가, 그리고 정원을 사이에 두고 뒤편에는 천사장의 침소가 자리한 것이다.

하후철의 은신술로 절대경 고수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냐고?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하후철은 내전에 점점 가까워졌다.

평소보다 천천히,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봤자 초절정이 펼치는 은신술… 십 장만 더 접근하면 발각당할 위험이 컸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도와줘 볼까?’

신주의협의 몸에서 내력이 흘러나왔다.

안개처럼 은밀히 퍼져 나간 기운이 하후철 주변 삼 장 정도의 공간을 둘러쌌다.

시선까지 막아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기척이나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는 해줄 수 있었다.

도움받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하후철은 용감히 내전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썩은 기와장이 있었는지, 조그마한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주의협의 손끝에서 잠력이 쏘아졌고, 조각은 바닥에 충돌하기 직전 공중에서 멈췄다.

손이 많이 가는 친구로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뒤를 쫓았다.

내전의 구조는 전혀 모르는 듯 하후철은 방향을 헤맸다.

그러다가 결국 향한 곳은 지하실.

자꾸만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하후철이 찾는 것은 아마도 수감실이 아닌가 싶었다.

구해야 할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내전의 지하실은 다른 전각들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경비가 삼엄했다.

시간에 맞춰 순찰을 도는 것이 아니라 지하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 붙박이로 서 있는 경비병.

졸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경비병은 생생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하후철은 어떻게 할까?

급습을 가해 경비병들을 제압하면 지하로 내려갈 순 있겠지만, 흔적이 남을 수밖에.

무려 일 다경 가까이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하후철의 고민이 깊은 듯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일단은 포기하고 철수하는 게 맞는데… 뜻밖에도 바보 같은 행동이 시작됐다.

하후철이 경비병을 향해 강력한 지풍을 날린 것이다.

휴우, 이건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도와야 했다.

침입자가 있다는 게 드러나면 신주의협의 활동에도 제약이 생길 테니까.

후발선착.

나중에 쏜 신주의협의 경력이 먼저 도착했다.

몰래 하후철의 지풍을 붙잡아 소멸시킨 후, 계속 날아가 경비병의 수혈을 짚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하후철의 지풍은 거칠어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고, 극양의 흔적이 남으면 그가 잡히는 건 시간 문제.

하우철이 쓰러지는 경비병을 낚아채 조용히 눕혔다.

약간의 소음은 있었지만 신주의협이 쳐 놓은 기막이 해결해주었다.

지하로 조심스레 내려가는 하후철.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는 순간 몸이 굳었다.

지하실 복도의 등잔에 갑자기 불이 켜진 것이다.

술법이구나!

불이 켜지는 순간 상단전을 자극한 묘한 느낌을 통해 신주의협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침입자를 막기 위한 비술인지, 아니면 단순히 불을 밝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비술이 이미 발동되었고, 시전자에게도 신호가 갔을 거라는 사실.

하후철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 당황하지 말고 잘 들어라. 대답할 필요는 없어. 넌 방금 비술의 끈을 건드렸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야 】

갑자기 뇌리에서 음성이 울리자 하후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혜광심어급의 초상승 전음을 구사하는 초고수가?

【 지금은 생각할 시간도 없다. 빨리 퇴각해야 해. 어서! 】

어쨌든 하후철도 절대에 근접한 고수.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더니 급히 몸을 돌려 빠져나갔다.

하후철이 내전 지붕 위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신주의협은 경력을 쏘아 잠들었던 경비병을 깨웠다.

그리고는 어두운 기둥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갈지 조금 더 확인하기 위해.

과연 숨 몇 번 쉴 시간 후에 머리까지 덮는 붉은 바람막이를 입은 사내 둘이 나타났다.

“경비병. 어찌된 일이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만.”

“흥, 멍청한 것.”

사내들이 지하로 뛰어가더니 곧 다시 올라왔다.

“침입자가 있었다. 너는 몰랐다는 말이냐?”

“그, 그럴 리가요? 술법사님들이 잘못 보신 거겠죠.”

경비병은 자신이 잠깐 존 것 같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흥, 조사해보면 알겠지. 너는 경비대장께 보고하도록. 우리는 호법님들께 알릴 테니.”

