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설산의 천궁 (3)
* * *
일 년이 지나도 궁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대막 상인들의 연락망을 이용하면 충분히 소식을 전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걱정이 된 대제자, 하후철의 사형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사형은 직접 사부님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사부님의 무공을 생각하면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지만… 사형은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손님들과의 연회 자리에서 들었던 몇 가지 단서, 옥룡설산과 천궁이라는 단어 만을 가지고 태양궁의 대제자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 년 후, 사형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사부님은 돌아가셨다, 나는 복수를 해야 하니 태양궁은 네가 맡아 달라는 짧은 글이었죠.”
“안타깝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후로 다시 일 년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추가 소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후철도 복수를 위해, 그리고 사형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무작정 쳐들어가 봐야 소용없다는 건 사형이 이미 증명했으니 자신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약물을 써서 외모를 바꾸고, 가명을 만들고, 공력이 유사한 천양문의 제자로 위장했다.
수소문한 끝에 천궁이 정기적으로 무사를 뽑는다는 걸 알고 지원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밤마다 탐색을 나갔던 건…?”
“사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하네. 그런데 어젯밤엔 왜 그렇게 서둘렀지? 들키게 될 것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그건… 신월… 당신 때문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조만간 시험이 있을 건데 최종 합격은 단 두 명일 거라고 단유가 말하더군요. 당신이 오기 전에는 저도 합격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제는 자신할 수 없으니까요. 시험이 있기 전에 반드시 사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건 이해했네. 하지만 어째서 자네가 탈락할 거라 생각했지? 내 무공이 자네보다 높아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실은 제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리석게도 말이죠. 하지만 시험은 무공이 다가 아닙니다. 신원조회를 철저히 하는데 제가 위조한 천양문의 신분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후보가 둘이라면 모를까, 셋이라면 불확실한 저를 탈락시킬 가능성이 크죠.”
신주의협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바보 같은 짓을 하나 했더니 자신 때문이란다.
무모하고 어리석었지만 사부와 사형을 위해 목숨을 거는 자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자를 돕지 않으면 신주의협이 아닌 것이고.
“이제부턴 밤에 돌아다니지 말게. 어젯밤 일 때문에 경계가 강화되었을 테니.”
“하지만 전 사형을 찾아야 합니다.”
“자네 실력으론 불가능해. 내가 대신 찾아보겠네.”
하후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단한 고수로 보이는 자가 도와주겠다니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이자는 도대체 누군데 나를 돕겠다는 거지?
“외람됩니다만… 누군지도 모르는 분의 도움을 받을 순 없습니다.”
“나는 자세 사부와 인연이 있네.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신주의협은 내공을 움직여 역용술을 풀었다.
얼굴의 근육이 움직이며 모습이 변하자, 지켜보던 하후철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놀라기엔 일렀다.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으니.
“내 이름은 고검. 자네 사부는 나를 신주의협이라 불렀다네.”
* * *
“하후 형.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의원이라도 불러드려요?”
단유가 걱정스레 물었다.
산책을 다녀온 후 하후철의 안색이 더 창백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아! 나는 괜찮네.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안색이 퍼런데. 제 말이 맞죠, 신월 형?”
“이곳 날씨 때문이 아닐까 싶군. 여긴 냉랭한 음기가 승한 곳이라 하후 형의 천양문 공력에 영향을 주는 걸지도….”
“그래. 신… 신월 말이 맞아. 요 며칠 공력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한 것 같았어.”
단유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이내 수긍했다.
타인의 공력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져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나기도 했고.
“그럼 빨리 운기행공이라도 해서 공력을 가다듬으세요. 좀 전에 연락이 왔는데 오후에 호법님들 면담이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호법님들이? 왜 갑자기? 드디어 시험을 치르는 건가?”
“저도 몰라요. 시험은 아닌 것 같으니 너무 긴장하진 마시고요.”
* * *
어젯밤의 일은 즉각 좌우 호법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경비대장, 술사들, 수석 판별사인 조탁 노인까지 참석한 회의가 열린 것은 당연한 일.
드러난 피해는 없으니 크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격론이 오갔다.
가장 먼저 논의된 주제는 침입자가 누구냐는 것.
경비대장은 외부에서 침입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천궁은 눈 덮인 옥룡설산의 꼭대기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
사방이 얼음 절벽으로 막혀 있고 유일한 통로는 경비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럼 내부인이란 소리인데… 대기소의 무사들이 의심되는군.”
우호법인 천룡사 수인 대사의 말이었고, 은근히 좌호법 황우치의 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신입 무사의 선발은 좌호법의 책임이니까.
“일반 대기소의 무인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경비를 뚫고 내전에 접근할 실력이 안 됩니다.”
경비대장도 대기소를 의심하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특급 대기소를.
“특급 대기소엔 단 세 명뿐이니 조사가 수월할 거요. 게다가 그 셋 중 하나는 우호법의 손자뻘이니.”
“좌호법의 말에 뼈가 있구려. 설마 단가의 아이가 이런 엉뚱한 짓을 했겠소? 나는 차라리 조탁 수석이 새로 데려온 자가 의심스럽소. 그자가 오자마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글쎄요… 조사해보면 알 일이지요.”