술법사들이 돌아갔고 신주의협도 조용히 내전을 빠져나왔다.

대기소로 돌아가는 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음침한 기운을 뿌리는 술사들… 정명한 천룡사나 만검산장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 * *

원래도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오늘따라 하후철의 안색이 더 안 좋았다.

“하후 형. 어디 아프십니까? 통 말도 없으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단유가 말을 걸어봤지만 하후철은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홀로 산책이라도 하려는 모양.

신주의협이 슬쩍 따라 나갔다.

“하후 형.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저랑 이야기를 좀 합시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것일 뿐이니.”

목소리가 싸늘했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 표정에 드러났다.

【 어젯밤 일이 걱정되는 것인가? 그러게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지? 】

하후철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젯밤의 그 고수가 대기소 신입 신월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니까.

“이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 드시오?”

“가, 갑시다. 요 앞에 조용한 곳이 있소.”

바위에 덮인 눈을 털어내고 하후철이 걸터앉았다.

하지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신주의협은 묵묵히 기다렸다.

“휴우. 귀하가 누구신지 먼저 여쭙고 싶지만… 물어도 대답해주실 것 같지 않군요.”

하후철은 공손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젯밤의 상황만 보더라도 상대가 월등한 고수라는 게 분명했고, 또한 이미 도움을 받은 입장이니까.

“자네 이야기를 먼저 해보게. 나에 대해선 필요하면 이야기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천양문의 하후철이 아닙니다. 본명은 양소철이고….”

“대막 태양궁 출신이겠지.”

“대단하시네요. 제 무공은 철저히 숨겼다고 자신했는데. 맞습니다. 저는 태양궁 전대 궁주님의 둘째 제자입니다.”

“전대 궁주? 태양궁 광대휘 궁주가 은퇴했다는 말인가?”

하후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삼십 대로 보이는 신월이 사부님의 이름을 낮춰 부르는데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들리는 걸까?

“사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뭐? 광대휘가…?”

안타까웠다.

태양궁주 광대휘는 이미 십수 년 전 경지를 넘은 절대 고수.

무공이 너무 극양에 치우친 탓에 편협한 면이 있지만 세상에 그를 이길 자는 많지 않은데….

강한월을 도와 달라고 부탁할 전대 고수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세상을 뜨게 된 걸까?

“자네가 천궁에 잠입한 것이 사부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가?”

“관련이 있지요. 사부님의 죽음과 대사형의 실종. 모든 것이 천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게.”

“그러니까… 저희 태양궁은 중원 무림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습니다. 대막에 위치한 탓에 거리가 너무 머니까요. 인근의 몇몇 부락과 대막의 상인들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왔습니다. 돌을 찾는 사람들이.”

“돌? 혹시 시간의 돌 말인가?”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저희는 태양석이라고 부릅니다만 그들은 시간의 돌이라고 부르더군요. 태양궁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인데, 이유는 모릅니다만 안전하게 보관하라는 초대 궁주님의 유훈이 있었지요.”

“계속해 보게.”

그들이 찾아온 것은 사 년쯤 전이었다.

외부 손님을 반기지 않는 궁주가 이번에는 반갑게 맞았다.

아마도 친분이 깊은 혹은 존경하는 누군가의 소개장을 들고 온 것 같았는데, 궁주가 밝히지 않아서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극진히 예를 갖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손님들이 어떤 이야기를 꺼내자 궁주의 안색이 변했다.

“시간의 돌을 달라고 했겠군.”

“그렇습니다. 손님들은 태양석을 원했습니다.”

대단히 무례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크게 화를 내고 당장 쫓아내야 옳았지만… 궁주는 망설였다.

“광대휘는 성격이 불같은 사내였는데, 이 일에 있어서는 대단한 참을성을 발휘했군.”

“궁의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죠. 도대체 그 손님들의 뒤에 누가 있길래….”

한참을 고심하던 궁주는 결국 애매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이 직접 시간의 돌을 들고 찾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분’을 만나 뵌 후 돌을 드릴지 말지 결정을 하겠다고.

“그것이 제가 뵌 사부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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