이것이 특급 대기소의 세 명이 호출을 받게 된 사연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제법 긴장한 모습의 신주의협, 하후철, 단유가 방으로 들어왔다.
“호법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저희는….”
“인사는 되었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으니. 너희를 오라고 한 것은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야.”
시작부터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자 특급 대기소의 세 명은 표정이 굳었다.
각자 긴장하는 이유는 달랐지만.
“어젯밤 침입자가 있었다. 수많은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내전에 접근할 정도로 고수였지.”
“설마… 지금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단유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물었다.
왕족으로서 곱게 자란 그는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긴 천궁.
밖에서의 지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단유! 너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선 의심을 받는 게 당연하다! 부당하다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나 찾도록!”
우호법 수인 대사가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자신의 공명정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친족인 단유를 혼낸 것인데, 덕분에 분위기는 더더욱 가라앉았다.
“자네들이 결백하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네. 우리 천궁은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곳이 아니니까.”
좌호법 황우치가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설명했다.
어젯밤 침입자가 경비 무사의 혈도를 짚었는데 좌우 호법이 면밀히 검사하여 몸에 남은 내공의 흔적을 찾아냈다.
미세한 흔적일 뿐이지만 침입자의 내공의 성질과 수준을 밝혀냈고, 과연 셋 중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면 되는 거였다.
“자, 한 명씩 나와서 손을 내밀게. 단유, 너부터.”
단유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당당하게 나서서 양손을 내밀었다.
좌호법, 우호법이 각각 한 손씩 붙들고 내공을 검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후철은 애가 타들어 갔다.
【 경비 무사의 수혈을 짚은 건 나니까 자넨 걱정할 필요 없네 】
뭐라고? 경비 무사에게 지풍을 쏜 건 난데?
하후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주의협이 허튼소리를 할 리도 없고….
【 하지만 태양궁의 내공이 들통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야. 잠시 호흡을 멈추게. 놀라지 말고 】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의아해할 때, 신주의협이 몰래 방출한 공력이 하후철의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으며 얼른 숨을 멈췄다.
단전으로 스며든 공력이 하후철의 내공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태양궁 내공의 극단적인 양기가 부드럽게 순화되었다.
“좋아. 단유 자네의 공력은 확실히 침입자의 공력과는 다르군. 자, 다음은 하후철!”
하후철이 양손을 내밀었다.
애쓰고 있었지만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공을 검사당하면서 긴장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좌호법과 우호법의 내공이 하후철의 맥문을 통해 들어왔다.
경맥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더니 단전까지 내려와서 한참을 살폈다.
“이것이 천양문의 내공인가? 대단히 순수하면서도 부드러운 양기이군.”
우호법이 손을 떼며 말했다.
좌호법도 내공을 검사한 후 하후철에게 호감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태양궁 같은 극양의 공력에 대해서는 좀 아는데, 자네의 내공은 그것들과는 다르면서도 정순하군.”
하후철은 지옥 문턱에 다녀온 느낌이었고, 진심으로 신주의협에게 탄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좌우 호법이 신주의협의 내공에 대해서는 뭐라고 평할지 궁금해졌다.
“자네가 신월이군.”
신주의협의 맥문에 손을 얹으며 우호법이 말했다.
간단히 이름을 말한 것이지만, 말투와 표정은 네놈이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신주의협도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좌호법과 우호법의 내력이 들어오는 순간 역으로 그들의 내공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를 알 리 없는 호법들은 신중하고 꼼꼼하게 조사했다.
우호법은 신주의협이 침입자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 반대로 좌호법은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단유와 하후철을 조사할 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는데, 우호법은 갈수록 표정이 안 좋았고 좌호법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네가 전진파의 맥을 이었다더니 사실이었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물론 내공의 양이 부족하긴 해. 수준도 절정에 머물러 있고.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천궁에 정식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단기간에 공력을 보강하고 초절정에 도달할 방법이 있으니. 그렇지 않소, 우호법?”
“흥, 아직 시험도 안 치른 자에게 벌써부터 바람을 넣는 거요?”
우호법이 퉁명스레 말했고, 덕분에 좌호법은 기분이 좋아졌다.
우호법이 인상을 쓰면 쓸수록 그건 신월의 잠재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조사는 이것으로 끝났으니 자네들은 대기소로 돌아가도 좋네.”
“결과는 어떻습니까? 저희의 결백이 증명된 것입니까?”
단유의 질문에 퉁명스레 답한 건 우호법이었다.
“증명되었으니 보내주는 것 아니냐?”
* * *
대기소로 돌아오는 길.
하후철은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곁에서 쉬지 않고 떠드는 단유 때문이기도 했고, 신주의협도 뭔가 고민이 있는 듯 표정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신주의협은 실제로 고민이 있었다.
고민이라기보다는 강한 의구심인데, 좌호법과 우호법의 내공에서 무언가를 엿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고 또 자신의 내공을 감춰야 했기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찰나의 느낌이 사실이라면….
좌호법과 우호법의 내공 안에 아주 익숙한 성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창안한 하나의 심법이.
수년 전에 만들어서 누구에게도 선보인 적 없는 심법.
심지어 제자 강한월에게도 아직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천산 백응신장의 몸에서도 그렇고, 이곳 천궁에서도.
왜 자신의 흔적이 나오는 것인가?